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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가는 성지
한국 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天眞菴) ①


글 박정길(마르코)|형곡성당

성지순례는 어느 계절에 해도 좋으나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밝으며, 또는 적당하게 내린 눈을 밝으며 순례의 길을 가는 것도 나름대로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앞서 보니파시오 형제님이 성지 글을 시작하며 한국 최초의 수덕자이신 농은 홍유한 선생을 기리는 우곡 성지에 관하여 썼듯이, 필자도 ‘함께 가는 성지’를 시작하면서,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인 천진암 성지를 먼저 순례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했고, 또 창립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그분들의 지칠 줄 모르는 신앙 안에 머물고, 느끼며 배우고 싶었다.

성지 입구에는 초 모양의 커다란 조형물 3개가 서 있는데 매월 첫 토요일, 조국과 민족을 위한 천진암 성지 촛불 기도회를 상징하는 것 같았다. 왼쪽에는 성지순례 유의사항 등이 게시되어 있는데 천진암에서는 등산복장을 하면 순례 불허다. 성지는 등산코스가 아니며 등산을 왔다가 잠시 거쳐 가는 곳이 아니기에 필자도 순례 불허에 동의한다. 사람에게 있어 마음가짐과 더불어 복장은 참으로 중요하며, 옷차림에 따라 행동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천진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국내 성지 어디든, 입구에 게시하여 일부 생각없이 오는 순례자의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왼쪽에는 광암(曠菴) 이벽(李檗) 선조의 호를 딴 광암성당이 있다. 포장된 도로를 800m 올라가면 대형 파티마의 성모상과 100년 계획 대성전 건립현장이 나오는데 빠르면 올해, 늦어도 내년에는 공사를 시작한다고 했다. 여기서부터 순례길이 시작된다. 이정표를 따라 500m 산길을 올라가다가 작은 다리를 지나면, 한국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비가 우뚝 서있다. 다시 완만한 경사를 올라가다 보면 오른편에 ‘천진암 강학당 터’가 나오는데 여기가 가장 중요한 장소다. 지금은 암자도, 태고의 흔적도 찾을 수 없으나 빙천수(氷泉水)의 물줄기는 쉼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창립주역 광암 이벽은 어떤 분이신가

천진암 성지 하면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요, 신앙 선조 5인의 묘역이 생각날 것이다. 5인의 묘 중앙에는 광암 이벽(세례자요한) 선조 묘가 있고 묘석에는 ‘한국천주교회 창립 선조’ 글씨가 새겨져 있다. 폐쇄적인 조선시대에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스스로 천주교를 받아들여 전파한 창립 선조 이벽! 이벽 선조는 누구시며 어떤 삶을 사셨기에 교회의 초석이 되셨는지, 먼저 약전(略傳)을 찾아보자. 이벽 선조는 1754년(영조 30년) 오늘의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에서 이부만(李溥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덕조(德操) 또는 벽(蘗)으로 불렀으며 호는 광암(曠菴)이다. 집안 대대로 무과에 급제하여 명성을 날리던 가문이었다. 이벽 선조는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매사에 신중했는데, 성장하면서 성호 이익 스승한테서 학문을 배웠다. 이부만은 다른 자식들보다도 이벽 선조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고조부인 이경상 옹은(인조 11년) 소현세자의 스승이었는데 소현세자와 중국에서 8년간 머무는 동안 천주교에 호의적인 소현세자와 함께 아담샬 신부를 자주 만났으며 귀국하면서 가져온 서양 책들이 가보로 내려오면서 이벽 선조도 자연스럽게 서학(西學)을 접하게 된다. 서학에는 서구의 발달한 과학기술문명도 있고, 천주교 교리도 들어 있었는데, 후일(後日) 서구의 문명만 받아들이자는 북학파와 서구문명도 좋으나 천주교 교리를 더 많이 받아들이자는 서 학파로 구분되었는데 이벽 선조는 서학파의 태두(泰斗)로 불린다. 이벽 선조는 새로운 학문에 몰입하자 세상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명산사찰을 거닐며 도 닦는 데 뜻을 둔 선비들이나 학문에 열중한 면학자들을 만나면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신 상제(上帝)에 관하여 논증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러나 지금처럼 교리를 체계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어서 초보적인 수준이었으나 열의가 뜨거운 만큼 깨우침이 많았다. 이벽 선조의 언변은 흐르는 강물처럼 힘 있고 막힘이 없었으며, 당당한 풍채로 모든 이의 시선을 끌었고 조선의 예법이나 어색한 점잔을 빼지 않고 농담을 좋아하면서도, 자연스럽고 고상한 기풍이 배어 있었는데, 키는 8척이요 한 손으로 백 근을 들었다 한다. 이벽 선조의 건장한 체격을 보고 이부만은 활쏘기와 말타기 등을 연마하여 훌륭한 무과로 출세시키려고 무한히 애를 썼으나 어릴 때부터 무과보다는 학문을 좋아했던 이벽 선조는 아버지의 기대와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천진암 강학회(講學會)

1779년(정조 3년) 천진암에서 명문대가의 학자인 녹암 권철신을 좌장(座長)으로 하여 만천 이승훈, 손암 정약전, 선암 정약종, 다산 정약용, 직암 권일신 등 10여 명이 모여 강학(seminar)을 하고 있을 때 서울 수표교에 살고 있는 광암 이벽 선조가 이 소식을 듣고 1백여 리 눈길을 걸어 주어사(走魚寺)로 오는데 도착하니 밤이었다. 그런데 강학장소가 주어사가 아니라 천진암이라는 말을 듣자 그 밤에 다시 호랑이 굴이 많고, 수많은 맹수가 도사리고 있는 높은 앵자봉을 넘어 설야를 해쳐온다. 이벽 선조가 도착하여 강학에 합류하면서 강학은 서학으로 바뀐다. 하늘과 세상과 인간 본성 등에 관하여 여러 문제가 심도있게 다루어졌는데 바로 천주교사상이었다. 이벽 선조는 상당한 지식의 소유자였고 권철신, 권일신 등도 당대를 풍미하던 유학자였으니 강학회는 진지하면서도 엄숙했고 일정이 빡빡했다. 합숙하며 빙천수(氷泉水)로 씻고, 밥을 지어 먹고, 함께 잠을 자며 기도와 묵상과 토론을 했으니, 전 세계 가톨릭에 있어 유례가 없고 마치 수도자와 같은 생활을 하였다.

 한국천주교회와 교황청에서는 1784년 명례방 집회를 한국천주교가 설립된 해로 인정하고 있지만 천진암 강학을 한국천주교가 실질적으로 출발한 기점으로 보기도 한다. 왜냐하면 창립의 계기가 된 것은 천진암 강학모임이었고, 강학을 주도한 이벽 선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성 다블뤼 주교는 조선순교사 비망기에 ‘조선에 처음으로 천주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천주께서 간택하여 쓰신 도구는 이벽’이라 했으며 ‘진정한 의미의 조선천주교회의 역사가 이벽의 강학에서 시작되었다.’고 규정했다. 이벽 선조는 열흘간의 모임에서 한국천주교 최초로 ‘천주공경가’와 ‘성교요지’를 저술했고, 정약전 등 2명이 지은 ‘십계명가’ 등도 있다. 묘역 오른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이벽 선조 독서처가 나오는데 요즘으로 말하면 연구소, 만학도장과 같은데 개인적인 처소로, 때로는 학자들과 강학하는 장소였다. 낙엽이 쌓여있는 곳에 독서처 비(碑)를 보고 있노라니, 금방이라도 이벽 선조가 산자락에서 잔가지를 헤치며 독서처로 내려올 것만 같았다.

- * 참고자료: 하늘로 가는 나그네(김길수 교수), 천진암성지 홈페이지, 성지자료, KBS 한국사 전(傳) 한국천주교 창설주역 ‘이벽’3에서 발췌하였습니다.

 

* 성지주소 : 천진암 성지 -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천진암로 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