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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動) 하다
봄을 마주하는 기다림


글 김관호 리카르도 신부|영천성당보좌

 

‘우리 꿈나무들’이라는 말을 우연찮게 들었다. 꿈나무라는 말이 대화의 문맥 안에서 이상한 단어는 아니었다. 격려와 관심의 표현이었고, 응원의 말이었다. 그런데 자꾸만 이 말이 나와는 맞지 않은 느낌이 들어 웃음이 났다. 많은 사람 앞에서 머리에 맞지 않는 크기의 산타클로스 모자를 어색하게 올려 놓았지만 자꾸 흘러내려 멋쩍은 웃음을 짓게 되는 그런 기분이었다.

 

우리에게 ‘꿈나무’라는 말은 언제까지 유효한 단어일까? 이 생각에 빠져 있다가 나무라는 단어에 이 어색함의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구나 싶었다. 결국 꿈이라는 것이 이 어색함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갓 서품을 받았을 무렵 신부가 되었다는, 지금은 차마 말하기 부끄러운 자아도취에 빠져 열 살 어린 후배 신학생들에게 밥을 산 적이 있다. 신부가 된 것이 얼마나 좋고 행복한지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며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한 후배가 “꿈이 뭐예요?”라는 질문을 했는데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무 말도 못한 채 얼른 후배들에게 차를 사 주고 돌려보낸 후 ‘이제 내 꿈은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한동안 붙잡았다. 하지만 이내 그 고민은 깊이 넣어두고 눈앞의 고민에만 몰두했다.

 

꿈은 더 이상 희망과 이상이 아니었다. 꿈은 이루어질 수 없는 헛된 상상이 되어버렸다. ‘꿈꾼다.’라는 말 대신 ‘바란다.’라는 말이 훨씬 더 자연스러웠다.

 

‘꿈을 잃어버렸다.’라는 낙담에 빠지고 싶진 않다. 꿈을 되찾아야겠다는 그런 낙관 역시 바라지 않는다. 꿈이 어색해진 자리를 현실과 일상이 차지했고, 이 현실과 일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문제가 결국 가장 큰 문제였다.

 

“너 좀 변한 것 같아.” 일 년 반만에 만난 친구들이 말했다. 오랜 친구라서 농담삼아 던지는 그런 말이 아니었다. 본인들과 달랐던 모습이 아니라 본인들과 같은 사람이 되어버린 나의 모습에 모두가 공감하며 건넨 말이었다.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으면 늘 싱글싱글 웃으며 말꼬리를 잡아 말장난하려고 눈을 굴리더니 이제는 고개만 끄덕이고 있으니깐 정말로 변한 것 같아.”라는 친구들의 말에 애써 나는 변호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었다. 철없는 말장난으로 친구들의 이야기에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철이 들었다.’라는 식의 자기 위로에 빠지는 것보다 현실을 바라보는 마음과 태도가 차갑게 식어버렸음을 인정하게 된다. 타인의 탓으로 돌리며 내 마음의 태도에 궁색한 변명은 피하고 싶다.

 

봄이 온다. 바람이 차갑게 불어오는 새로운 곳에서 나는 또다시 봄을 맞이한다. 떠나는 나에게 많은 사람이 대구보다 추운 곳이라 건강하게 지내라며 따스하게 걱정해 주었다. 이 따스함과 함께 바람이 차갑게 불어오는 이곳에서 살아가게 된 것에 대해 어리석고 세속적인 시선에서 함부로 재단하고 평가하는 빈곤한 상상력을 뒤로 하고 나는 또다시 봄을 맞이한다. 새로운 곳, 새로운 사람, 새로운 일과 사건이 품고 있는 따뜻함을 바라볼 수 있길 바라본다. 차가운 공감이 아니라 따뜻한 농담과 장난으로 새로운 봄을 만날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