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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가는 성지
천진암(天眞菴)과 창립주역 이벽(세례자요한) ②


글 박정길(마르코)|형곡성당

 

천주교 탐구에 목말라있던 이벽 선조는 1783년 만천 이승훈이 베이징 동지사 사절단으로 가게 되자 그를 붙들고 이렇게 당부했다. “자네가 북경에 가게 된 것은 천주께서 우리나라를 불쌍히 여기사 구원하고자 하시는 표적일세. 북경에 가거든 즉시 천주당을 찾아가 서양인 신부를 만나 그들의 교리와 예배행위를 자세히 알아보고 필요한 서적들을 가져오게. 삶과 죽음의 큰 문제와 영원의 큰 문제가 자네 손에 달려 있으니 가서 무엇보다도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게.” 이벽 선조의 이 말은 학문의 갈증보다도 종교의 갈증이 더욱 절실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선조 이벽(세례자요한)의 복음 선교

1784년 이승훈은 북경에서 ‘베드로’로 세례를 받고 책과 십자고상 상본과 신기한 물건을 가지고 돌아와 부탁한 것을 전하자 이벽 선조는 미리 얻어 둔 외딴 집으로 들어가 두문불출한다. 몇 달 후 외딴 집에서 나와 이승훈과 정약전, 약용 형제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진리이며 무수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사 구원의 은총을 내려 주시려는 것일세. 이것은 천주의 명령이니 모든 사람에게 천주교를 전파하고 복음을 전해야 하네.” 그런 후 수표교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구세주가 우리 민족에게 오시도록 길을 닦겠다.’는 결의로 ‘세례자요한’으로 세례를 받는다. 이벽 선조는 곧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최창현, 최인길, 김종교, 김범우, 지황 등 중인과 양반계층의 정약전, 약용 형제가 있었다. 이벽(세례자요한) 선조와 이승훈(베드로) 선조가 서학을 활발하게 가르치는 것을 보고 유림들이 혀를 차자 당대 유림 이가환이 설득하려 나섰고 이벽 선조도 성호 이익의 손자인 가환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만난다. 덕망 있는 선비들이 빙 둘러 앉은 자리에서 3일 밤낮을 토론했는데 후일 다산 정약용의 묘비명에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환의 논지는 먼지처럼 흩어졌고, 이벽의 논증은 태양같이 빛나고 바람처럼 몰아치며 환도처럼 끊어냈다.” 가환이 졌음을 시인했으나 믿지 않는 것을 보고 더 이상 부질없는 토론을 하지 않았다.

이벽 선조는 나라에 복음을 빨리 전파하고 천주교회를 튼튼하게 세우기 위해 학식과 평판이 좋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인물들을 끌어 들이려 했는데 그가 양근 고을에 사는 권철신이었다. 이벽 선조는 1784년 9월 그를 찾아가 복음을 전했다. 중국 경서의 철학과 논리를 연구하는데 일생을 보낸 그는 망설이다가 얼마 후 입교하여 ‘암브로시오’로 세례를 받는다. 이벽 선조는 자기의 집에서 여러 신자들과 모여 기도와 교리를 연구하다가 여러 사람이 편하게 드나들도록 1784년 음력 10월경 역관 김범우의 집인 명례방으로 장소를 옮겼는데 그 후로 최필공, 홍익만, 권상문, 윤지충을 비롯하여 새로 입교한 교우들이 많았다. 1785년 모임을 의심하던 포졸들의 급습으로 적발되고 마는데 이를 ‘을사추조 적발사건’이라 한다. 당대의 명문가 양반들이어서 손을 못 대고 그중에 집주인이었던 중인(中人) 김범우(토마스)만 문초를 당하고 결국 밀양 단장으로 유배된다. 한편 김범우가 문초 받는 것에 가책을 느껴 명례방 모임에 참석했던 양반들이 형조를 찾아가 우리도 똑같은 벌을 내려달라고 청했으나 추조판서 김화진은 이들을 달래서 돌려보냈다.

 

문중 세력에 의해 가문 처형을 당한 이벽 선조

이 사건으로 나온 묘책이 문중세력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양반집 문중마다 문중회의를 하도록 통문을 돌렸다. 이승훈 선조의 아버지 이동욱과 정약종 선조의 아버지 정재원도 문중회의에 소환되어 문책을 당했는데 특히 이벽 선조의 문중은 더 심했다. 천학을 가르치며 남녀칠세부동석인데 양반집 부녀자들이 남정네들과 동석하여 양반을 상놈으로, 상놈을 양반으로 만드는 사문난적은 당장 문중에서 제명돼야 한다며 야단이었다. 이부만은 이벽 선조에게 천주교와 절언하라고 온갖 방법으로 회유해도 듣지 않자 탈관삭직에 패가망신하느니 차라리 죽겠다며 대들보에 목을 매려했다. 어머니가 절규하며 부르짖었다. “천학이 뭔지 몰라도 아버지를 목매달아 죽게 하는 그런 종교를 누가 믿겠느냐? 이래도 천학운동을 하러 다니겠다는 말이냐?” 십계명에 부모에게 효도하라 명하셨는데 만일 천주교가 아버지를 목매달아 죽게 하는 종교로 엉뚱하게 소문이 퍼진다면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우선 아버지를 살려야 했다. “그럼 안 나가겠습니다.” 이벽 선조는 이런 상황에서 전교를 할 수 없고 문중의 기세가 수그러들기를 바라는 뜻에서 한발 물러선 것인데 조선의 풍습을 모르는 달레 신부는 교회사에 이벽 선조를 부정적으로 기록했다. 이부만은 이벽 선조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별당에 가두고 대문에 못을 박았다. 문중에서 강경하게 나오자 몹쓸 전염병에 걸렸다며 전갈을 보냈고 혹시라도 진위를 확인하러 나올지 몰라 아예 봉쇄해버린 것이다. 감금 15일째, 이벽 선조는 때가 되었음을 알고 몸을 추슬러 의관을 갖춘다. 만일 배교한다고 한마디만 했더라면 당장 감금이 풀렸을 것이고 이부만은 즉시 달려가 이 사실을 문중에 알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벽 세례자요한은 외부와 단절된 채 1785년 32세로 생을 마감한다. 조정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형 집행을 당한 첫 순교자는 윤지충이 맞지만(1791년), 이벽 선조는 우리에게 생소한 가문처형을 당해 요절했기에 우리 사가들은 순교자로 보며 초대교회 건설의 공로자요 선구자로 위대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벽 선조 운명시

“무협(巫峽)의 중봉(中峰)에 서 있는 형세(形勢)로다. 이제는 죽어서 황천(黃泉)길로 가야하나, 은하수(銀河水) 별자리에 밝은 달 떠오르듯, 비단옷 곱게 입고서 하늘나라 가노라.”

짧은 생애였으나 진리에 목말라하며 선교로 불탔던 이벽 선조는 1979년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에서 이장하여 본명축일인 6월 24일 당신이 강학했던 바로 이곳에 묻혔다. 선조 앞에 큰 절을 하면서 손바닥에, 무릎에, 물기가 배어나오는 것보다 더 짙은 촉촉함이 마음을 적셨다. 당신의 열성과 희생으로 말미암아 한국 천주교회가 이렇게 성장했고 성장한 무리 안에 있는 내가, 지금 당신 앞에 있음에 감사하며 머리를 숙였다.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을 떠나 성지에 와서 참배하고 기도하고, 잠시 머물다가는 것도 좋으나 그것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성지순례의 주목적은 신앙 선조들의 덕행과 모범을 본받아 한 가지라도 실천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귀찮고 힘들어도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내가 이벽 선조의 입장이었다면 아버지를 죽게 내버려 뒀을까? 아니면 “안 나가겠습니다.”라고 했을까? 감금됐을 때 이벽 선조처럼 생을 마감했을까? 아니면 배교했을까? 시대가 바뀌었어도 우리는 이와 같은 질문을 진지하게 자문(自問)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자문에 답하는 만큼 나를 조종하는 무의식의 나침판도 그렇게 방향을 틀어주기 때문이다. - 참고자료: 하늘로 가는 나그네(김길수 교수), 천진암성지 홈페이지, 성지자료, KBS 한국사 전() 한국천주교 창설주역 이벽에서 발췌하였습니다.

 

* 성지주소 : 천진암 성지 -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천진암로 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