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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마당 1
유리향의 겨울나기


글 이말필(데레사)│모화성당 ‘성실하신 모후’ 쁘레시디움 단장

 

지난해보다 닷새나 빠른 2월 10일에 복수초가 샛노란 꽃을 피웠다. 아직은 영하의 날씨이나 자세히 살펴보면 땅 속에서는 새싹들이 기지개를 켜고 설중매며 산수유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 꽃망울을 부풀린다. 이제 한겨울을 무사히 넘기고 있으니 겨우내 움츠렸던 유리향도 활기를 찾게 될 것이다.

이곳 외동 지역은 중소기업들이 몰려 있어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 안산 다음으로 외국인 근로자들이 많은 지역이다. 의사소통이 아쉽지 않은 옆집 중국 총각이 찾아와 이층 방을 빌려 달란다. 마침 비어있던 차여서 주고는 싶은데 담배가 문제였다. 중국 사람들은 정말 담배를 즐긴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담배를 입에 물고 돌아다니는 것이 너무나 싫어 담배 피우는 사람은 안 된다고 했더니 담배 피우지 않는 여자라며 일주일 뒤에 올 것이라고 하였다. 약속한 대로 일주일이 지난 오후, 총각이 생소한 중국인 부부와 손가방 하나를 든 가냘픈 젊은 여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리곤 계약서를 작성하는데 방세며 보증금 모두 같이 온 부부가 해결하고 여자만 남겨놓고 돌아가 버렸다. 아마도 빈 몸으로 와서 동료에게 빌리는 듯하였다.

아무것도 없는 빈방에 작은 새 같은 사람만 남겨둘 수가 없어 이런저런 말을 시켜 봐도 도무지 한 마디도 의사소통이 되지를 않는다. 다행히 남편 미카엘이 마지막 한문세대라 필답을 통하여 이름이 ‘유리향’이라는 것, 만주 하얼빈이 고향이라는 것, 그리고 집에 열여덟 살의 딸을 하나 두고 있다는 것, 내일 아침부터 회사로 출근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달랑 손가방 하나 들고 왔으니 당장 침구며 의복이며 취사도구가 전무한 상황이다. 다행히 보일러 기름이 좀 남아있어 방을 덥혀주고 우선 미카엘이 사용하던 등산 침낭과 요 하나, 담요 한 장, 그리고 작은 딸이 와서 입는다고 해서 보관 중이던 겨울 코트를 내어주었다. 안채로 돌아와 생각을 하니 아무래도 커다란 숙제를 끌어안은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겉모습이라도 강건해 보이면 다소 마음을 놓겠는데 여린 해파리 같은 모습에 타국까지 돈벌이를 하겠다고 혼자 와서 불안해하던 모습을 보니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에도 외국에 나가 살고 있는 딸이 하나 있다. 멕시코를 거쳐 현재는 미국에서 딸 하나를 낳고 잘 살고 있으나 정착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과 시행착오와 이웃들의 도움이 있었을 일들을 생각하며 유리향을 잘 보살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선 집 안을 뒤져 그릇세트, 냄비, 프라이팬 등 주방 기구들을 챙겨놓고 가까이에 사는 큰딸에게 전화하여 사정을 알리며 옷가지를 부탁하여 갖추어 놓았다. 저녁이 되자 딸의 코트를 입은 유리향이 퇴근을 했다. 준비한 주방기구와 한 상자나 되는 옷가지를 올려다주니 웃으며 나를 껴안고는 서툰 한국말로 “언니, 고마워요.”라고 한다.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언니, 오빠라고 부르면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모양이다.

유리향이 이 땅에 정착하는데 우선 한 달을 어떻게 견디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달 동안 일을 하면 월급을 탈 것이고, 그러면 소요되는 물건들을 구입하면서 살아갈 길이 열릴 듯하였다. 매일 컵라면만 먹을 순 없으니 수소문하여 작은 전기밥솥을 하나 구해주고 김치 한 통과 쌀을 넘겨주며 밥을 해 먹으라고 하였다. 혹시 타국에서 영양실조라도 걸려 쓰려지면 큰일이다 싶어 틈틈이 야채며 간식거리들을 건네주었다.

드디어 한 달이 지난 12월 초. 안채로 찾아와 방세를 내면서 난방용 기름을 넣어달라고 10만 원을 내어놓았다. 남은 돈으로 한 달 생활비나 될까 해서 남은 돈이 얼마나 되느냐고 했더니 손지갑을 뒤져 다 쏟아놓는 돈이 7만 원 남짓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 달을 지내기에 부족한 금액이라 난방유는 우리가 외상으로 넣어주기로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마음이 쓰여 오며가며 한 번씩 들여다보면 항상 춥다고 하여 단열 뽁뽁이를 유리창마다 발라주니 훨씬 아늑해졌다. 연말이 가까워지며 날씨가 더 추워지자 툭하면 안채로 뛰어 들어와 몸을 부르르 떨며 춥다고 했다. 가엽다고 오냐오냐하면 안 될 것 같아 불러서 12도밖에 되지 않는 우리 집 거실 온도계를 보여주고는 절약하려면 겨울은 좀 춥게 지낼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겨울 한 철은 최소한 난방을 하여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그러자 미카엘이 난방 보일러 사용법을 한문으로 잔뜩 적어오더니 교육을 시킨다. 그리고 남의 나라에 돈 벌러 왔으면 강인한 정신력으로 인내하며 현실을 극복해야지 절대 나약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며 만약 더 좋은 곳이 있으면 받은 돈을 다 돌려줄 것이니 옮겨갈 곳을 찾아보라고 했단다.

그 뒤로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잘 인내하며 지내고는 있으나 여전히 컵라면이 주식이다. 그러다 혹시 영양불균형으로 각기병이라도 걸리면 큰일이겠다 싶어서 비축해두었던 배추와 무를 건네주며 많이 먹으라고 했더니 알겠다며 웃는다. 한 달만 무사히 넘기면 정착할까 했는데 아무래도 한겨울은 지나야 할 듯하다. 우여곡절을 겪는 사이 어느새 유리향이 들어온 지도 백일을 넘기며 겨울도 꼬리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꽃이 피고 새싹들이 머리를 내미는 봄이 지척에까지 와 있으니 머지않아 유리향의 얼굴에도 꽃이 피게 될 것이고 힘겨웠던 한국에서의 첫 겨울도 오래 기억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