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사라진 마을, 잊힌 순교자 문경 한실교우촌의 김예기 회장 형제


글 김정숙(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치프리아노 성인은 순교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그를 모욕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지상에서 교회가 순교자들을 한 등급 더 올린다고 해서 하늘나라에서 그들의 등급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그래도’ 하는 마음이 드는 순교자들이 있다. 대구대교구는 이윤일 성인을 제2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다. 그런데 이윤일 성인과 함께 나타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이윤일 성인이 전투에서 승리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감옥에서 치명의 순간까지 마치 성인의 그림자처럼 나타난다. 문경 한실교우촌의 김예기 아우구스티노 회장과 그 동생 김인기 순교자이다. 그들은 당시 신앙의 모범적인 한실교우촌의 회장 집안 자제들이었다. 그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과 힘을 합쳐 그 치열한 병인박해 속에서 선교사 깔래 신부를 7개월이나 숨겨준 장본인들이었다.

 

김예기·김인기 형제

『일성록』 고종 3년 병인년 11월 29일에는 의정부에서 “경상감사 이삼현의 장계를 보니, ‘문경고을에서 잡힌 사학 무리 중에 이제현, 김예기, 김인기 세 명은 사학에 매우 깊게 빠진 자들이니 해당되는 율을 시행하도록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해 주기를 바랍니다.’ 했습니다.”라고 아뢰면서 이 세 명은 백성들을 많이 모아 놓고 효수(梟首)하여 모든 사람들을 경각시키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을 올렸다. 같은 날 『승정원일기』에도 동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이제현은 이윤일의 다른 이름이다. 이들 세 순교자는 관변 기록에 이렇게 나란히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한 날 한 시에 관덕정에서 목이 잘려 피로써 그들의 신앙을 고백했다. 그리고 병인순교자 재판과정에서 이윤일 성인의 아들 이의서는 이렇게 증언했다. “30여 명 교우는 상주에서 치명하고 부친과 한실 살던 김 회장 형제 세 사람은 우두머리라 하여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죽는 날을 당해 감사가 음식 세 상을 차려 세 사람에게 각각 주었는데, 김 회장 형제 두 사람이 먹지 않고 울거늘, 부친의 말씀이 ‘천주가 먹으라 하신 음식을 먹지 않고 울기는 무슨 연고냐?’며 권면했습니다. (부친은) 사형장에 나아가 나졸에게 ‘말뚝 넷을 땅에 박으라.’ 훈수하고 친히 엎디어 나무토막을 목에 괴고 ‘사지(四肢)를 각각 잡아매라.’ 하고 또 주머니에 엽전 닷 돈을 나졸에게 보내며 이르되 ‘첫 칼에 목숨을 없이 하여 달라.’ 하고 태연히 참수치명하셨습니다.”

 이처럼 재판 증언에서도 김 회장 형제의 순교는 분명히 목격증인들을 가지고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1867년 1월 21일 관덕당 형터에서는 이윤일, 김예기, 김인기 세 사람의 군문효수가 행해졌다. 그러나 김 회장 형제에 관한 이야기는 그 뒤부터 사라졌다.

 

교리서를 지킨 김 회장, 선교사를 지키고

이윤일 성인에 따라 나오는 일화들로 보면, 김 회장 형제도 이윤일 성인과 같은 옥살이를 했을 것이다. 이들은 약 한 달 간 함께 옥살이를 한 뒤 서울에서 명령이 내려와 여자와 아이들은 풀려나고, 김 발바라라는 여성과 남자들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괴수들은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문경일대에서 체포된 신자가 약 70여 명 되었는데, 상주 옥에서 30명쯤 처형되었다. 그렇지만 김 회장은 이번이 처음 붙잡힌 것이 아니었다. 한실마을은 벌써 여러 번 포졸들의 습격을 받아 왔었다. 한실은 소백산맥 줄기 중 백화산(1063m)에 있던 신자촌이다. 마치 산을 병풍삼아 두른 듯한데, 그 병풍 바로 뒷면은 이화령 고개를 넘어 연풍이다. 한실은 3채씩 집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어 모두 15가구로 이루어졌다. 산꼭대기 분지 안에 고립되어 있는 지역으로, 산봉우리가 수려하고 위엄이 있어 빼어난 장관을 이루며 나무꾼의 도끼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소나무들로 덮여 있었다. 땅은 온통 바위투성이어서 밀밭을 일굴 수는 있지만 수확이라고는 보잘 것 없었다. 겨우 보일 듯 말 듯 난 오솔길만이 산 정상까지 꼬불꼬불하게 이어져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깔래 신부가 병인년 박해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막 한실교우촌의 사목방문을 마칠 무렵이었다. 신부는 다음 교우촌으로 가는 것처럼 가장했으나 실은 3월초에서부터 10월까지 한실에 있었다. 한실의 회장과 신자 두 사람이 나서서 사람들 눈을 피하여 외진 곳에 있는 집들 속에 신부의 거처를 마련했었다. 이 집은 신부가 몸을 길이대로 펼 수는 있으나 서면 머리가 들보에 닿았고, 문이라곤 산을 향해 난 창호지문 하나뿐인 오두막이었다. 신부는 미사용구를 감추고 준주성범과 성무일도서, 성서, 연필과 종이 몇 장만을 가지고 있었다. 신부에게 은신처를 마련한 세 사람은 밤마다 은밀히 신부를 보러 와서 그날 겪은 박해를 이야기하고 충고를 얻고 피신해 갔다가 돌아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내내 여기에 머물렀다. 아이들까지 나서서 깔래 신부를 모셨었다.

병인박해 직후 포졸들이 이 마을을 습격했다. 마침 문경으로 며칠 피신 갔던 신부가 돌아왔다가 이들에게 붙들렸다. 마을 사람들은 전부 숨어있었는데도 신부를 구해야 된다고 포졸이 있는 데로 다시 내려왔다. 결국에는 이들이 포졸을 빙자한 폭도들이 교우촌을 약탈하러 온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지만, 그들은 ‘죽어도 신부와 함께’라는 각오가 있었다. 그러나 이미 교우촌으로 알려진 한실은 마을 전체가 박해를 당하기가 일쑤였다. 한 번은 마침 신부가 함창 관할인 문선 마을로 옮겨가 있던 중이었다. 3월 19일 저녁 무렵, 한실에서 윤 토마스가 신부를 모시러 왔다. 그리고 마을에 일어난 일을 보고했다. 신부가 한실을 떠나고 이튿날 문경에서 온 포졸 9명이 내습해 왔다. 그들은 회장 김예기 아우구스티노를 체포했고, 달아나는 사람들은 쇠사슬로 때렸다. 부인네들 몇 명과 김 안드레아가 잡히고 다른 사람들은 달아났다. 그런데 포졸들은 김 아우구스티노가 회장이라는 것을 알고 천주교 교리서와 성물이 있는 곳을 대라고 족쳤으나 그는 끝내 불지 않았다. 그러자 사람들을 다그쳐서 숨어있는 이들을 전부 불러오게 했다. 포졸들이 끝까지 위협하자, 세례 받은 지 겨우 2~3년 된 사람들이 성물을 내어놓는 정도야 하느님을 부인하는 게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집에서 가장 적게 쓰이는 말씀서적 한두 권을 내어주었다. 그러자 차츰 다른 집에서도 성화를 내주고 묵주까지 내놓기도 하였다. 포졸들은 이 모든 성서와 성물을 걷어 가지고, 김 안드레아를 끌고 관아로 돌아갔다. 관장은 성물을 모두 불에 태웠다. 그리고 이 마을은 이미 수색이 끝난 마을로 인정해 주었다. 이때 회장이 꿋꿋하게 마을을 지탱해 주었다.

교우촌으로 알려져 위험하므로 한실에서는 신부를 마을 밖으로 모시기도 했다. 즉 그의 거처를 커다란 동굴 안에 정하고 새벽에 지게에 신부를 태우고 그곳에 모셔다 놓았다. 낮이 되면 꼬마 아이가 놀러오는 척 하면서 신부께 점심을 갖다 드렸다. 또 밤이 되면 청년들이 신부를 지게에 져서 다시 마을로 모시고 왔다. 이 동굴조차 발각되자 회장과 청년들은 신부를 더 깊은 계곡으로 모셨다. 그리고 김 프란치스코는 아예 동굴 속에서 신부를 모셨다. 깔래 신부가 이 마을을 떠난 뒤, 조선에는 미국 배가 출몰하고, 프랑스 함대가 선교사를 처형한 책임을 물으러 왔었다. 조정에서는 다시 추상같은 천주교 신자 체포령을 내렸다. 이렇게 2차로 심한 박해가 시작되자 문경 포졸들은 다시 한실신자촌을 덮쳐서 이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치명일기』에는 서 베드로, 김 아오스딩, 김 도마(김 아오스딩의 아들), 김 아오스딩(김 아오스딩의 증손자), 김 안당(김 아오스딩의 증손자), 김 분도(김 아오스딩의 증손자), 김 원선시오(김 아오스딩의 증손자)가 처형되었고, 신부를 동굴에서 모셨던 김 방지거(김 아오스딩의 형)는 그의 두 조카 김생원(김 방지거의 조카) 및 또 다른 김생원(김 방지거의 조카) 등과 함께 장서방, 장서방 부인, 김 요셉, 김 베드로(김 요셉과 사촌), 모 막달레나(김 베드로의 모친) 등이 같은 날 교수형으로 순교했다고 전한다. 이후 한실 신자촌은 쇠퇴해서 1892~3년의 김보록 신부 교세통계표에는 이미 그 이름이 없다.

 

사라진 마을, 증언할 사람이 없어

이윤일 성인의 순교사실 증언자는 아들 이의서, 맏며느리 박 아녜스, 처조카 박주현 등 이윤일 회장과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한실 사람들에 대하여는 『치명일기』에 기록된 사람들조차 여우목 출신 박주현이 증언했다. 그런데 박주현도 이들을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던 것 같다. 15~6명의 순교자 모두의 속명(俗名)을 모른다.

한국천주교회가 병인 순교자 시복을 위한 예비조사를 시작한 것은 박해가 끝난 지 약 5-6년 후인 1876년부터였다. 이때는 박해를 피해서 잠시 피신 나갔던 깔래 신부, 페롱 신부, 리델 신부 등 세 선교사가 재입국을 위해 노력하면서 박해의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고 순교자들을 증언하던 때였다. 그리고 순교자들의 후손은 물론 자신이 직접 감옥에서 풀려난 사람들도 아직 생존해 있던 때였다. 그리하여 순교사실 조사과정에서 1,310건의 순교사실이 수집되었다. 1895년 장드르(Le Gendre) 신부가 이를 『치명일기』로 묶을 때 877명이 선정되었다. 당시 함께 일하던 사람들도 그 기준이 너무 엄격하다고 할 정도였다. 이어 조선교구장 뮈텔주교는 『치명일기』를 전국의 각 본당과 공소에 돌려 순교자들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증거와 누락된 순교자들에 관한 증언을 확보하고자 했다. 총 877명의 순교자를 수록한 이 책자와 『승정원일기』와 『일성록』 등 관변문서에 나타난 기록 등을 근거로 하여 순교사실을 입증하기 비교적 수월한 29명이 선정되었고, 이 가운데 결국 26명의 순교자가 가려져 이들에 대한 시복재판이 추진되었다. 결국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분명 관변문헌에도 기록되어 있고, 교회측 증언 속에서도 살아 있는 많은 사람이 제외되었다. 김예기, 김인기 두 순교자는 이 명단에 들지 못했다. 이윤일 성인은 맨 마지막 26번째로 선정되었다. 그런데 드브레(Devred) 주교가 작성한 「1866년 병인박해 순교자 묘지조사록」에 ‘대구에서 이요안의 묘가 옮겨왔다.’는 짧은 글이 있다. 이윤일의 묘에 관한 유일한 문헌자료이며 순교자의 눈에 보이는 단서였다.

 이윤일 성인의 가족과 지인들은 형장에서 약 삼마장 떨어진 현 관덕정 자리 부근에 이윤일 성인을 묻고 김 회장 형제는 따로 한구덩이에 함께 묻었다. 그런데 한 달 후 이윤일 성인의 무덤 봉분을 높이고, 이태 후 비산동으로 옮겨갔다. 성인의 아들과 친지들이 이윤일 성인의 묘를 비산동으로 옮겨 갈 때 이윤일 성인의 유해만 옮겨 간 것 같다. 그리고는 아무도 김 회장 형제에 대해 더 묻지도 않고 또 관심도 갖지 않았다. 한실교우촌은 이미 비었다. 또 시복재판에서는 순교사실을 개별적으로 질문하기 때문에 선정되지 못한 사람은 질문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므로 김예기 형제의 묘는 대구 관덕정 현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었을지도 모른다. 병인년(1866)과 무진년(1868)에 이름 없이 간 그 숱한 순교자들도 어쩌면 이름은 곳곳에 흘려 놓았는데 우리가 읽어내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시복식에서 우리를 그 훌륭한 신앙선조들의 혈연적, 문화적, 신앙적 후손이라고 했다. 선조를 좀 더 잘 알면 조금이라도 더 닮은 후손이 되지 않을까? 김예기, 김인기 두 순교자들도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