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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가톨릭 신자 교수 무엇을 하는가?
- 대구대교구 가톨릭교수회의 성립과 활동


글 김정숙(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살면서 내가 가장 많이 발음한 단어가 ‘선생님’이고, 또 가장 많이 들은 말도 선생님이다. 선생이란 대부분 어려서 학교에 진학한 뒤로 머리 허연데도 학교 간다고 집을 나서는 사람들이다. 평생에 한 번도 학교를 떠난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끼리 모이면 무엇을 하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가?

 

대구가톨릭교수회의 성립과 변화

단체를 구성할 때 구성목적이 뚜렷한 단체가 있고, 해야 할 목표보다는 구성원의 동질성으로 모인 단체가 있다. 교수회는 후자에 속한다. 그런데 교수라는 범주에 현재 약 23종의 이름이 있다고 한다. 정교수, 부교수, 연구교수, 겸임교수, 석좌교수 등등. 더욱이 그 중의 60%가 비전임, 즉 계약직이다. 교수들은 자신이 아는 분야나 관심 있는 분야가 각기 다르며, 근무시간도 제 각각이다. 이런 사람들이 같은 곳에 같은 목적으로 모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만큼 다양하며 독자적인 개인이 모인 집단도 드물다. 이들을 한 단체로 묶으면 해낼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또 가톨릭교수회도 그 구성원이 늘 변하는 유기적 생명체여서 생성, 성장, 변화, 소멸의 과정을 거친다. 가톨릭교수회 현주소는 어디에 있는가?

교수는 스스로 연구해 지식을 생산하며, 또 그 지식을 타인에게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즉 공장이면서 가게를 겸하고 있는 특수체라 하겠다. 이와 더불어 최고의 지성을 창출한다는 관점에서 사회적으로 모범이나 롤 모델로, 혹은 방법을 제시해 주리라는 기대를 받고 있다. 게다가 교수는 혁명적 변화라고 할 만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오늘날 국가사회적, 그리고 시민적 기대를 한꺼번에 떠메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위상은 흔들리고 있다. 4년제 대학의 정규 교수 숫자가 그 변화의 일단을 보인다. 지금부터 50년 전쯤 1967년에는 교수가 4,762명이었다. 1982년 17,728명, 1990년도 26,365명이었다. 그러나 10년 후 2011년 8만2천190명이었고, 2015년 현재 대학교수의 수는 9만 명을 넘었다.

  대학 내 변화가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던 1999년 10월 29일 대구대교구의 가톨릭교수회(이하 대가회)가 창립되었다. 당시 교수회보 창간호에 정달용 지도신부는 「어두워지면 사람들은 불을 밝히는데, 대학도 촛불을 밝힐 때가 되었다」고 설파했다. 가톨릭교수회는 가톨릭신자인 교수로 구성되며, 가톨릭 이념의 구현과 지식교류 및 대학복음화를 목표로 했다. 대가회는 지도신부(정달용 신부), 회장(최정), 부회장(김정옥, 양성호), 감사(채정민, 오영목), 총무(한명세), 운영위원(최정, 김정호, 유대식, 이영태, 김시헌)로 출범했다. 그리고 대가회의 실무를 주관하는 간사대학을 두었다. 회장 및 부회장, 감사는 총회에서 선출하고 총무는 회장이 지명했다. 대가회의 운영은 임원진이 포함된 운영위원을 두어 30명이 실무를 맡기로 했다. 모든 임원의 임기는 1년이며 중임할 수 있고, 감사의 임기는 2년이었다. 회칙에 지도신부를 정달용 신부로 명기하고 있는 점은 주목을 끈다.

대가회는 바로 회원주소록을 발행하고 활동을 시작했으나 그 출범은 다른 곳과 비교하면 다소 늦은 편이었다. 부산가톨릭교수회는 1979년에 활동을 시작했다. 참고로 서울대교구 가톨릭교수회는 1989년에 시작되었다. 물론 교구 내에서도 각 대학별로는 가톨릭교수회가 운영되고 있었다. 교구가톨릭교수회가 조직될 무렵 경북대학교 가톨릭교수회 회장 박석돈은 이미 5대 회장이었다. 대가회의 예산은 각 대학분담금과 기타 수입(찬조비)으로 충당했다. 가톨릭신자 교수 숫자에 비례하여 책정된 대학분담금은 각 대학의 회원이 내는 회비에서 충당했다. 경북대는 1998년 당시 매년 운영위원은 2만 원, 일반회원은 만 원을 냈다. 영남대는 2000년대에 들어와서 회비를 매월 천 원씩으로 책정했다. 한편, 대가회 모든 임원은 매월 10만 원을 내어 운영위원회의 경비로 삼았다. 26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운영회비 금액은 같다.

가톨릭교수회는 매월 운영위원회를 하고 있다. 본래 회칙에는 격월로 운영위원회를 열기로 되어 있으나 초기부터 매월 모이고 있었다. 운영위원회의에서는 2013년까지는 주로 각 대학의 현안문제, 가톨릭신자 교수로서의 소양 등이 토의되었다. 2013년 이후 운영위원회의는 매월 첫째 월요일 미사봉헌으로 변경되었다. 현재는 담당신부가 본당주임으로 있는 만촌1동성당에서 모인다. 미사 후 식사를 겸해 현안에 대한 의견교환으로 모임을 마친다. 이 운영위원회의를 제외하고 대가회의 큰 행사는 매년 한국가톨릭교수협의회가 주관하는 부활절 피정과 하기 방학 중에 운영되는 영남 4개교구 합동세미나다.

 

영남 4개교구 합동 세미나

대구대교구 가톨릭교수회는 관구 내 가톨릭교수회와 연합하여 영남 4개교구 가톨릭교수회 합동세미나를 연다. 매년 4개교구가 순회하면서 세미나를 준비하고 있다. 초기에는 대구, 부산, 마산교구 연합체로 시작했다가 1986년부터 안동교구가 합류했다. 안동교구는 1969년 설정되었기 때문에 가톨릭교수회도 그 출발 자체가 늦었다. 영남 가톨릭교수회 합동세미나는 1979년 제1차 세미나를 시작으로 매년 계속되어 2015년 현재 36회에 이르고 있다. 여름방학 기간 중 열리는 이 세미나가 대가회의 관심과 활동을 볼 수 있는 주요한 거울 중 하나이다. 대가회의 세미나는 1박 2일로 이루어지고, 신자 교수들이 부부 동반하여 참여하고 있다. 그리하여 신앙 안에서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다지는 기회가 되었다. 본인만 적극적이라면 전공에 관한 정보도 나누고 대학교수의 고민도 나눌 수 있는 자리이다.

36회를 이어온 세미나 내용을 보면 몇 가지 주의할 사항이 드러난다. 우선 가톨릭신앙 자체를 세미나의 주제로 삼았다. 즉 그리스도인의 희망(1985), 성체의 삶(1989), 하느님과 이웃에게 열린 마음(2007), 하느님과의 만남(2010) 등이 이러한 내용으로 생각된다. 또한 교회와 한국사회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 진행된 경우도 있었다. 여기에는 신앙과 현실(1984), 현대사회와 인간성(1991), 정치와 윤리(1992), 인간의 삶과 공동체(1993), 가톨릭 사상과 공산주의 사상(1980) 등이 속한다. 물론 가톨릭교수의 사명과 역할(2008), 가톨릭교수의 교육사도직(2012) 등 교육자로서의 갈 길에 대한 검토도 했고, 급변하는 현대사회의 가정(1986), 그리스도인의 가정(1997), 신앙인의 성(1995), 가톨릭교회의 공동체 의식과 소공동체 운동(1996) 등 사회의 기초단위인 가정과 공동체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교수들은 교회의 큰 이슈를 통해서 자신들을 돌아보기도 했다. 추기경 김수환(2009), 교황 프란치스코(2015), 한국순교자의 발자취를 따라서(2014) 등이 그런 세미나였다. 한국교회의 토착화를 파악하고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가톨릭 전래와 한국문화(1983), 한국가톨릭의 토착화(1988)도 진단했다. 가정복음화는 신앙인의 사명(2005),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십시오(2011) 등으로 선교하는 삶을 준비했고, 봉사(1987), 가톨릭과 사회복지(2003) 등의 주제를 통하여 실천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교수들은 다가오는 2000년을 이미 10여 년 전부터 준비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2004), 2000년을 맞는 기대와 우려(1990),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1994), 2000년대의 이해와 우리의 실천(1998), 1999년 20세기에 대한 회고(1999), 2000년 대희년의 삶(2000), 이 시대 그리스도인의 사명(2013) 등 여러 번의 세미나가 있었다.

 그런데 세미나의 실제 진행 상황을 살펴보면 총 36회 세미나에 41명의 기조강연자가 초빙되었다. 기조강연자는 주로 해당교구의 교구장이나 지도신부들이었다. 발표자는 총 105명이 초대되어 세미나마다 평균 약 3명이 발표를 했다. 그렇지만 발표자가 많이 겹치고 있음이 눈에 띈다. 박영도 8번(기조강연 포함), 이원희 5번, 김길수 4번 등으로 여러 번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있다. 이외 박석돈, 이옥분, 배한동, 박기동 등도 두 번 이상 발표했다. 교수는 최고수준의 교육과 훈련을 받은 전문직업인이다. 전문직업인일수록 하는 일의 깊이는 끝없이 깊고 수준은 끝없이 높아지지만, 일의 폭은 좁아진다. 그러나 교수라는 전문직업인은 일의 깊이 또는 수준에서의 전문성만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일의 폭에 있어서도 매우 넓은 범위를 포용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그런데 대가회는 회원의 참가율로 보면 이러한 기대에 크게 부합하고 있는 편이라고 하기 어렵다.

대구가톨릭교수회 출발의 큰 특징은 회원가입 과정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대구대교구 가톨릭교수회는 교구 산하 대학의 가톨릭신자 교수들로 구성함을 원칙으로 각 대학에 있는 신자교수 전체를 신자라는 당위성을 바탕으로 회원으로 인정한 셈이다. 그리고 대가회의 실무는 운영위원회, 간사대학에서 맡는 형태였다. 회칙에는 대가회의 회칙제정 및 개정 등 주요사항을 정기총회에서 결정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정식 회원가입 과정의 생략으로 정기총회 성립의 충족 수를 알기 어려운 형편이다. 회의에 모인 사람만으로 일을 성사시켜 나가면서 많은 가톨릭신자 교수들이 자신이 구성원이라고 느끼게 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면, 대가회가 그 힘들게 일해 가는 운영위원들 그들만의 모임처럼 될지도 모른다.

대가회의 임원진도 상당히 고정적이다. 1999년에 시작된 대가회는 2015년 현재까지 회장에는 최정, 임경수가 중임했고 현재 이원희가 맡고 있다. 최정 때는 한명세, 전윤환이 총무로 임경수 회장 때는 부회장 신금자와 이원희와 총무 여상도가 함께 일했다. 현재는 정양희와 한명세가 부회장이고 김대명이 총무이다. 이외 운영위원에는 임경수(명예회장), 전윤한과 신금자(감사), 각 대학 회장인 김영인(계명대), 박정자(대구대), 오광식(대가대)과 김정숙(영남대) 등과 각 대학 대표들이 합류하고 있다. 담당신부는 2013년부터 정달용 신부에서 이경수 신부로 바뀌었다.

어느 단체나 희생하는 인물이 있어서 유지된다. 그리고 대표적 인물이 있다. 대가회는 이로 정달용 신부를 꼽는데 누구도 주저함이 없다. ‘걸어다니는 도서관’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그는 실제로 그의 머리나 마음속에 들어있는 지식과 지혜가 도서관급이라는 뜻이다. 교수들이 붙여준 애칭이니 지식의 양으로도 교수들 총합을 뛰어넘었던 것 같다. 그는 1999년 창립 때부터 2012년까지 대가회를 지도해 왔다. 가톨릭학술원이 중심이 되어서 그의 은퇴기념문집을 봉정했다. 『보이소 보이소』라는 정달용 신부 은퇴 기념문집을 만들었다. 그는 거기서 자신에게는 신학교, 교수회 등이 본당이었다고 말했다. 가톨릭교수회의 교수 중에 몇몇은 그런 사람이 나와야 교수회가 모든 이들의 활동을 담아내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오늘날 빠르게 변해가는 교수사회에서 대가회는 이 바탕을 제공해야 한다.

 

대구가톨릭학술원과 한국가톨릭교수협의회

대가회 창립과 영남 4개교구 합동세미나를 제대로 설명하려면 반드시 대구가톨릭학술원과의 관계를 짚어야 한다. 1999년에 시작한 대구가톨릭교수회는 실질상으로는 1979년에 창립한 부산교구가톨릭교수회와 연합으로 창립이전부터 활동을 이미 해 오고 있었다. 그것은 가톨릭학술원을 통해서였다. 한편, 대구가톨릭교수회는 한국가톨릭교수회(이하 한가협)와 연합체로 일하고 있다. 한가협은 한국평신도협의회의 산하단체로 1992년 박홍 신부의 지도로 설립되었고 이듬해 주교회의 인준을 받았다. 이는 서울, 대구, 광주관구의 각 교구가톨릭교수협의회의 협의체이다. 회장은 각 관구 회장이 돌아가면서 맡는데, 현재는 대구의 이원희가 대표회장이다. 학술원과 한가협은 대구가톨릭교수회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함께 보아야 할 내용이지만 기회를 달리하여 서술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