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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탈주민의 정착이야기
미향이의 정착이야기


글 장숙희 루시아 수녀 | 민족화해위원회,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대구관구

 

미향(가명)이는 30대 초반의 북한이탈주민이다. 하나원(북한이탈주민 정착 교육기관) 동기들은 대부분 서울, 경기 지역에 정착하였다. 미향이 역시 서울에 살고 싶어서 하나원에서 희망 거주지를 적을 때 1지망 서울, 2지망 인천, 3지망 대구라고 적었다. 대부분의 하나원 동기생들이 서울, 경기 지역을 신청해서 경쟁률이 높았는지 결국 미향이는 대구에 집을 배정받았다.

대구는 광역시로 큰 도시여서 서울과 비슷하리라고 막연히 품었던 생각은 배정된 집으로 가는 길에서 한참 빗나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집을 받아서 기쁜 감정보다는 여러 가지 걱정이 더 많아서 도와주는 분들이 ‘집이 생겨서 좋겠다.’라고 하시는 말씀이 마음에 닿지 않았다. 이곳 정서와 문화를 모르니 말은 통하지만 외국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미향이의 집은 대구 외곽의 임대아파트로 시내에 위치한 임대아파트보다는 비교적 새집이어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사실 말이 대구지 시내 중심가까지 버스와 지하철을 환승해서 타고 가면 지칠 만큼의 거리에 떨어져 있다. 거리의 문제는 시간의 문제인 동시에 교육과 취업 기회의 제한에 다름 아니어서 더욱 걱정이 되었다.

북한의 조 · 중 접경지역의 소도시에서 태어난 미향이는 10대에 ‘고난의 행군시기’를 맞이하였다. 당시에 굶주리게 된 가족의 식량을 마련하려고 중국으로 일자리를 찾아간 엄마는 미향이와 동생을 할머니께 맡겼다. 그 후 엄마와 연락이 끊겼고, 동네 언니들 몇몇은 중국으로 돈 벌러 간다고 하며 미향이에게 함께 가면 돈도 벌고, 엄마 소식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엄마가 그리웠고 동생 뒷바라지를 하고 싶었던 20대 초반의 미향이는 엄마를 찾으러 꽁꽁 언 두만강을 건넜다. 그렇게 중국에 간 미향이는 언니들과는 뿔뿔이 흩어졌지만 용케도 조선족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식당 일은 고되었고, 주방 일을 하면서 온갖 고생을 다하게 되었지만 엄마를 찾겠다는 희망으로 버텨냈다. 하지만 중국에서의 삶은 미향이 또한 탈북자일 뿐이어서 늘 불안하였고 신분을 숨겨야 했다. 중국 공안(경찰)은 탈북자를 찾으면 체포하여 북송했기에 엄마를 찾는 일 자체가 신분 노출의 위험에 처하는 상황이었다. 탈북민들이 주로 정착하는 그 넓은 동북 삼성(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에서 미향이 홀로 엄마 소식을 아는 이를 찾을 수는 없었다. 다행히도 식당 사장은 좋은 사람이었다. 미향이의 신분을 감추어 주어서 일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한족 출신 종업원들과 함께 일하며 중국말도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8년 정도 그곳에서 일하며 살던 미향이는 언제까지나 불안한 삶을 지속할 수 없었고 엄마를 찾지도 못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불안한 날이 계속되던 중 미향이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일이 생겼는데 그것은 조선족 손님들을 통해서 듣는 한국 소식이었다. 미향이를 잘 이해하고 도와주던 식당 사장은 미향이에게 한국행 길을 알려주었고, 엄마 또한 한국에 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해 주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당장 떠날 결심을 하였고, 그 날로 바로 짐을 싸서 한국행 길에 올랐다.

지금 직장에 다니고 있는 미향이는 여전히 엄마 소식을 모른다. 하지만 엄마를 만날 희망을 잃지 않았고 만남의 그날을 위해 열심히 적응하며 저축하고 있다. 엄마를 만나게 되는 날 지금보다 더 크고 좋은 집에서 함께 살고 싶은 꿈이 더하여졌기 때문이다. 미향이는 두만강을 건널 때 처음으로 알지도 못하는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그때 이후 그 하느님이 늘 자신을 지켜 주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 아직은 잘 알지 못하는 하느님이지만 그분께 감사드리며 살고 있다.

 

* 미향(가명)이는 사실에 기반한 인물이지만 특정인이 아니며, 독자들의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재구성한 허구의 인물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