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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신앙
언제나 내 곁을 지켜주시는 하느님!


글 이정숙 마리아 | 대구가톨릭대학교 학술정보지원팀장, 만촌1동성당

 외국인 유학생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르진 않다. 피부 색깔이 다를 뿐 20대 나이의 한국 학생들처럼 축구를 좋아하고, 노래를 좋아하고, 치킨, 피자, 김치를 좋아한다. 이런 유학생들에게 견디기 힘든 것이 고향에서 전해오는 슬픈 소식들이다.

2015년 8월 방학 중이던 어느 날 고향에 가있던 파키스탄 유학생이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전해왔다. 멀리 가 있는 터라 메시지로만 위로의 말을 전해줄 수밖에 없어 참으로 안타까웠다. 또 한 유학생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도 학기 중이라 당장 달려갈 수도 없이 엄청난 슬픔을 견디며 유학 생활을 계속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간간이 들려오는 말에, 얼마 전 유학생 누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엄마가 편찮으시다, 할머니가 위독하시다는 등의 말이 들려 올 때면 안쓰러운 마음에 만감이 교차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꿋꿋하게 잘 견뎌주기를 당부하고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 했던 적도 있었다.

2017년 1월 나는 사랑하는 엄마를 하느님 나라로 떠나보냈다. 하늘이 무너지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이 미어지고 아파 아직도 기도를 하거나 묵상을 할 때면 저절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린다. 나의 엄마를 보내고 나니 아버지를 잃고 그 자리를 지키지 못했던 유학생의 심정은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내가 그 상황에 처해보니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절실했을지, 더없이 미안하기만 했다.

 

유학생들은 멀리 고향을 떠나 타국에 와서 힘들고 지친 마음을 어떻게 이겨낼까? 평소에도 유학생들의 신앙생활과 성사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들에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만들어 주고 싶었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탈렌트를 끄집어내어 하느님 안에서 슬픔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다면 그 무게를 반으로 줄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가톨릭 신자인 유학생들에게는 주일을 꼭 지킬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고, 고해성사를 통하여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몸을 모실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 싶었다. 그런데 난관에 봉착했다. 주일미사를 지키지 않았는데도 미사를 드릴 때 성체를 모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 학생들을 불러 왜 그러는지 물어 보았다. 이유는 한국어에 능통하지 않다는 두려움 탓에 한국어로 고해성사를 본다는 것이 너무 힘들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고해성사는 보지 않았지만 미사를 드리고 성체를 모셨고, 이 힘든 유학생활이 끝이 나서 고향으로 돌아가면 제대로 잘 할 거라는 조건부 냉담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톨릭 신자 유학생들이 성당으로 발길을 옮길 수 있도록 주일미사를 잘 지키고 성사를 통해 신앙생활을 다독일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어찌 보면 스무 살이 넘은 학생들에게 마치 유치원이나 초등학생들을 다루는 것처럼 이상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높은 언어의 벽에 부딪친 이 학생들에게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닐까도 생각되었다. 그러던 중 한 번은 이 유학생들에게 고해성사를 보도록 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의를 했다. 한국어로 고해성사 보는 순서를 작성하여 그것을 보고 읽으면서 신부님께 성사를 볼 수 있도록 하였더니 세 명의 유학생이 용기를 내어 성사 후에 미사를 드리고 성체를 모셨다. 아마 그 학생들은 정말 후련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성체를 모실 수 있었음에, 또한 한국어로 고해성사를 볼 수 있었음에 가슴 뿌듯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또한 마음 속으로 많은 갈등을 했을 학생들에게도 부담 갖지 않고 성사를 볼 수 있도록 조금씩 용기를 불어 넣어줘야 할 숙제라고 생각했다. 요즘 우리 학교 성당에서는 더 많은 교내 유학생들의 발길이 성당으로 옮겨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마음처럼 쉽진 않지만 첫 술에 배가 부를 수 없듯이, 기다리는 마음으로 조금씩 다가간다면 그들도 언젠가는 자연스레 하느님의 집을 내 집처럼 드나들리라 기대한다.

   

오래 전 나는 냉담을 한 적이 있다. 누군가 옆에서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나의 핑계에 불과하겠지만 21년 전 세례를 받고 난 이후에 그저 동료 선생님들이 하는 대로 레지오 활동도 하고 견진성사도 받으면서 깊이 있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내가 해야 할 의무를 다한다는 생각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연스레 냉담을 하게 되었고, 힘든 일이 있을 때 더 붙들고 찾았어야 할 성모님과 하느님을 외면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마음 한쪽 구석은 늘 무언가 찝찝함을 안은 채로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아이가 고3이 되던 해부터 매달 한티순교성지를 찾아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고, 매주 주일미사에서 하느님과의 대화를 시작했다. 그때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한 것이 ‘주님! 제가 주님의 나라로 가는 그 날까지 매주 주일마다 주님을 뵈올 수 있는 시간을 꼭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주님께서는 내게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해주셨고 앞으로도 도와주실 거라 믿고 있다. 또한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엄마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을 해소할 길이 없는 나에게 매일 성모님께 9일 기도를 드리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하며, 나의 신앙생활을 풍성하게 할 수 있도록 채찍질하고 미지근하게 식어있던 내 신앙에 뜨거운 불을 지펴준 내 인생의 길잡이 첼리나에게 이 지면을 통해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이토록 내가 변화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게 찾아온 가슴 찢어지는 고통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 고통을 통하여 무미하게 생각했던 하느님의 옷자락을 간절히 찾게 되었고, 성모님께 눈물 흘리며 기도드리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기도의 종목은 늘어나고, 그 기도의 종목 중에 우리 학교 유학생들을 위한 기도 또한 빠지지 않는다. 작년 2월부터 부서 이동이 되어 국제 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은 종료됐다. 그리고 비록 그 자리를 떠났어도 그들을 위해 끊임없이 나는 기도를 청할 것이다. 늘 내가 힘들고 지쳐 있을 때 나를 일으켜 세우는 원동력이 되는 묵주기도를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모님께 바치리라.

 내게는 작은 꿈이 있다. 제2의 인생은 하고 싶었던 해외 봉사활동을 하며 그 누군가와 어려움을 나누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오늘도 더 열심히 에너지를 모으고, 나의 꿈으로 향한 여정이 지치지 않도록 성모님을 통하여 기도하고 청하며, 늘 내게 힘을 실어 주실 내 신앙의 삶과 기쁨의 영광을 하느님께 돌린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느님, 찬미합니다. 아멘.”

 

* 이정숙 님의 나의 삶, 나의 신앙이야기는 이번호로 끝맺습니다. 이정숙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