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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영감을 주는 작품
삼위일체의 사랑


글 김심화 아눈시앗따 수녀|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대구관구

 

몇 년 전 어느 노(老) 신부님으로부터 에기노 작가의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 그림을 성탄 선물로 받았다. 칠보 기법으로 작업한 것을 선호하지 않았으나 십자가 대신 걸어두고 본 것이 에기노 작가에 대한 선입견을 존경과 사랑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사순 시기 십자가의 의미를 더 깊이 알아듣기 위하여 에기노 작가와 그의 작품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를 만나보고자 한다.

에기노 귄터 바이너트(1920~2012)는 1920년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나 공무원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예술 작품과 유명한 화가들을 가까이서 만날 수 있었다. 14세 때 선교사 화가가 되고 싶어 성 베네딕도회 뭔스터 슈바르자흐 수도원에 입회했다. 18세 때 ‘에기노(Egino)’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과 교회 미술, 조각, 금세공을 배웠다. 1941년 ‘히틀러 만세’라는 뜻을 가진 ‘하일 히틀러’ 경례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감옥에 가면서도 드로잉 북을 들고 간 것을 보면 그림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해군에 징집되었으나 살아남아 수도원으로 돌아온 그는 부모님 집을 방문했다가 러시아군이 두고 간 폭발물로 오른손을 잃었다. 그러나 절망하지 않고 하느님께 의탁하며 왼손으로 작업할 수 있는 기술을 익히고 연구하게 된다. 1949년 종신서원을 기다렸으나 현대 미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수도원은 그를 제외시켰다. 이후 수도원에서 나온 그는 거리에서 구걸로 연명하며 방황했지만 신앙의 힘으로 가야 할 길을 찾았다.

1951년 결혼하여 네 자녀의 아버지가 되고, 1956년 쾰른 대성당 옆에 두 번째 스튜디오를 열어 대학에서 배운 이론과 13년간 수도 생활의 체험을 영감으로 금세공, 조각, 회화 등의 작품을 하게 된다. 특히 그는 중세 오토 시대 미술을 연상시키는 선구성으로 평온하고 단순한 표현을 추구했다. 또한 청과 홍의 배합에 금선으로 조화를 이루는 칠보 기법을 접목하여 현대 성 미술 분야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그는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고, 그의 부인은 지금도 그곳에서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 때부터 교황청 전례 용품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가 만든 십자가의 길은 바티칸 박물관에 들어간 최초의 현대 성 미술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90세가 넘는 나이에도 작업을 놓지 않는 열정을 보였다. 그 모든 작품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질문하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그분은 나에게 선물을 주는 분이시고, 나는 그것을 쓰고 기록할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며 힘을 얻었고, 한평생 베네딕도 수도자의 소명을 자신의 예술로 실현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그의 삶은 마치 예술이라는 종교에 귀의한 사제처럼 느껴진다. 이제 에기노는 세계적인 대가가 되었으며 사람들은 그를 인간 승리자로 존경하고 있다. 2007년 에기노 재단이 설립되어 작품을 보존하고 있다.

삼위일체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요한복음 3장 16절이 생각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성자 뒤편 옥좌에 앉아 양팔을 잡고 계신 붉은 옷을 입은 성부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주위 사람들의 ‘지위 고하(地位高下)’에 상관없이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외아들을 온전히 내어 주신 성부께서는 성령과 함께 아들의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 안은 듯, 그의 옷은 붉게 표현되었다. 예수님은 끔찍한 고통 속에 죽어가는 모습이라기보다 당신을 성부께 온전히 의탁하는 모습으로 조건 없는 사랑을 모두에게 활짝 열어 쏟아주시며, 삼위일체 사랑의 공동체로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다. 이 그림은 마치 우리가 고통 속에 있을 때 하느님께서 우리 뒤편에 함께해 주실 것이라는 강한 사랑의 메시지를 주며 큰 위로와 감동으로 다가온다. 사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 모두 십자가를 통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좀 더 깊이 알아들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

* 가실성당에서 에기노 작가의 스테인드글라스와 칠보 작품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