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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사랑과 부활
- 삼청공소의 임인덕(林仁德, Sebastian Rothler) 신부 추모비


글 김정숙(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2015년 10월 11일 삼청공소의 주일미사에서였다. 신자들의 기도 중 마지막에 은인들을 위한 감사기도가 있었다. 그런데 둘째 마디부터 기도하는 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리고 신자들이 하나가 되어 훌쩍였다. “예수님, 들으셨지요?”라고 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임인덕(1935~2013) 신부 추모비를 세우는 날이었다.

 

삼청공소와 임인덕 신부

삼청마을은 길가에서 산을 안고 안으로 들어가 있다. 마을 가장 높은 곳에는 마치 선물로 내린 듯한 성당이 서 있다. 이 성당은 알빈 신부가 설계하고 벽화를 그렸다. 알빈 신부는 약 180여 개의 건축을 설계했지만 자신이 직접 벽화를 그린 곳은 많지 않다. 게다가 성당이나 벽화가 갓 지은 듯이 보존되어 있다. 신자 수 약 140여 명, 50여 세대가 한마음으로 사는 동네이다. ‘가톨릭의 승리’라는 말을 머금게 할 만큼 예쁜 마을이다. 1950년대 중반, 왜관수도원의 호노라도(남도광) 신부가 이곳에 땅을 매입하여 당시 ‘힘겹게’ 살고 있는 이들의 정착촌을 시작했다. 그는 차츰 농지를 구입해 주민들에게 분양했다. 1959년에는 공소가 들어섰다. 이곳은 공소이면서도 주일미사가 빠지지 않고 봉헌되는 곳이다.

남 신부를 이은 사람은 임인덕 신부이다. 그는 1980년대 초부터 이 공소를 사목했다. 그는 그 이전에도 가끔 남 신부를 대신했기 때문에 인연은 더 오래된다. 임 신부는 삼청공소 일이라면 모든 일에 우선했고, 반드시 자신이 해야 한다고 믿었다. 임 신부는 삼청공소에서 드리는 주일미사와 교리수업 시간만은 꼭 지켰다. 그는 서울 출장 중이어도, 다시 올라가야 했어도 금요일이면 밤기차를 타고 내려왔다. 정착촌의 자립도는 점점 높아갔고 가난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병 치료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편, 세상 사람들의 인식과는 다르게 그들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은 아주 건강한 정상아였다. 학교 성적도 우수했다. 임 신부는 독일에서 잠시 학교에 있었다. 그때 학생들과 캠핑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놀이를 통해서 아이들이 느끼고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그의 교육 방법이었다. 또한 그는 학생들이 연극을 하면서 의견을 나누도록 했다. 그는 한국에 와서 성주본당에서도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교리공부를 마치면 젊은이들과 마을 뒷산으로 소풍도 갔다. 점촌본당에서도 그룹게임이나 시청각 자료를 활용해서 어린이들이 교리에 재미를 붙이도록 했다. 임 신부는 마오로기숙사 사감일 때도 학생들에게 공부시간만큼 운동시간도 소중하다고 일깨웠고, 직접 학생들과 어울렸다. 그는 운동과 음악, 여러 예술활동을 통한 전인교육을 시도했다. 삼청공소 어린이들은 임 신부와 함께 이 모든 것을 누렸다. 당시 임 신부는 출판과 미디어 책임자였기에 삼청공소의 아이들이 바로 그의 추억이며 미래에 만날 선한 눈매의 구체적 표현이었다. 임 신부에게는 독일 아이, 한국 아이들이 하나로 합쳐져 삼청에 나타나고 있었다. 삼청공소에 있어 임 신부는 세상과의 연결이었으며 세상으로 나가는 문이었다. 그는 산간학교를 열어 아이들을 데리고 바다나 산으로 나갔다. 그러다가 1987년 여름산간학교에 갔다 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임 신부는 크게 다쳤다. 그렇지만 그는 몸이 불편하게 되었어도 어느 활동도 멈추지 않았다. 검은색 베레모, 낡은 재킷, 구부정한 모습으로 지팡이를 짚은 신부의 가방에는 항상 책과 비디오가 가득했다. 삼청공소 젊은이들은 여름밤이면 성당 뒤 회관에 모여 스크린 속 세상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임 신부는 삼청의 젊은이에게처럼 이 땅의 모든 이들을 이 새로운 매체로 초대했다.

 

스크린 속으로 떠나는 세상 여행

임 신부가 영화와 텔레비전을 효과적인 교수방법으로 주목한 것은 뮌헨대학에서 공부할 때였다. 또 앞서 본 바와 같이 그는 교육하는데 몸의 오관을 다 쓰고자 노력했다. 그런 그가 육체의 모든 기관을 활용하는 교육방법으로 종합예술인 영화에 주목함은 당연했다. 그의 언어학습에 대한 체험에서도 이러한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는 한국에 입국하기 직전 뉴욕에 있는 뉴튼수도원에서 영어를 공부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는 결국 ‘길 위에서 영어를 배웠다.’미국 전역을 무전여행하면서 옆자리 승객을 자신의 영어교사로 삼았다. 그는 또 한국어도 그렇게 실습했다. 서울과 왜관을 오가는 기차는 그의 ‘한국어학원’이었다. 옆자리에 젊은이가 타면 유쾌하고 발랄한 유행어를 배웠고, 어르신이 타면 구수한 사투리를 배웠다. 임 신부의 강론은 길어야 3~4분 정도였는데, 이 또한 압축된 이미지를 보이고 싶어 하는 욕구의 다른 표현이었다고 하겠다. 더구나 1970년대 영화나 텔레비전은 한국사회에 있어 최신 기술이며 첨단의 문화였다. 임 신부는 이 효과적인 기법의 원조는 바로 예수라고 했다. 예수는 항상 비유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임 신부 당대 예수의 비유는 바로 그림일 것이었다. 비유가 그림이면, 정지된 그림은 사진과 슬라이드이고, 움직이는 그림은 영화였다. 말과 글로 들은 것을 그림으로 보면 믿기가 더 쉬울 것이다. 영상매체를 통한 복음전파였다, 「나자렛 예수」, 「아빌라의 데레사」, 「십계」 등의 종교영화뿐 아니라 「워터프론트」, 「길」 같은 명작영화,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들 등 제목만 들어도 그 흑백영화의 장면을 선하게 떠올릴 수 있다. 베네딕도미디어는 융판 그림 35종, 슬라이드 120여 종, 음악 카세트 130여 종, 사진말 9권, 이콘과 성물 40여 종과 비디오물 100여 편을 내었다.

   

독자를 이끌고 나간 출판사의 사장

영화관이 거의 없던 한국에서 임 신부는 부르면 어디든 달려갔다. 그는 야외에 스크린을 설치하고 영화를 돌렸다. 직접 영사기를 들고 다녔기 때문에 영화 분야에서 그의 이름은 잘 알려진 편이었다. 그러나 임 신부는 분도출판사의 책임을 맡아 책을 400여 권이나 펴낸 사장신부였다. 물론 사람들은 책을 읽을 때 출판사 사장을 기억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임 신부는 하느님 말씀을 그림과 영상으로 전하면서, 거기에 책이라는 또 다른 매체를 보태면 사유와 논리에 익숙한 이들의 지적욕구도 충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완성된 복음전파 수단으로서의 책을 엄선하고 오래 계획했다. 임 신부는 이 종합매체라는 기회를 선물로 받은 사람답게, 스스로 ‘꽃들에게 희망을’ 품게 하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거룩한 표징』, 『성난 70년대』, 『현실에 도전하는 성서』, 『해방신학』, 『일상』 등 선한 책의 방향을 잡아갔다. 또한 그는 한스 큉, 칼 라너, 정양모, 성염 등 국내외 저명한 학자들을 이 거룩한 나무의 그늘이 되자고 초대했다. 그리고 김지하, 이해인, 최민식, 권정생 등을 책으로 소개했다. 아울러 성경번역, 교부신학, 신학서 소개로 신학교 내의 샘을 파고자 했다. ‘교부문헌총서’, ‘아시아신학총서’, ‘종교학총서’, ‘사목총서’, ‘신학텍스트총서’ 등은 이 땅에 학문의 틀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우화시리즈 같은 도전도 서슴지 않았다. 임 신부 곁에는 김윤주와 정한교 같은 걸출한 편집장이 함께했다. 물론 분도수도원과 남 호노라도 신부 등 동료들은 그의 흙이면서 잎이었다.

임 신부는 전쟁 직후 시달리는 한국인의 품격을 개발하고 나아갈 세계를 제시했다. 그리고 당장 필요한 지식을 보급했다. 사람들은 임 신부가 탁월한 감각을 지닌 전문가라고 했다. 이는 아마도 그가 신자나 비신자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를 묶는 『인간의 길』을 생각한 데서 왔을 것이다. 그는 기숙사 사감 시절 기숙생들이 반드시 가톨릭 신자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기숙사 입사조건은 신앙이 아니라 시험결과일 뿐이며 종교는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믿었다. 또한 그는 모든 기숙생이 의무적으로 미사에 참석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수요일 저녁 후 예배당에 가겠다고 외출을 신청하는 학생도 있었다. 이러한 임 신부를 통해 가톨릭정신은 세상으로 폭넓게 나아갔다. 이는 임 신부 부모의 신앙교육 덕일지 모른다. 그는 열두 살 무렵부터 매일 어머니를 따라 새벽미사에 갔다. 그런데 공심재가 문제였다. 걱정하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너는 미사 마치고 바로 학교에 가야 하지 않니? 그럼 아침을 굶어야 하는데, 너 같은 어린이들이 영성체를 하기 위해 아침밥을 굶는다면 그것은 하느님도 원치 않으실 게다.”라고 했다. 어머니는 따끈하게 데운 우유와 구운 빵을 아들 앞에 내놓곤 했다.

 

사랑과 감사는 부활에 이르고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영화를 만드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봐야 하는 영화를 만든다.” 그는 독자에게 끌려가지 않고 그들을 선도하는 출판사 사장이었다. 이러한 일은 난관에 부딪치기도 했다. 당시까지 분도출판사는 출판물 판매를 교회에 의지했었는데, 어느 날 교회와 거래가 끊겼다. 이때부터 사장신부는 신념을 담은 책과 미디어들을 팔러 직접 나섰다. 각 성당 교중미사 후 판매대를 설치했다. 대학가 주변의 서점을 돌았다. 분도출판사는 이렇게 일반서점, 대학가서점에서 환영받게 되었다. 동종업계에서는 이런 작품들을 내고도 베네딕도미디어가 건재한 것을 ‘왜관의 기적’이라고 했다.

임인덕 신부는 1935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1954년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에 입학하고, 이듬해 베네딕도회 뮌스터슈바르작수도원에 입회했다. 1961년 종신서원을 하고 뮌헨대학교에서 종교심리학을 공부한 뒤, 1965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듬해 7월 왜관수도원에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성주, 점촌성당의 사목을 짧게 거쳤고, 마오로기숙사 사감을 했다. 1972년부터 분도출판사와 인쇄소를 맡았고, 나중에 베데딕도미디어도 책임졌다.

임 신부는 『해방신학』 사건 이후로 형사가 따라붙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2011년 임 신부는 건강이 악화되어 독일로 치료받으러 갔다가 2013년 10월 12일 그곳에서 선종했다. 마침 왜관의 도서출판담당 수사들은 책전시회 관계로 독일에 있었다. 또 서울대교구 신부 23명이 사제연수로 독일에 있다가 임 신부의 장례미사를 공동 집전했다. 그들은 우리말로 고별노래를 불러 임 신부의 한국사랑에 답할 수 있었다. 임 신부가 선교사로 파견되던 1960년대 한국은 ‘전쟁’과 ‘가난’으로 요약되는 나라, 아프리카보다도 가난하다는 곳이었다. 임 신부는 이 상황을 선택했다. 특히 그는 덕원선교사로 파견되었다가 수용소 생활을 하고 귀국한 요셉 챙글라인 신부를 통해 ‘하느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순수한 영혼들을’ 상상했다. 임 신부는 가난했지만 당당했고 개인과 사회의 미래에 대해 긍정적인 한국 젊은이들에게서 그런 영혼을 발견했다. 임 신부는 그들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사랑받았다. 임 신부는 자신이 발견한 바를 실천할 수 있는 토양을 받은 축복받은 이였다.

삼청공소에서 이 마을에 정착한 1세대 신자들은 남 신부 송덕비를 세웠다. 그리고 임 신부를 따라 산간학교에 참여했던 꼬마들이 성숙한 사회인이 되어 그의 추모비를 마련했다. 그들은 “가끔씩은 한센인 부모님을 외면하고 싶은 날도 있었습니다. … 그러나 우리는 아픔과 상처가 아니라 ‘아름다운 추억과 행복한 기억’을 가지고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했다. 그들은 임 신부를 통해 배운 하느님의 사랑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비 앞에서 다짐했다. 이 공소에서 울리는 저녁 공동기도 소리를 들으면 삼청공소 신자들이 이미 그렇게 살아왔음을 확신하게 된다. 삼청공소는 임 신부에게 활력이 되어준 곳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는 그를 향한 감사의 샘이 되었다. 이렇게 부활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사람 속에서 피어난다. 그래서 누구든 삼청공소에 들어서면 ‘생명감’에 젖는다. 삼청공소와 임인덕 신부의 생명이 영원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