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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당 봉헌 100주년 기념 루르드문학미술제 문학부문 〈은상〉 신앙수기
포도주의 기적


글 김도하 사도요한|월성성당

 

 큰형이 어느 날 나에게 “인력으로 안 되는 일도 40일 동안 성체 조배를 하면 이루어 주신다.”고 했다. 형보다 성당활동을 더 많이 한 나였기에 ‘형이 된다는데 나라고 안 되겠나?’ 싶어 주님께 청해 보기로 했다. 기도 제목은 ‘배우자를 청하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신랑감으로 꽤나 당황스런 수준이었다. 군대를 전후로 다리를 다쳐 걷는 모양이 이상하다. 영어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경험부족으로 겨우 버티는 수준이라 경제적 조건도 별로 좋지 못했다. 그래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내 처지에 좀 어렵다 싶어서 30대 후반을 지나며 나이만 먹고 있던 상황이었다.

원래 나의 기도 지향 1순위는 다리가 튼튼해지는 것이었다. 전국의 유명하다는 곳은 나름 다 가 봐도 다리가 낫지 않아 최후의 수단으로 성모님께 매달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다리를 낫게 해 주세요.’ 하는 기도만으로도 바빴을 내가 황당할 수 있는 기도 지향을 떠올렸다. 일단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시작해 보기로 했 다.

처음 40일간 매일 빠짐없이 성체조배를 했는데도 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기로 다시 40일을 더 도전해 보기로 했다. 이번에는 첫 마음 같지 않아 매일 가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40회는 마쳤다. 그런데도 아무도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역시 난 안 되나 보군. 이 상황에 누굴 만날 수 있으랴.’ 싶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그래도….’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 아니면 그냥 습관이 되었는지 며칠씩 건너뛰면서도 성당에 찾아 갔다. 그러다가 성체조배를 얼마나 했는지 기억이 아련해지면서 어느덧 기도는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무 일 아닌 듯 큰 형수님이 자신의 대녀 동생 이라며 서울에서 영어강사를 한다는 글라라를 소개시켜 주셨다. 큰형수님의 대녀는 글라라의 언니였는데 두 분이 직장동료이면서 신앙적으로 잘 통해서 대모·대녀 사이가 되어 있었다. 처음엔 글라라가 우리 학원에서 일하려고 면접을 보자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우리 학원에서 일할 생각은 전혀 없고 본인의 고민상담차 나를 만난듯 했다. 글라라는 당시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올 생각이 많지 않았으며 신앙심 깊은 언니의 권유로 대구로 올까 말까 고민하던 중이었다고 했다. 서울에서 세례는 받았지만 가톨릭을 잘 알지 못하던 동생을 언니는 자기 옆에 두고 함께 신앙생활의 기쁨을 맛보길 바랐던 것 같았다. 아무튼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우여곡절 끝에 글라라는 대구로 내려왔고 떨떠름하게 ‘잠시’ 일할 목적으로 우리 학원에서 일을 시작했다.

글라라는 참 좋은 친구였다. 같이 지내다보니 생각이 꽤나 선하고 밝고 예쁘고 똑똑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도 많아서 소심한 성격의 내가 보기에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보다 일곱 살이나 어렸다. 모든 면에서 같이 어울리기에는 여간 어색한 게 아니었다. 그러다 용기를 내서 마음을 밝혀보았는데 다행히 아주 싫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 내가 글라라와의 교제에 성공한 걸 보면 이게 다 성모님께서 도와주신 것임을 느낄

수 있다. 일에 치여 운동도, 치료도 안 하던 나의 다리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걷기만 해도 다리가 아프고 힘든 상황이었다. 모든 것을 다 접고 치료만 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내가 건강했더라면 일도 열심히 하고 글라라에게 더 잘 해 줄 수 있었을 텐데 나의 욕심으로 괜히 글라라를 나의 삶 속에 끌어 들였나 하는 무수한 자책과 미안함이 마음속에 올라왔다.

어느덧 만난 지 2년이 지나면서 결혼도 생각해야 할 무렵이었지만 약한 다리로는 그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학원 일을 대폭 축소하고 선생님들에게 일을 모두 맡기고 대구를 떠나 타지에서 치료와 운동을 시작했다. 치료를 한다고 완전히 나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는 막막한 길을 나서야 했다. 그 무렵에 글라라를 놓아 주어야 하나 진지한 기도를 했다. 가장 어려운 순간에 어머님을 뵈러 가면 어머님께서는 ‘기도 하여라!’고 하셨다. 좌절의 순간에도 ‘두려워 말라.’고 하셨다. 지금은 좌절하고 앞이 안 보이지만 무언가 기도의 끈으로 주님께서 나를 묶어주셔서 어리석은 생각에서 구해 주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무렵 54일간 기도를 시작했다. 지향은 단순했다. ‘글라라와 결혼하게 해 주세요.’ 남들이 다 하는 결혼이지만 내가 한다면 기적이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그 지향으로 묵주기도를 매일 5단씩 이어갔다. 묵주기도를 이어간 지 1년이 지나면서 내 발의 통증이 줄어들고 조금씩 조금씩 발목에 힘이 붙기 시작했다. 오랜 인내 끝에 약간의 희망을 본 우리는 ‘결혼’이란 걸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 둘은 가족과 부모님을 설득하기가 너무 두렵고 힘들게 느껴졌다. 항상 우리를 도와주었던 신앙심 깊고 천사 같은 언니가 이번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신랑 될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부모님을 설득해 주었고 다른 가족들에게도 좋게 말해 주었다. 그렇게 떨리는 마음으로 글라라의 부모님을 만났고, 부모님은 나의 걸음걸이를 보시고 그날 이후 밤잠을 설치셨다는 후문이 들렸다. 그러나 결국 부모님께서는 나를 이해해 주셨고 나중에는 따뜻하게 품어주셨다. 귀한 딸을 시집보내는 입장이라면 허락하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 장인, 장모님께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다.

나는 도쿄에서 2년간 회사생활을 한 적이 있었는데 도쿄 한인성당에는 루르드의 성모동산이 있었다. 그 앞에서 기도도 하고 낮잠도 잔 기억이 많다. 대구로 돌아와 우리집이 이사를 하면서 월배성당에 가게 되었는데 거기에도 루르드의 성모동굴이 있었다. 결혼 전에 글라라를 따라 월성성당에 갔는데 거기에도 루르드의 성모동굴이 있어서 성모님께 기도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내가 다닌 세 곳의 본당에는 모두 루르드의 성모동굴이 있었다. 어려운 순간 성모님께 기도하면서 나는 ‘10년이 넘도록 루르드 성모동굴이 있는 성전에서 어머님을 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프랑스 루르드의 성모동굴에 가서 성모님을 뵐 순 없을까요?’ 하는 생각이 계속 마음속에서 올라왔다.

 

불가능하게 여겨지던 일들이 하나둘씩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혼배성사 날짜를 잡았고 신혼여행으로 루르드 성지순례팀에 합류하기로 했다. 나는 사실 글라라를 만나기 오래 전부터 내 혼인성사 날에 주님께 청할 것을 미리 정해 놓고 있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무엇을 못해 주시랴? 나는 아버지께 가능한 한 최고의 선물을 청하고 싶었다. 그런데 선물 중 최고의 선물은 단연 사람 선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결혼이란 것도 서로에게 사람을 선물로 받기에 큰 잔치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하느님 아버지께 최고의 선물로 예수님께서 이 자리에 함께해주시기를 감히 청해 보기로 했다. 주님께서 이 자리에 직접 함께하신다는 징표로 카나의 혼인 잔치처럼 물로써 포도주를 변하게 하신 기적을 베풀어 달라고 청하기로 했다. 글라라에게 이런 얘길 하면서 피로연 때 포도주를 준비하기 위해 포도주를 좀 알아보자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글라라가 “우리 엄마가 포도주를 담가 놓으셨어.” 하는 것이 아닌가! 사실 장인·장모님은 상주에서 포도 농사를 지으시기에 포도주는 항상 넉넉히 준비해 놓고 계셨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오래전부터 청하려 했던 포도주가 이미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포도주의 기적이 내 앞에 일어난 것이다!

글라라와 나는 평소 존경하던 파스카 청년성서모임 구 다미아노 담당신부님과 친척되는 장 라이문도 신부님을 주례로 모시고 주님 전에서 혼배성사를 올릴 수 있었다. 다미아노 신부님의 편안하고 따뜻한 분위기의 주례로 우리는 부부가 되었고 하객들에게 나의 ‘포도주의 기적’에 대해 말씀드렸다. “주님께서 가장 아끼신 과일은 단연 포도입니다. 주님께서 항상 포도나무, 포도주를 강조 하셨잖아요. 오늘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징표로 포도주의 기적을 장모님을 통하여 일으켜 주셨습니다. 제가 얼마나 축복받은 사람인지 아시나요? 저는 포도농장 주인어른의 사위입니다.” 좌중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나의 포도주 선전 이후 식당에 준비된 포도주가 모두 동이 나 버렸다. 게다가 누군가는 맛있다고 포도주 병을 옷에 숨겨서 식당을 빠져나갔다고 했다.

‘결혼하게 해 주세요.’라는 지향의 묵주기도를 이어 간 지 정확히 2년이 된 바로 그 달에 우리는 신혼여행으로 루르드의 성모님을 뵙고 묵주기도 행진을 하고 기적수에 침례했다. 결혼도 했고 루르드 땅도 밟으며 기도가 실현된 현실 앞에 정말 감격했다. 성녀 벨라뎃다와 함께하신 루르드의 성모님을 직접 뵙는 은혜는 놀라웠다. 또한 함께한 신자 일행 분들 모두 신혼부부가 왔다고 특별대우를 해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루르드에서는 밤마다 묵주를 들고 수많은 군중이 행진하며 기도하고, 세계 각국의 언어로 성모송을 바친다. 한국인이 꽤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밤 내가 한국 대표로 뽑혔다. 성모송 전반부를 두 번 읽는 것이었는데 수천 명 앞에서 기도를 드리게 된 나에게 글라라가 “축복받았네.”라고 했다.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다.

생각이 많이 어리석고 급했고, 그러한 생각이 나를 더 육체적으로 아프게 만들었고 삶의 여러 영역에서 벽에 부딪히게 했다. 그러나 희미하고 어렵게 보이는 것들에 대해 기도를 시작했고, 어머님은 나를 잡아주시고 이끌어 주셨다. 마침내 기도가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미처 생각지도 못한 커다란 은총을 맛보게 해 주셨다. 나의 삶을 이끄신 어머니께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루르드의 성모님과 함께 걷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