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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에서 온 편지 -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 1년을 지내며(10)
- 2015년 6월 23일부터 2016년 6월 23일까지


글 김형호 미카엘 신부 |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선교사목

 

재미있는 상고어 단어들: 2016년 1월 11일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은 모국어인 상고어가 있지만 공식 언어는 프랑스어다. 문서화된 언어(관공서 서류)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며, 프랑스 식민지로 나라가 시작되었고 모든 학교에서 프랑스어로 가르친다. 그래서 초등학교만 다녔어도 불편하지 않게 프랑스어로 소통할 수 있다. 그런 반면 이곳에는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한 이들이 제법 있는데 이들은 상고어만 사용하면서 쉬운 프랑스어 단어를 조금 섞어 쓴다. 중아공 사람들은 거의 100% 상고어가 가능하고 70-80% 정도는 프랑스어로 말할 수 있다. (시골은 상고어만 쓰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이 나라 사람들은 상고어를 모국어로 100% 사용하지만 글로 쓸 수 있는 사람은 20~30%정도밖에 안 된다고 한다.

 

사람에 따라서, 그들의 형편에 따라서 이 나라 사람들은 프랑스어로 말했다가 상고어로 말했다가 두 언어를 상황에 따라 섞어서 사용한다. 주 언어는 프랑스어로 쓰며 몇몇 단어는 상고어를 쓰다가 예고 없이 주 언어를 상고어로 하다가 몇몇 단어는 프랑스어를 쓴다. 그러니 이 나라를 이해하고 이곳에 살기 위해선 프랑스어와 상고어를 다 알아야 하는 셈이다. 무역을 하거나 공관 주재원들, NGO 단체 활동가들은 프랑스어만 써도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나처럼 사목을 해야 하는 선교사들은 상고어를 잘 알아듣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프랑스어는 공부할 교재가 많은데 상고어는 교재가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먼저 오신 선배 남종우(그레고리오) 신부님이 상고어 공부를 위한 준비를 많이 해 주셨다. 오래 전 선교사가 만든 프랑스어로 된 ‘상고어 문법’의 번역과 ‘상고어-프랑스어 성경’을 다 타이핑해 주셨다. 하루 10여 시간, 2년이 넘게 작업을 해서 완성된 것들이다. 또 프랑스어의 ‘수많은 관용어 정리’를 하셨는데 난 이것들을 통해 공부하고 있다. 선배 신부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다른 언어에 비해 단어가 많지 않은 상고어는 ‘다의어’와 ‘합성어’가 많다. ‘다의어’는 그 상황을 정확히 이해해야만 알아들을 수 있다. ‘합성어’는 단어가 적기 때문에 새로운 언어들을 합성어로 만들어서 사용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프랑스어 단어가 더 편하면 프랑스어를 많이 쓰기도 하지만 새로운 단어는 합성어로 만들어서 사용한다. 이 ‘합성어’는 참 재미있는 표현들이 많아서 몇몇을 소개해본다. 비-하느님, 물(ngu-Nzapa), 무지개-하늘에 나타난 꽃(kongo so a sigigi na nduzu), 문-집의 입(yanga ti da), 나뭇가지-나무의 손(maboko ti keke), 신발-발의 가죽(poro ti gele), 위선-두 번째 마음(be ti use), 믿음-주는 마음(mungo be, ziango be), 손님-음식을 먹는 사람(zo ti tengo kobe), 기도하다-좋은 말씀을 읽다(diko nzoni tene), 단식-음식의 욕구 잠금(kangango nzala ti kobe), 침-입의 물(ngu ti yanga), 자물쇠-열쇠의 엄마(mama ti kekeleke), 우유-소의 젖의 물(Ngu ti me ti bagara), 예언자-하느님, 입, 사람(Wayanga-Nzapa), 학교-책을 이해하는 집(da mandango mbeti), 신학교-사제들의 책을 이해하는 집(da mandango mbeti ti abwa), 대성당, 주교좌-엄마 하느님 집(mama da Nzapa), 잉크-책에 쓰는 나무의 물(ngu ti keke ti sungo mbeti), 컴퓨터-책을 치는 기계(macini ti pika na mbeti), 물안개-물의 연기(guru ti ngu), 은행-돈을 지키는 집(da ti batango nginza), 자비-좋은 마음의 실천(salango nzoni be), 창자-사람의 안의 줄(kamba ti ya ti zo) 등이다.

 

황당함: 1월 31일

지난 화요일, 주일미사 한 대를 맡게 되었다. 주중에 한두 번씩 강론과 함께 미사주례를 하지만 이번 주에는 한 달에 한 번 있는 젊은이들을 위한 주일미사를 맡았다. 어린이부터 청년까지 400~500명이 참석하는데 통상적으로 한 달에 한 번, 마지막 주일 오후 4시에 한다. 그래서 나름 야심차게 준비한 강론을 교정 받고 외국어인지라 강론, 기도문, 복음 등을 두세 번은 읽어야 미사를 잘 봉헌할 수 있기에 충실히 준비하고 모처럼 여유롭게 아침을 맞았다. 교중미사가 끝나고 사제관을 찾은 사람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는데 황당한 비보가 들렸다. 젊은이 미사가 다음 주 금요일로 미뤄졌다는 것이다. 왜 그런지 물어보니 전기가 없는 날이고 발전기가 고장 나서 그렇단다. 젊은이 미사는 기타와 드럼이 곁들여지는, 춤추는 미사이기에 전기가 있어야 하는 건 맞다. 젊은이미사 책임자에게 왜 일찍 말하지 않았냐고 하니 아침 일찍(5시경) 왔었는데 내 방 문이 닫혀 있었다고 했다. 미리 확인하고 적어도 며칠 전에 말했어야지, 나는 외 국인이잖아 등등의 말을 퍼부었다.

   

애써 준비한 강론은 날아가고(쓰이지도 못하고) 교우 없는 주일미사를 드리는 상황을 맞았다. 상황을 알아차린 주임신부님이 조금은 미안한 듯 웃으면서 제구를 관리하는 분을 불러 미사 준비를 시켜주며 “내가 독서 읽고 복사 서줄까?” 한다. 나 같으면 미리 챙기지 못해 미안하다든지 책임자를 조금 야단치던지 했을 텐데…. 얄미운 건지 화가 난건지 모르겠지만 잠시 숨을 고르고는 성당에서 혼자 정성을 다해 주일미사를 드렸다. 교우가 없는 큰 성당에서의 미사는 처음이었다. 미사 중 많은 아름다운 추억들이 찾아들었다. 분심과는 달리 기도하게 되는, 그리고 감사하게 되는…. 언짢음을 표현한 젊은이미사 책임자에게 미안했고, 준비한 강론이 쓰이지 못함에 애석해 한 옹졸함을 반성했고, 있을 수 있는 가변성을 통해 나를 성숙시켜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했다. 오늘 그분께서는 황당함을 통해 잊지 못할 거룩한 추억을 주셨다.

 

통, 아이스크림: 2월 22일

아이스크림을 선물 받았다. 준 사람은 브라질 출신 수녀님. 나처럼 선교를 위해 이곳 방기에 살고 있는 분이다. 본당에서 교리교사로도 봉사하는데 집에 초대해서 방문을 했더니 이 통을 선물로 주었다. 그 안에는 정성껏 만든 밀가루 튀김(makara)이 있었다. 맛있게 나눠 먹고는 통을 버리지 않고 보관해 두었다. 수녀님의 정성을 기억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여기서는 이런 통들이 요긴하게 쓰이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일로 생기는 통들을 모으다가 조금 넘친다 싶어 아침에 통 안에 바나나 껍질을 넣어 겁 없이 버렸다. 그런데 잠시 후, 통은 깨끗하게 목욕을 하고 살아 돌아왔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여기고 누군가가 정성껏 씻어서 돌려준 것이다. 잠시 시원하고 달콤한, 여기서는 아주 귀한 아이스크림을 생각했다. 속은 비었지만 뚜껑에 예쁘게 남아 떠오르게 하는 그를. 분명 수녀님 두 분이 이 귀한 아이스크림을 먹진 않았을 것이다. 오래 전 누군가가 이 아이스크림을 사서 맛나게 나눠 먹었을 것이고 그 누군가의 집에서 이런저런 것들을 보관해 두었다가 어느 좋은 날 무엇인가를 담아 선물로 수녀원에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수녀원에서도 다양한 것들이 드나들다가 내가 놀러갔을 때 처음처럼 다시 선물로 건네졌을 것이다. 추측이 조금 다를 수 있겠지만 많이 다르진 않을 것이다. 여기 사람들이 플라스틱 통을 아주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 통은 특별한(?) 아이스크림 통이니 더 그럴 것이다. 맛있는, 이곳 사람들은 아직 한 번도 먹어보지 않았을 아이스크림 통을 보며 잠시 더위에 입맛을 가시며 아직은 생을 다 하지 않으려는 ‘선물의 빈 통’을 바라보며 다짐한다. ‘그래, 나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을 담아서 너를 건네주리라. 결코 너의 생을 내가 거두진 않겠다.’라고.

 

망고비와 고무장갑: 2월 29일

4년에 한 번 있는 2월 29일. 거의 넉 달 만에 비가 왔다. 이곳 사람들은 건기의 절정에 한두 번 오는 비를 ‘망고비’라고 한다. 배고픔에 더위와도 싸우는 보릿고개 같은 건기의 절정에 그나마 배불릴 망고가 이 비를 맞으며 살쪄 익기 때문이다. 작은 마당이 있는 집에는 망고나무가 한두 그루씩 있다. 오늘 나에겐 또 다른 기쁨이 있었다. 이곳에 살면서 그동안 해본 적 없던 손빨래를 거의 매일 한다. 가끔 이불과 베개와 제의를 빨았고 매일 청소를 해도 여지없이 쌓이는 먼지지만 방 청소를 자주하며 걸레도 열심히 빨았다. 아뿔싸! 그랬더니 손바닥이 벗겨지면서 주부습진(?)이 생겼다. 주부들의 고충을 조금은 이해하겠다며 위로했는데 정도를 높여가며 가렵기 시작했다. 건기의 절정에 얻은 작은 사순 선물이었다. 주변에 물어보니 건기이기도 하거니와 안 하던 빨래를 자주 해서 그렇기도 하고 재생비누가 좋지 않아서 그렇다고도 한다. “빨래를 발로 해라, 며칠씩 모아서 해라, 청소는 무슨! 돌아서면 또 쌓이는데….” 나보다 오래 사신 분들의 경험담과 조언이다.

 

그러던 참에 외국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마트에 들렀다가 고무장갑이 보여서 거금 2,000세파프랑(한화 4,000원)을 주고 샀다.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는데 반가운 망고비가 내린다. 집에 와서 고무장갑을 산 기념으로 굳이 안 해도 되는 빨래를 하려는데 이런! 고무장갑이 너무 작아서 손이 들어가지 않는다. 잠깐 고민을 하다 이미 뜯어버려 바꿀 수 없어서 평소 담소를 나누는 분에게 아내에게 주라며 건넸다. 그랬더니 그는 이게 뭐냐는 식으로 그리 반갑지 않게 받았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뭐 이런 걸 주느냐는 표정이다. 망고 40개 값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래도 망고비가 내린 오늘은 참 기쁜 날이다. 다음에 마트가면 꼭 큰 고무장갑을 사리라는 희망도 있다. 그런데 새삼 ‘그간 참 포시럽게 살았다.’는 생각이 밀려온다.

 

때묻은 순수함: 3월 5일

가끔 입는 흰 러닝셔츠를 조심스레 빤다. 혹시 누렇게 변하지 않을까 염려하며 이미 지난 세월만큼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기엔 아직 충분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사는 세월만큼 때 묻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데 처음처럼 희게 버티려는 오만함을 감출 수 없다. 함께 사는 선배 신부님은 그런 불편함을 잊기 위해 황토색으로 염색하는 재치를 발휘했다. 나는 분명히 인종으로 말하면 우랄알타이어계 황인종인데 여기 사람들은 나를 백인(vuru, munzu)이라 말한다. 마찬가지로 이들의 검은 피부도 자세히 보면 각자 고유함을 가진 사람 빛이 있는데 여태 그저 검게만 봐왔다. 어찌 보면 살아가는 만큼 사람은 멋 내며 살기에 익숙해진다. 차림의 어울림은 기본이고 넘치는 화려함으로 치장해낸다. 가진 재주를 맘껏 펼치지 못한 채 재포장해 계속 올라야 하며 사는 만큼 엉겨 붙는 생떼의 거룩함도 깔끔하게 밀어야 한다.

같게 다르게 살아온 어느 날, 검게만 보였던 이들의 낯빛이 제각각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책상과 침상에 내려앉은 황토 먼지들이 가까운 친구로 다가오며 적당한 땀내가 사람다움으로, 널브러진 세간들이 정겨워져 간다. 어설프고도 엉성한 주고받음이 편안한 사람살이가 된다. 인생살이의 순수함이란 그 생 처음의 깨끗함이 아니라 때묻은 옷을 툭 털어내는 익숙해진 일상의 몸짓으로 상처투성인 몸을 부대끼는 정으로 끌어안으며 예민한 장인의 눈에는 엉성하기 짝이 없을 그 불완전함이 치러낸 온갖 전투의 상흔으로 거룩한 어울림이 된다. 때묻은 순수함, 그 거룩함으로 오늘의 얼룩을 그저 기쁘게 받아 안아야겠다. 십자가의 길 제6처의 베로니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