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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의 현장에서
사람답게 더불어 살기
- 연대


글 도건창 세례자요한 | 카리타스복지교육센터 소장

 

“괜찮아요. 저 오빠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저래요!”

마을도서관 관장님의 편안한 태도와 열정이 담긴 목소리에 빠져 있다가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도서관이 지역 주민들 삶에 가져다 준 변화를 설명하던 참이었다. 도서관에서 사서 보조 봉사를 하는 청년이 가끔 풀쩍풀쩍 뛰며 소리를 지른다고 했다. 어느 날 손님이 그가 소리를 지르며 뛰고 있는데도 전혀 놀라지 않는 초등학생을 보았다. 그 손님 눈에는 소녀의 천연덕스러운 모습이 신기했던 것이다. “얘, 너는 오빠가 저렇게 하는데도 상관없어?” 그러자 소녀가 “괜찮아요. 저 오빠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저렇게 해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렇게 뜀뛰고 소리 지르며 물건을 던지든지 다른 사람을 밀치고 꼬집거나 깨무는 것은 자폐성 지적 손상이나 정신증으로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자주 보이는 행동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해 두려워하고 불안해한다. 그래서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 소녀는 다르게 행동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그 이유를 이 마을도서관을 마련하고 운영하는데 힘을 보태 온 장애·비장애 통합어린이집 원장이 한 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찾아보았다. “어릴 때부터 장애·비장애 구분없이 자라온 만큼 우리 아이들은 휠체어에 탄 친구를 불편해하지 않아요. 교사들이 절대 장애·비장애의 차이를 설명하지 않아요. 누군가 ‘장애인 친구들은 도움이 필요한 존재’란 인식을 심어주면 그때부터 아이들은 장애인 친구를 불편해하게 되거든요.”¹. 어려서부터 그런 사람을 자주 접하면서 함께 커 온 그 소녀에게 그 청년은 두렵거나 부담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조금 다른 사람일 뿐이었다.

 

“저희는 장애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는 마을을 꿈꿉니다.”

앞에서 말한 마을도서관과 장애·비장애 통합어린이집을 세우고 이끌어 온 사람들은 스물여섯 해 전 지역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 한 주택 지하에 장애아동 전담 어린이집을 열었다. 아동들과 지내면서 그 아이들이 자신이 가진 장애에도 불구하고 성인이 되어서도 살던 마을에서 더불어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싶어 장애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는 마을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했다. 마을 주민들과 만나고 어울리기 위해 어린이집 일과 후에 동네 아이를 위한 방과 후 학교를 했고, 매년 공동 어린이날 행사를 진행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장애가 있는 자녀를 둔 학부모들도 힘을 보탰다. 그들은 밑반찬을 만들어 마을 어르신들께 배달했다. 조금씩 통합어린이집의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이 생겨났고 해를 거듭할수록 더 많은 비장애 아동들이 그 어린이집을 찾고 있다. 함께 일하며 가까워진 학부모들은 협동조합을 만들어 자라나는 아이들이 안심하고 여가를 누릴 수 있는 마을도서관, 방과 후 학교, 청소년문화공간을 마련하고, 장애를 가진 청년들이 마을에서 일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카페, 유기농 농산물 매장 등을 직접 설립했다. 차츰차츰 더 많은 마을주민들이 장애를 가진 이를 더불어 사는 이웃으로 보게 되고 이해하는 폭도 커져 갔다. 장애를 가진 친구들과 함께 커온 아이들은 학교나 학원 선생님들에게 장애를 가진 친구도 “우리와 다른 게 없고 한 번 더 이야기하면 잘 이해한다.”고 알려준다고 했다.

 

사람답게 더불어 살기인 연대(連帶, soldarity)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반드시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타인을 만나고 관계 맺으면서 말도 배우고 어떻게 서로를 대해야 하는지 배우고, 각자 능력에 따라 다른 사람을 위한 자기 역할을 하는 것을 통해 인간다운 삶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고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체험한다. 그리고 가족, 또래, 이웃, 동료처럼 서로 도움으로써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아가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더 약한 사람들 처지를 함께 아파하면서 그들을 위해 개입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람답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을 ‘연대(連帶)’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경제적 성과와 쓸모를 중심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우리 사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한 연대의식을 가지지 않는다. 지적 손상으로 장애를 겪는 사람, 치매를 앓거나 거동이 힘든 사람,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 우리나라로 이주해 온 사람, 일자리가 없거나 가난해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여유가 없는 사람들을 마치 “사회 밖에 있는 사람들”, “쫓겨난 이들, ‘버려진’ 사람들”(『복음의 기쁨』 54항)로 대하지는 않는가? 물론 우리 사회도 모든 사람이 사회적 연대에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예를 들어 장애를 겪는 아동들과 그렇지 않은 아동의 통합교육을 권장하고, 연세 많으신 어르신들과 젊은 세대가 대화하는 자리를 마련하며,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 우리나라로 이주해 온 사람들과 이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들 사이에 만남을 장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노력은 특별한 전문가나 대단한 사랑을 가진 사람이나 하는 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연대의식은 자신이 가진 재산이 오직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 공기, 물, 땅, 그리고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하느님께서 그 선물을 나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주셨다고 인정하는 것을 전제한다.(참조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헌장』 69항, 『복음의 기쁨』 188항) 내 재산이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도록 쓰여야 한다. 그래서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사회가 더 큰 돈을 쓰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려고 했던 것을 돌려주는 정의를 실천하는 것임을 깨닫도록 요청한다.(참조 : 『복음의 기쁨』 189항) 그리스도인은 이 깨달음을 모든 일상에서 실천해야 한다. 미사 중에 고요하게 기도할 내 권리를 지적 손상을 입은 사람이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하느님 앞에 자기 뜻을 표현하는 것을 위해 양보하거나 누구에게든 진심으로 공손하게 인사하는 일상의 태도도 연대의식의 실천이다. 세금과 사회 보험료를 성실하게 납부하고 약한 사람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진 정당에게 투표하며 집값이 떨어져도 가난한 사람들과 이웃으로 사는 것을 선택하고 직접 후원하는 것 역시 훌륭한 연대의식의 표현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행동은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을 받아 누리는 세상을 이룩하겠다는 공동 비전”(『국제 카리타스 윤리강령』 중 연대)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가 더 사람답게 되고, 우리가 사는 사회가 더 사람다운 세상이 되도록 하는 길이라는 믿음에서 나온 실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