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사회복지의 현장에서
참 인간답게 우리 몫을 다하는 책무성(Stewardship and Accountability)


글 도건창 세례자요한 | 꽃동네대학교 카리타스학 교수

 

사회적 책무성, 그 당연하고도 지키기 쉽지 않은 원칙!

몇 주 전 여러 교구 사회복지국 교육담당 실무자들이 3년 동안 같이 공부하며 마련한 교재를 가지고 공동으로 카리타스 기초교육을 했다. 그 교육에 참석한 한 동료가 “우리는 사회가 우리에게 맡긴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쓰는 돈이나 일하는 데에 필요한 권한도 사회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는 것처럼 행세한다면, 우리는 도둑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그 동료는 사회복지 일을 하는 사람이 마치 개인적 선행을 하는 양 도움을 받는 사람에게 베푸는 태도를 지녀서는 안 되며, 사회에 책무를 지고 있음을 잊지 말자는 취지에서 이 말을 했다.

그의 말을 들으며 이번 가을 국정감사에서 큰 이슈가 되었던 한 문제를 떠올렸다. 한 국회의원이 사립 유치원이 지난해 감사를 받고 지적된 내용을 공개했다. 그 기간에 감사를 받은 유치원은 전체 6,153개 유치원 가운데 34.45%인 2,058개 유치원이었는데, 거의 대부분인 1,878개 유치원이 법 규정이 요구하는 것을 채우지 못하거나 위반해 지적받았다. 대부분은 회계나 행정 상 서류미비나 예산의 부적정한 사용으로 시정, 주의 혹은 경고 등 가벼운 행정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유치원 체크카드로 명품가방을 사고, 숙박업소와 노래방 이용료 등으로 사용하는 등 사회통념을 넘어서는 행동을 한 유치원 관계자도 있었다. 학부모를 비롯해 시민은 일부 사립유치원의 잘못에 분노했다. 그들이 분노한 이유는 유아교육법에 따라 공적 과업을 수행하고, 그 과업을 위해 지원금을 받는 유치원 가운데 일부에서 지원금을 마치 개인 돈인 것처럼 사용했기 때문이다. 또 사립 유치원 운영자나 설립자 측에서는 유아교육기관 재무회계에 관한 규칙이 사유재산의 자유로운 사용권을 지나치게 제한한다고 반발하며, 사립 유치원의 특수한 상황에 맞는 재무회계규칙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왜냐하면, 사립유치원 대부분은 설립자가 수십억 원에 달하는 개인 재산을 써서 만든 것인데, 공적인 과업을 수행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재산이 마치 사회 전체의 재산인 것처럼 규제하는 것은 사유재산권을 부정하는 일이라 본 것이다. 양측 모두 일리가 있는 분노를 터뜨렸고, 항변했다. 공적 재원을 사용하는 조직이 사회에 책무를 지는 것은 당연하며 법률에서도 구체적으로 요구하고 있지만 언제나 잘 지켜지는 것은 아니며, 그에 관한 견해도 서로 달라 다툴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 가톨릭 조직은 책무성을 지니고 있는가?

 책무성은 청지기다운 관리(Stewardship)와 책무성(Accountability)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먼저 청지기다운 충실성(Stewardship)은 자기 일이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에게 맡긴 일을 하고 있기에 직책이나 과업을 받은 쪽은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로서 그 일을 해야 한다. 그는 개인이나 내부 판단에 따라 일해서는 안 되고, 자신에게 맡겨진 과업의 수혜자와 그 일을 맡기고 필요한 재원을 후원하거나 지원한 시민, 사회, 교회 그리고 국가가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에 따라 일해야 한다. 다음으로 책무성(Accountability)은 넓은 의미의 책무성과 좁은 의미의 책무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넓은 의미의 책무성은 책무를 맡긴 쪽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도덕적 의식과 태도를 의미한다. 그런 뜻에서 가톨릭 사회복지를 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과 교회의 가르침 그리고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 존엄성과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헌신하겠다는 의식과 태도를 갖추라는 요구를 받는다. 좁은 의미의 책무성은 책무를 맡긴 측의 요구에 책무를 이행하는 쪽이 제대로 응답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출 것을 요청한다. 이 응답 역량은 맡겨진 책무에 관한 책임의식과 의무감, 책무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역량 그리고 책무를 수행하는 과정과 성과의 투명한 보고 및 설명을 포함하고 있다. 가톨릭 사회복지 시설·기관은 물론이고 본당 사회복지위원회나 자원봉사단체도 대부분 외부에서 보조금이나 지원금을 받거나 후원을 받아 활동한다. 그 때문에 사회적 책무성을 지니고 있다. 좁은 의미의 책무성은 대개 관련 법규나 각 조직의 정관, 회칙에 이미 규정되어 있으니 충실히 지키면 된다. 다만 지난 호에서 다룬 독립성(Independence) 원칙을 고려하며 사회의 요구에 따르면 된다. 그래서 가톨릭 사회복지 조직에서는 넓은 의미에서 책무성에 관해 더 깊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그 고민은 우리 모두의 모델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믿는다.

 

 아기 예수께서 당신을 온전히 내맡겨 주시는 턱없는 신뢰가 일 깨워주는 책무성

성탄전례는 구유 경배로 시작한다. 신부님께서 아기 예수님을 두 손에 조심스레 받쳐 들고 불 꺼진 성당으로 모셔 온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은 당신 발로 걸어오지 않으시고 사람 손에 들려 우리에게 오신다. 강보로 감싸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숨이 떨어질 듯 우는 아기, 잠시 눈을 떼면 무슨 탈이 날지 모르는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다. 그래서 울컥한다. 도대체 무엇을 믿고 당신은 그리 하십니까? 당신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셔도 당신을 따라 살기보다 내 몸 편한 대로, 세상이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살고 있는 저를 어떻게 믿고 당신을 온전히 우리 손에 내맡기십니까? 어떻게 이런 사람 손에 자신을 맡기고 그리 편히 주무시고 계십니까? 이렇듯 약한 아기 예수께서는 사람이 본래 하느님을 온전히 떠맡을 수 있을 만큼 고귀한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 주신다. 이 메시지에 담긴 인간을 향한 한없는 신뢰가 신비롭고, 그 신비로운 신뢰의 무게가 우리 스스로를 새로 보게 만든다. 같은 예수님께서 최후심판에 관해 가르치시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말씀하셨다. 아기 예수께서 보여주신 무한한 신뢰를 떠올린다면, 이 말씀은 심판기준의 선포만이 아닐 것 같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신뢰와 기대에 관한 일깨움이 더 어울릴 것 같다. 그 말씀은 진정한 인간다움이 지닌 가치와 의미를 일깨우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 관점에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2013년 9월 로마시내에 있는 난민촌인 아스탈리 센터에서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섬기고, 동반하고, 보호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가난한 이들이 바로 우리 주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따라서 가난한 이들은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하는(accountable) 우리의 주인과 같습니다.”라고 연설한 의미를 다시 곱씹어 보게 된다. 전문가로서든, 자원봉사자로서든 가톨릭 신자로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기 예수님의 이 신뢰를 통해 인간다운 삶을 위한 이웃사랑의 책무를 받는다. 얼마나 황홀하고 감사해야 할 책무이며, 얼마나 무거운 책무인가? 우리 일을 후원하거나 함께 삶을 나누어 봉사하는 이웃들, 공적자금을 지원하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부과하는 책무는 이 기본책무의 바탕 위에 있다. 돌아보면 나는 드물지 않게 책무를 게을리하거나 제대로 하지 못해서 꾸중을 듣거나 비판을 받았다. 낯부끄럽고 죄송할 때도 있었다. 스스로에게 화가 나고 밉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아기 예수께서 몸으로 일깨워주신 인간다움에 담긴 고귀함을, 그 고귀한 가능성이 요구하는 이웃사랑의 기쁘고도 무거운 책무를 포기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다시 일어나고 싶다. 다음에는 더 깊이, 더 제대로 이 책무를 질 수 있기 위해서.

 

* 사회복지의 현장에서는 이번호로 끝맺습니다. 그동안 연재해주신 도건창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