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오늘 우리의 생태 영성 살이
세례와 물과 하느님 자녀로 사는 충만


글 황종열 레오|평신도 생태영성학자

 

〈빛〉 잡지 독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우리 가운데 오신 아기 예수님과 함께 임인년(王貢年) 검은 호랑이의 해를 맞았습니다. 호랑이처럼 하느님의 자녀로 두려움 없이 아기 예수님의 고운 숨을 아름답게 함께 나누는 충만한 새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임인년 첫 나눔인데요, 새해를 맞아서 새로운 마음으로 새 생명의 은총인 ‘세례’를 작년에 살펴 본 여덟 가지 자연물 가운데 물, 주님의 지수광풍(地水光風) 가운데 수(水), 물과 연결하여 성찰한 것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께 받은 축복이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살면서 그분의 살림에서 멀어졌던 날들에서 돌아서서 하느님의 자녀로 살 것을 선택하여, 그분의 이끄심에 자신을 맡기고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서 새롭게 살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서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명시적으로 알고 사는 것은 참으로 그리스도인의 축복 중의 축복이고 모든 축복의 원축복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알고 ‘아버지’의 아들과 딸로 살게 됩니다.

2018년에 저는 브라질의 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가 쓴 『Ecologia(생태학)』라는 책을 번역하여 『생태 공명-지구의 울부짖음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라는 제목으로 대전가톨릭대학교출판부에서 출판을 했습니다. 이 책을 낼 때 디자인을 맡아 주신 분이 〈빛〉잡지에 사진 명상을 연재 하시는 양병주 베네딕토 작가십니다. 양 선생님은 이 책의 표지로 사용할 사진 자료를 여러 장 보내주셔서 제가 선택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아래 사진이 양 선생님과 상의하면서 최종적으로 고른 작품입니다.

바다처럼 넓게 펼쳐진 이 강은 섬진강인데요, 양 선생님은 직접 섬진강 물 안으로 들어가셔서 이 사진을 찍으셨습니다. 이 사진은 양 선생님이 섬진강과 하나가 된 상태에서 찍으신 것이지요. 하늘과 땅의 공명, 산과 강의 공명, 하늘과 땅과 물과 사람의 공명, 하느님의 하나의 집 지구에서 자연과 사람들이 함께 이루어 가는 공명을 기원하면서 출판을 준비하고 있을 때여서 더욱더 이 사진에 담긴 천지 산하, 그리고 보이지 않는 사람과 바위들의 어우러짐에서 참으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마르 1, 9) 요한은 이곳에서 예수님한테만 아니라 군중에게도 세례를 주었습니다.(마르 1, 4-5) 마르코 복음서의 저자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나서 “물에서 올라오”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강물 쪽으로 ‘내려가셔서’ 요르단강 물에 몸을 담그신 형태로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이 세례의 물을 통해서 하느님이 창조하신 물과 하나가 되시고 그 물을 먹고 마시며 몸을 닦는 모든 사람들과 하나가 되신 것입니다.

이 세례 사건을 모든 생태의 원생태인 ‘하느님 생태’에서 비롯되는 자연 생태, 인간 생태, 사회 생태의 관점에서 보자면, 여기서 물은 자연 생태에 속합니다. 세례는 종교 문화 의식이니 사회 생태 현상입니다. 여기에 참여하는 주체는 요한과 예수님과 군중이니, 이들의 존재가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고유하게 인간 생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창조된 물(창세기 1장 6절 이하), 그리하여 하느님의 생명을 간직하고 있는 물이(이사야서 55장 10절 참조) 세례를 통해서 이들이 하느님의 존재로 새롭게 태어나는 사건을 매개합니다. 이와 동시에 이 물은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과도 모두가 건강하게 함께 사는 데 필요한 중요한 원천입니다. 이런 면에서 물은 좁은 의미의 종교 범위를 넘는 하느님의 생태에 보다 더 근원적으로 닿아 있는 실재입니다.

요르단강이라고 하는 자연생태는 단순히 자연 생태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요르단강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의 인간 생태와 사회 생태와 분리 불가능한 형태로 결합되어서 이들의 존재에 영향을 미칩니다. 하느님 생태가 원래 통합적이어서 이 세 생태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통합되어 있기 때문인데요, 자연 생태에 속한 물이라는 존재가 인간 존재와 사회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례 사건은 하느님의 생태적 자비 안에서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이 같은 사실을 통합적으로 계시합니다.

요즘은 일반적으로 성당에서 이마에 물을 받는 형태로 세례를 받습니다. 이를 통해서 역시 세례를 받는 사람이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새 생명으로 탄생하는 것을 성사적으로 온전히 실현시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에도 강물에 잠겼다가 나오는 방식으로 세례를 받는다면, 대구대교구 신앙 공동체 여러분이 오늘의 낙동강에서 세례를 받을 수 있을까 물음을 던져 봅니다.

4대강 사업 때 이명박 전 대통령과 이 사업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낙동강에 ‘보’라면서 댐들을 세웠습니다. ‘댐’을 ‘댐’이라고 하면 시민들이 반대할 것을 우려해서 ‘보’라고 해서 시민들을 안심시키기로 한 것인데요, 이렇게 ‘보’라는 이름의 댐들을 건설한 후에 녹조가 심해지면서 낙동강 강물에 하늘이 비추어지는 것을 볼 수 없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그런 속에서 하느님께서 제 종류대로 있게 하신(창세기 1장 11-12. 21. 24-25절) 식물들과 동물 종들이 급격하게 줄어들었습니다.

우리는 이 낙동강에서 더 이상 물의 신선함을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보’라는 이름의 댐들을 부분적으로 개방하면서 상황이 좋아지고 있지만, 그래도 이 강물에 들어가서 예전처럼 멱을 감기도 어렵습니다. 빨래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씻을 수 있는 강물에 들어가셔서 세례를 받으셨는데, 물이 오염되어 썩은 물이 느릿느릿 흐르고 있는 상황에서 이 물로 우리의 잘못을 씻고 새 자녀,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생각하기가 쉽지 않겠지요. 우리 신앙 공동체가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지금도 강에서 세례를 받는다면, 낙동강이 우리 사회의 문명과 탐욕의 때로 이렇게 썩어서 흐려지게 하지는 않았을 것같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낙동강이 녹조로 오염되는 일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연에 대한 우리의 지배의식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우리가 자연과 맺는 폭력적인 관계와 상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위의 사실은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의식과 자연과 관계를 맺는 형태가 단순히 자연에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질에도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확인시켜 줍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자연을 인식하고 관계를 맺는 방식은 다시 우리가 신앙생활과 성사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방식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사실에 대해서는 둔감한 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요르단강과 우리의 낙동강 상태는 우리의 성사생활이 우리가 관계를 맺어 온 강물의 실제 상태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실제로 우리가 세례성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실천하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강물과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물을, 결국은 우리 각 사람과 우리 사회 전체의 생명의 질을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게 지켜 갈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물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물을 보면 일반적으로 편안하고 기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물은 우리 밖에도 있습니다. 작년 여덟 가지 자연물과 연결하여 살펴 본 내용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물을 보면서 때로는 불안해지고 무서워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물 안에 있을 수는 있어도 물 밖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참으로 물은 우리 밖에, 우리를 떠나서, 우리 없이도 있을 수 있어도, 우리는 물 밖에 있을 수 없고, 물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으며, 물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물이 우리보다 먼저 하느님께 창조되어 물이 우리의 밖과 안에서 우리를 살게 할 원천으로 작용하도록 그분께서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을 보호하기 이전에 우리를 살리고 우리의 몸이 되어 주는 물에 감사하면서 물과 함께 살 줄 아는 법을 배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함부로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로 “나를 물로 보지마라.” 하고 말하고는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물에서 와서 물을 통해서 사는 한 우리는 물이라고 겸손하게 말할 수 있고, 오히려 물처럼 그렇게 자기를 내어주면서 자기를 고집 하지 않고 유연하게 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세례 때 받은 세례수와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물과 우리가 사용하는 물을 대주는 낙동강 물을 하느님의 살림 안에서 하나로 보고 살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물과 함께, 그리고 물을 먹고 사는 모든 생명들과 함께 서로 상생하는 관계를 이루어 가는 축복을 그려 봅니다. 가정에서 그리고 성당에서, 동네에서, 일터에서 가족들과 교우들과 이웃들과 동료들과 더불어 물과 우리의 생명의 질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함께 나누어 보고, 우리 주변에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교육 프로그램들이 있는지 찾아보고 이야기를 나누어 보시면 어떨까요? 그리고 이런 깨달음을 우리의 일상에서 같이 실천하는 방법을 여러분의 관점에서 창조적으로 찾아내서 함께 공유하는 깊은 축복을 충만하게 체험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작년에는 ‘하늘, 연못, 불, 천둥, 바람, 물, 산, 땅’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올해 2022년 임인년에는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뇌의 작용에 관해서 함께 성찰하는 기회를 갖고자 합니다. 작년 첫 나눔 때처럼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뇌의 기관과 작용 가운데서 ‘뇌신경 세포, 전두엽, 해마, 편도체, 시냅스, 뇌신경 수용체, 거울 뉴런, 파페츠 회로, 사회적 뇌, 브로드만 뇌지도’ 중에 한가지 또는 원하시는 만큼 선택하셔서 먼저 그림을 그려 보시고 선택하신 것을 신앙생활과 연결하여 성찰하신 후 내용을 그림과 함께 〈빛〉잡지 편집부나 제 손전화(010-8479- 4869) 또는 메일 jongcah@hanmail.net로 보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떤 응답을 하실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빛〉잡지 독자 여러분! 다음달에 기쁘게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