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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골목 신앙
몸이 먼저 움직이게 하는 사람


글 이재근 레오 신부 |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소중한 존재 앞에서는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인다!”

 

누군가 나에게 어디 사람이냐고 물으면 난 항상 “고향은 안동이고 서울에서 살았습니다.”라고 자신있게 대답한다. 내 말에 거짓은 없다. 내 인생을 통틀어 3년 동안 서울에서 살았지만 어쨌든 서울에서 살았던 건 사실이니까. 그리고 나머지 40년의 인생을 대구에서 살았다.

내 인생에서 3년을 함께해 준 서울에 살았을 때의 일이다. 그때 나는 아홉 살이었고 지금처럼 더운 여름이었다. 그 당시에는 에어컨이 없었기 때문에 선풍기가 유일한 희망이었다. 더울 때도 선풍기! 시원할 때도 선풍기! 항상 선풍기와 함께 있으면 나는 무적이었다.

사건이 벌어진 것은 어느 날 저녁이었다. 부모님이 잠시 외출하시게 되었다. 나가시면서 나에게 당부했던 한 가지는 “절대 선풍기 틀어놓고 잠들지 마라!”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밀폐된 방 안에서 선풍기를 틀어놓고 자면 죽는다는 이야기가 정설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오히려 정설이다. 어쨌든 그때는 우리 모두가 알듯이 선풍기를 틀어놓고 자면 죽는다. 그래서 혹시나 내가 그런 엄청난 실수를 할까봐 부모님께서는 한번 더 당부하셨던 것이다. 내가 선풍기를 사랑하는 것은 맞지만 내 목숨보다 사랑하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한 말씀을 하신다고 공연히 부모님께 짜증을 냈다.

부모님이 외출하신 후 나는 가장 먼저 동생을 거실로 옮겼다. 그때 동생은 여섯 살이었는데 혹시 선풍기가 있는 방에 같이 있다가 둘다 죽으면 부모님이 두 배로 슬프실 테니까 동생을 선풍기가 없는 거실로 옮겨서 자도록 했던 것이다. 동생은 죽더라도 시원한 선풍기 밑에 있고 싶다했지만 나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밤이 되었다. 거실에 있던 동생은 더위에 지쳐 잠들어 있었다.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부모님이 돌아오길 기다리던 나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때 문득 선풍기를 틀어놓고 자면 안 된다는 부모님 말씀이 떠올랐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선풍기의 타이머를 맞췄다. 문제는 내가 돌린 것이 타이머가 아니라 풍량 버튼이었다.(그때는 버튼이 아니라 다이얼로 타이머와 풍량을 조절했다.) 그렇게 나는 잠이 들었고 잠시 뒤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깨어났다. 아버지셨다.

다음날 아침, 어머니께서는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주셨다. 부모님이 돌아와서 초인종을 눌렀는데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아버지는 문이 부서져라 두드리셨고 어머니는 계속 초인종을 눌렀다. 나중에는 쉬고 있는 옆집에 부탁을 해서 우리집에 전화를 했지만 계속 전화벨만 울렸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동생과 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부모님은 그 순간 동생과 내가 선풍기를 틀어놓고 잠들어서 무슨 일이 생긴 거라 생각하셨다고 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못 일어날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옆집 베란다 창문 밖으로 나가서 우리집 베란다로 건너가려 하셨다. 문제는 우리집 베란다창문이었다. 창문이 잠겨져 있다면 우리집으로 발을 디디는 순간 밑으로 추락하게 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우리 집은 아파트 6층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우리집 베란다 창문으로 발을 옮기셨고 다행히 창문이 열린 덕분에 무사히 집 안으로 들어오실 수 있었다. 그러고는 선풍기 바람을 쐬며 잠들어 있는 나를 흔들어 깨우셨던 것이다.

 

지금도 그 당시를 떠올리면 아버지께 죄송하고 고맙다. 만약 그때 아버지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더라면 나는 한평생을 후회 속에 살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선풍기를 틀어놓고 자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에는 더욱 더 한이 맺혔을 것이다. 다행히 아버지는 지금도 내 곁에서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신다.

 

“소중한 존재 앞에서는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인다.”

 

우리는 행동하기 전에 먼저 생각한다.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서 판단한 후 최선의 행동을 한다. 그리고 이것이 올바른 것임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생각을 하기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면 ‘성급하다.’, ‘판단력 부족이다.’, ‘신중하지 못하다.’는 말을 듣게 된다. 하지만 이 모든 원칙이 깨지는 순간도 있다. 바로 소중한 존재 앞에서다. 특히 소중한 사람이 위험에 빠져 있다면 무조건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인다. 그냥 그 사람밖에 안 보인다.

 

지금 여러분 곁에도 생각보다 몸을 먼저 움직이게 하는 소중한 사람이 있다. 바로 가족! 늘 붙어 있기에 자주 싸우고 소중함을 잊기도 하며 상처 되는 말을 주고받기도 하지만 그들이 위험에 처한다면 몸이 먼저 움직일 것이다.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항상 내 곁에 있어 가족의 소중함을 잠시 잊고 있는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다. 이것은 나 자신에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족은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임을 기억하자. 가족 안에서 행복하지 못한 사람은 그 어디에서도 행복할 수 없음을 기억하자.”

이번 한 달, 여러분 모두가 가족과 함께 멋지고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만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