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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이야기
숙제


글 박경현(프란치스코)|포항 오천고등학교 교장, 진량성당

 뒤쪽으로 금호강이 흐르고 집 앞 좌우에는 아름드리 고목들이 즐비한 야트막한 산이 시선이 닿는 곳까지 늘어서 있었다. 마당 바로 건너편에서 시작하여 골짜기를 따라 적절한 높이로 층계를 이루며 작은 논밭들이 다양한 모양으로 형성되어 있고, 그 마지막 지점에 작은 저수지가 보이는 외딴집에서 나는 고등학교로 진학 할 때까지 살았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누구나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그림 같은 전원주택일 수 있지만 당시에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외딴집이었다. 불과 몇 십 년 전의 일이지만 마치 아득히 먼 옛날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그 시절의 우리 부모님들이 보여준 삶의 모습을 떠올리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맏이인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 우리 집에는 제도권 교육의 기회를 가진 사람이 없었던 탓에 연필이며 종이며 이런 것들은 필요치 않았다. 창호지 문을 다시 바르기 위해 뜯어낸 낡은 종잇조각에 손가락 길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몽당연필로 처음 글자를 배우던 순간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나를 감싸 안은 어머니가 내 손을 꼭 쥐고 또박또박 무언가 써 주었고 그것을 보고 내가 그려놓은 것을 내려다보며 어머니는 마치 아들의 천재성을 발견한 사람처럼 환하게 웃었다. 아라비아 숫자 몇 개와 내 이름 석 자, 그것이 어머니가 나에게 해 줄 수 있었던 조기교육의 전부였다. 이때도 읍내에는 유치원이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것도 10년이나 지난 후의 일이니, 젖만 떼면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는 지금의 아이들은 상상도 안될 것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어머니는 공책에 그려진 동그라미 숫자를 보고 칭찬해 주시는 것 이상 자식들의 학교공부를 도와줄 수는 없었다. 밥만 챙겨주면 10리가 넘는 학교를 오가는 것은 언제나 재미있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온몸이 흠뻑 젖어 먼 길을 걸어서 돌아와도, 언 발과 손을 호호 불며 눈바람을 뚫고 다녀도 학교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시절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집은 늘 비어있었고 주말에 부모님과 함께 여유 있는 시간을 가져본 기억이 없다. 날이 저물어 고픈 배를 움켜쥐고 동생들과 나란히 산 어귀에 서서 어둠이 몰려오는 길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기다리면서도 우리는 부모님을 탓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날이 저문 후에 혼자 마을을 벗어나 외딴집까지 귀가할 때의 기억은 잊을 수가 없다. 또 가을 운동회를 앞두고 늦은 시간까지 연습을 하는 날이 많았다. 동네를 벗어나 작은 언덕 너머로 꼬불꼬불 놓인 산길로 접어들면 사방에 짙게 내려와 있는 어둠 한가운데에 혼자 격리된 채 온몸은 굳어지고 숨이 가빠진다. 길게 뻗은 나뭇가지가 달그림자에 일렁이고 하필 무덤 바로 옆으로 난 길을 지나야 할 때면 금방이라도 그 무덤이 갈라져 죽은 이가 일어나서 걸어 나올 것 같아 걸음을 옮기기 힘들 만큼 다리가 후들거린다. 나는 깊은 숨을 들이쉬고는 눈을 꼭 감은 채 건너편 언덕을 향해 미친 듯이 뜀박질을 한다. 발자국 소리가 작은 골짜기에 낮은 메아리로 퍼질 때 “현아~!”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헐떡이며 땀 냄새가 물씬 나는 어머니의 치마폭으로 달려들었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하면 그제서야 보였다. 하늘에 쏟아질 듯 펼쳐져 있는 별 구름과 땅위에 유성처럼 떠다니는 반딧불 무리를. 그 순간 어머니의 존재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 고맙고도 위대했다.

나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두려움에서 아들을 건져내기 위해 서둘러 일손을 멈추고 이렇게 기다려준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는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가슴에 품었고 평생 그것을 잊은 적이 없다. 세끼 밥을 해결하기에도 벅찼던 시절 어머니는 마치 일개미처럼 온몸이 부서지도록 일하셨다. 비록 당신은 배우지 못하고 넉넉하지 못해도 자식들만은 남에게 뒤지지 않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 하나로 자식을 위하는 일이라면 가혹할 만큼의 희생과 헌신을 기쁘게 받아들이셨다. 그리고 평생 술에 절어있는 아버지와 더불어 살아오면서도 자식들 앞에서는 언성 한 번 높이는 일이 없이 남편에 대한 존중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마치 운명처럼 만난 사람과 부부가 되어 귀한 자식 몇몇 낳아 기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된 듯 자신에게 닥치는 고단한 삶의 파고들을 우리들을 바라보며 기쁘게 받아 들이셨다. 어떤 시련도 인내하면서 살아가기로 작정을 한 사람처럼 묵묵히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모든 것을 다 바치는 모습만 보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어머니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살고 싶었다.

 

‘아버지!’ 이 단어를 떠올리면 여러 가지 느낌들이 뒤얽힌다. 어린 시절 대부분의 마을 어른들처럼 매일 약주에 취하신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도 선명하게 기억되어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 가족이 아버지와 함께 저녁을 맞이한 기억은 거의 나지 않는다. 어머니가 한 번씩 몰아쉬는 한숨처럼 아버지는 우리 가족 모두의 근심의 원인인 듯 보였다. 맑은 정신의 아버지와 마주하여 정겨운 대화라도 나누고 싶었던 기대는 책에서나 볼 수 있는 꾸며낸 이야기처럼 여겨졌다. 어머니가 참을성이 많고 자신의 불편한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성품이었기에 망정이지, 어머니마저 분노 조절이 잘 안 되는 아버지와 맞섰다면 요란한 언쟁이 적막한 골짜기에 멎을 날이 없었을 것이다. 수업이 끝난 후 친구들과 함께 돌아오는 길에 먼발치에서 취기가 오른 아버지가 보이면 다른 길로 돌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아버지가 나를 알아채지 못하게 친구들 속에 숨어서 지나가 버리기도 했다. 학창 시절에 선생님들의 가정방문 기간에 가슴 졸였고 친척이나 친구들이 집에 와 있으면 마음 한구석 불안함이 늘 함께 했다.

하지만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자식들의 교육에 대한 아버지의 꺾을 수 없는 고집 덕분에 생존경쟁이 치열한 현실에서 우리 자녀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안정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만 생각하면 송구하고 감사할 뿐이다. 학비를 제때에 납부하지 못해 창피를 당하는 일이 다반사였던 시절에도 공부하는 데에 걱정이 없도록 자존심을 걸고서 뒷바라지해 주셨다. 아무리 바쁜 농사철이라도 무슨 특권이라도 주어진 것처럼 언제나 학교에 틀어 박혀 있을 수 있었고 책을 산다는 말만으로도 금액에 상관없이 돈을 구해 주셨다. 공부 핑계를 대면 허락되지 않는 일이 없을 만큼 자식들이 공부하는 것을 모든 것에 우선했다. 비록 당신은 초라하게 살고 있지만 자식들만은 남들에게 당당할 수 있도록 자신의 평생을 고스란히 희생하셨다. 아버지의 음주습관에 대한 과도한 원망에 묻혀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 그 희생이 없었다면 자식들의 발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봄이나 가을이 되면 집에서 마을 앞 신작로까지 제법 먼 산길에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랄 때마다 아버지가 깨끗하게 낫질을 해 두신 덕분에 바지 하나 젖지 않고 등하교를 할 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당신 입으로 아직까지 한 번도 이야기하신 적이 없다.

내가 대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우리 집의 경제 사정은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평소 농사일 외에 격한 노동을 하신 적이 없었던 아버지가 4년 가까이 모 대학교 신축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해서 그 어려운 고비를 건너왔다는 사실조차도 40년이 지난 금년 설날에 우연히 듣고는 놀라움과 함께 감동이 다시 몰려왔다. 마치 공부에 한이 맺힌 사람처럼 뒷바라지를 해 주셨지만 성적보다는 사람 됨을 강조하셨고,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희생을 다 하셨지만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아버지로서 언제나 부끄럽고 미안해하시던 모습이 더 귀하게 다가온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것들을 하시고도 그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의식하지 못할 만큼 당연하게 여기셨다.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수많은 아버지의 희생을 우리 자식들은 끝내 다 알지는 못할 것이다. 아버지의 감추어진 희생에 작은 보답이라도 드리고 싶은 마음들이 쌓여서 우리들은 지금 기쁘고 감사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

2013년 낯선 오천고등학교 교장으로 발령을 받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생활하고 있다. 10년 전 어머니를 먼저 떠나보내시고 이제 아흔을 바라보는 고령의 아버지는 하루도 몸이 성할 날 없이 노환이 끊이지 않고 위험한 고비들이 수시로 찾아온다. 하지만 곧 죽을 일이 아니면 나에게 절대로 연락을 하지 못하도록 가까이 있는 형제들에게 엄하게 당부를 해 두셨다. 혹시라도 늙은 애비로 인해 공직에 몸담은 자식이 자신의 업무에 소홀할까봐.

 

수업이 끝나면 많은 차들이 학교 앞에 늘어서 있다. 이제 우리 자녀들은 비를 맞으며 등하교 하는 일도, 어둡고 낯선 길을 두려움에 떨면서 귀가할 일도 없다. 끼니를 걱정할 일도 공부하는 것을 멈추고 일터로 나가야 할 필요도 없다. 가족들이 함께 여행가는 일도 일상이 되었고 고가의 전자기기가 갖추어진 공부방이 있고 적지 않은 부담이지만 필요하면 사교육도 쉽게 받을 수 있다. 사회 구석구석에 가난의 그림자가 다 걷히지는 않았지만 경제적으로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풍요로워졌다. 물질적인 넉넉함을 제공하는 것이 부모로서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여기며 혼신의 노력을 다하여 뒷바라지한 덕분에 우리 부모님의 세대에서는 상상도 못할 만큼의 많은 것을 지금의 아이들은 누리고 있다.

하지만 이상하다. 우리 자녀들은 가난했던 우리들의 학창시절보다 더 깊은 공허함으로 폭력, 우울증, 자살 등 심각한 증상에 시달리는 일이 오히려 늘고 있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경제적인 차별이 가져다 주는 상대적 빈곤감, 이기주의와 쾌락문화의 만연으로 인한 가치관의 혼란, 일류를 향한 무분별한 경쟁 등 훨씬 복잡하고 민감한 고민들이 아이들을 흔들고 있다. ‘왜 공부해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인지?’, ‘세상에는 왜 이토록 많은 불합리가 있는지?’ 이런 의문들이 경제적인 궁핍보다 더 심각하게 아이들을 외로움의 벌판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등 따뜻하고 배 부르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던 시절과는 달리 요즈음의 아이들에게는 차라리 춥고 배고픈 한이 있어도 반드시 충족시켜야 하는 영혼의 굶주림이 더 심각하게 다가온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는 우리 부모님들은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난감함으로 당황할 수밖에 없다. 육체적인 수고로 증명해 보였던 사랑의 방식만으로 다 아우를 수 없는 더 세심하고 복잡한 모양으로 우리들의 사랑을 드러내 보여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은 그토록 많은 편의를 제공해 주는 오늘날 부모에게서 우리 아이들이 느끼는 사랑의 깊이는 우산 들고 마중 한 번 오지 못한 우리들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서 받은 그 사랑과 비교도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 부모님들이 우리에게 쏟은 사랑과 지금 내가 우리 자식들에게 쏟고 있는 사랑의 모양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그리고 부모로서 품고 있는 이 깊은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를 알아내는 것은 우리 자녀들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꼭 해결해야 할 이 시대 부모님들의 엄중하고도 막중한 숙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