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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 푸른 사람들의 이야기
“허물을 벗지 못하는 뱀은 죽는다.”


글 황영상 마태오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15년 전 즈음에 한 교우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즘 신부님, 수녀님은 잔소리를 안 하세요.” 이분 말씀의 뜻은 - 예전 신부님들은 야단도 많이 치고 잔소리도 많이 했다. 그게 다 사랑이었다. 그런데 요즘 신부님들은 잔소리를 안 한다. 사랑과 관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 이런 의미의 말씀이셨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신부님들이 왜 잔소리를 멈추기 시작했을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단순히 성격 탓이겠거니 짐작만 했습니다. 신부가 된지 19년이 지난 지금 왜 신부님들의 잔소리가 점점 줄기 시작했는지 저 스스로를 보면서 한편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왜 신부님들의 잔소리가 줄어들었을까? 잔소리하지 않는다고 해서 교우들과 우리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식은 건 아닐텐데 말입니다.

몇 년 전부터 사제 생활 중에 고민이 생겼습니다. ‘사람이 변할까?’, ‘변할 수 있을까?’ 신부 생활의 연차가 쌓일수록 불특정 다수의 사람을 많이 알게 됩니다. 특히 본당에 있으면 그 가족들 전부를 알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한 번씩 스스로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족들도 말리고 이웃들도 걱정돼서 한마디씩 하지만 자신의 결심과 행동을 변화시킬 마음이 없습니다. 이때가 되면 가족은 가족대로, 그분은 그분대로 신부님을 찾아옵니다. 자신의 행동에 동의와 지지를 얻고 싶은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 이를 지켜보는 가족들이나 이웃들의 판단이 맞는 경우가 많습니다. 분위기가 이 정도 되면 저도 말려봅니다. - 조금 더 생각해 보자.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보고 판단해 보자. 가족들이 걱정한다. - 하지만 일이 이 정도까지 되어 자신의 판단을 접고 돌아서는 사람을 아직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사업, 투자, 흡연, 음주, 취미, 자녀교육… 거의 모든 상황에서 타인의 조언을 듣고 자신의 확신을 버리고 돌아서는 사람을 찾아보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에 넘어지고 나서 후회하며 돌아오는 상황을 보게 됩니다. ‘아 결국 사람은 스스로 체험해 봐야 깨닫게 되는 건가?’, ‘내가 이러려고 내 일도 아닌데 이렇게 용을 썼나?’,‘그냥 멀리서 기도해 드리는 게 최선인가?’ 정말 지켜만 보는 게 맞을까요? 넘어지면 돌아올 수 있는 곳에서 스스로 손 내밀면 잡아줄 수 있을 정도까지의 거리를 유지하는 게 맞을까요? 그러면 어른들은 그렇다 치고 아이들은, 학생들은 어떡하죠?

신입생들이 맞이하는 첫 학기의 절반은 고등학교 4학년들의 수업입니다. 갑자기 성인이 되어 버려서 모든 게 가능해졌는데, 담임 선생님 없이 누가 챙겨주지 않는 학교생활이 아직은 익숙지 않습니다. 이렇게 1학년 대부분의 학생들이 아직은 어색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도 눈에 띄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대학 생활을 기다렸던, 어른이 되어서 스스로 무언가를 찾고 싶어 하는 친구들입니다. 학교에서 진행하는 행사, 프로그램, 교육, 지침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불만거리를 찾는 친구들이 있는 반면 그 안에서 자신이 얻을 것들을 기대하며 참여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설령 만족스럽지 못한 프로그램이라도 그 취지와 의미를 찾아내서 최대한 좋은 기억으로 만드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친구들은 스스로는 그런 성격이 못 되지만 그런 곳에 들어가서 자신도 영향을 받고 싶어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모두가 능동적이고 긍정적이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최대한 많은 학생들이 이 아름답고 소중한 시절을 조금 더 의미 있게 보내게 할 수 있을까? 학교 식구들과 함께 우리 신부님들도 고민합니다. 이제 100살까지 사는 시대에 변화와 성장의 기반을 닦을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알기에 더더욱 간절히 학생들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합니다.

역시 변화와 성장의 열쇠는 체험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시간, 사랑받을 수 있는 상황, 관심을 가져보고 관심을 받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아직 우리나라 교육의 한계인 성적과 그 성적에 따른 분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학생들이지만, 그래서 실수와 실패에 주눅이 들어 있는 아이들이지만, 사랑의 여러 가지 체험을 하게 해 주는 것이 우리 신부님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이 아닐까 합니다. 이미 우리 어른들은 알고 있습니다. 사랑이 늘 행복하고 따뜻하고 이쁘지만은 않다는 것을, 그래서 사랑이 때로는 아프고 섭섭하고 고독하기까지 하다는 것을. 하지만 그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하고 의미 있게 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기에 우리 학생들이, 우리의 아이들이 사랑을 포기하지 않도록,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시간을 많이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