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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이야기
봉급


글 박경현(프란치스코)|포항 오천고등학교 교장, 진량성당

 어느 비오는 날 이른 아침 출근길이었다. 차창 밖으로 비바람을 동반한 제법 강한 태풍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비한방울 바람 한 점 허투루 들어올 수 없는 승용차 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있었다. 베토벤의 무슨 교향곡을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곡이라고 소개해 주었다. 궂은 날씨가 오히려 운치가 되어 아름다운 선율을 감상할 수 있는 그 시간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이 순간이 가능하기까지 나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숱한 사람들의 노고가 불현듯 너무 고마웠다. 일생을 바쳐 위대한 곡을 만든 사람, 아름다운 소리를 위해 악기를 만든 사람, 그리고 혼신의 노력을 다하여 연주하고 지휘하는 사람들을 나는 알지 못한다. 최고의 음악이 지금 나에게 전해지는 것이 가능하게 한 위대한 과학적 업적을 남긴 사람들도 나와는 일면식도 없다. 내가 타고 있는 이 차와 저 도로, 그리고 지금 내가 향하고 있는 학교와 학교 안의 아이들. 이런 것들이 갖추어지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노고를 생각하면 ‘내가 이렇게 많은 것을 누려도 되나?’ 하는 송구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내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다가오는 숱한 감정의 늪에 허우적거릴 때 나보다 먼저 아파하면서 음악이며 그림이며 또 아름다운 문학작품으로 나를 위로해 주기 위한 모든 준비를 갖추어 준 많은 사람들이 너무 고마웠다. 이 세상 주인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나에게 부여된 것 같았다. 전 생애를 오로지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삶을 살다간 슈바이처와 같은 사람마저도 ‘나의 삶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이 너무 많아 가슴 아프다.’고 회고했던 그 말의 느낌을 알 것 같았다.

요즈음 일자리 문제가 국가적 과제이다. 대학을 선택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가 취업이다. 자신의 적성이나 능력보다는 안정된 취업에 유리한 학과에 집중해서 인재들이 몰려든다. 사범대학이나 교육대학도 그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런 대학에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지만 힘들게 공부하여 교사 자격증을 획득하는 것이 끝이 아니다. 공립의 경우 임용고시라는 높은 벽이 있고 사립학교의 경우에도 채용 경쟁률이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 교구에서 운영하는 학교법인의 교사 공개채용시험의 경쟁률이 과목에 따라서는 100:1을 넘기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막상 임용의 검증 과정에서 예비 선생님들과 면접을 해보면 우리가 원하는 선생님들을 만나는 것이 쉽지가 않다. ‘면도를 하는 데에 부엌칼이 필요 없다.’는 말처럼 무작정 학력이 높다고 해서 좋아할 일만은 아니다.

“출퇴근 시간이 일정하여 자신의 생활을 누릴 수 있다.”

“정년이 보장되고 다른 직업에 비해서 안정된 연금이 있어서 노후가 편안하다.”

“사회적으로 교사라고 하면 그래도 인정을 받을 수 있다.”

“남녀의 차별이 상대적으로 적은 직업이다.”

면접을 통하여 교단에 서고 싶은 이유를 들어보면 교사라는 직분에 대한 가치보다는 이렇게 직업으로서의 장점들 때문에 교직이나 공무원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 경쟁사회에서 안정된 직업을 가지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우선하는 목표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직업의 가치는 근무 조건과 봉급의 액수만으로 평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최고 학력을 갖춘 학생들이 의과대학이나 치과대학을 목표로 하는 이유도 명예와 부를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의사라는 직업의 외형적인 화려함 때문만은 아닌지 우려가 될 때가 있다. 명문대학 인기학과라는 것도 좋은 직장에 취업할 확률에 따라 결정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래서 고등학교들은 학교의 명운이 걸려 있는 이러한 대학진학의 성과를 위해 전력질주하게 된다. 우리 학교 자율학습을 위한 지정된 좌석에 붙어 있는 그들의 각오를 보면 어른인 내가 부끄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가야할 때 가지 않으면 가려고 할 때 갈 수 없다.’

‘나는 할 수 있다. 해야 한다, 할 것이다.’

‘지금은 고통스러운 것이 당연하다. 그냥 받아들이고 그 고통을 끝까지 참고 견딜 때 마침내 목표를 이룬다.’

‘가업을 일으켜라. 부모님을 힘들게 하지 마라. 독기를 품어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돈 벌려면 치과대학 가야지.’

‘너에게 너 자신이, 그리고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걸었던 3년의 기대를 네가 처참히 무너뜨렸을 때, 그 비참함을 감히 네가 가늠할 수 있다면 지금처럼 살아도 좋다.’

현재 우리 아이들은 더 이상 노력할 수 없을 만큼 원하는 대학의 합격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처럼 젊은이들이 책과 가까이 하면서 공부에 몰두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직업을 통하여 실현하고자 하는 가치에 대한 동기가 미흡한 아이들에게 막무가내로 부여된 공부는 무거운 짐이 될 수도 있다. 강요된 목표와 상처 받은 과정이 아이를 지치게 만든다. 배움의 즐거움 같은 것은 한가한 사람들의 말장난처럼 들리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학교생활은 오로지 인내와 끈기만이 강요되는 고단한 행군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입시가 지옥이라는 말이 솔직한 표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훗날의 높은 봉급과 유리한 근무조건을 갖춘 직업이 행복을 보장해 줄 것이라는 확신으로 입시경쟁에서 앞서가는 것만을 연습하는 곳이 학교가 아니다. 학교는 동의할 수 없는 힘겨움을 무작정 견디면서 가야 하는 무모한 강요가 합리화되는 곳도 아니다. 학교생활이 미래의 행복을 위하여 지금의 행복을 포기하도록 가르치는 곳이 되어서도 안 된다. 의미 있는 일은 언제나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학교의 현장이 지금 하고 싶은 것만 하는 편한 곳일 수는 없다. 명문대학 합격, 멋진 직장 취업성공, 사랑하는 사람과의 혼인, 이런 것들이 행복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어른들은 알고 있다. 행복은 어떤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완성된 상품처럼 툭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살아가는 과정에서 매순간 다가오는 낯설고 힘겨운 장면을 스스로 극복해 냈을 때 긍정적인 성취감을 통해서 쌓아가는 것이다. “훗날 행복을 위해 지금은 불행해도 참자.”라고 말하기 보다는 지금 좋은 목표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 공부하고 있는 이 순간이 비록 피곤하다 하더라도 참으로 큰 축복이라는 것을 체험하고 가르치는 것이 학교의 중요한 존재 이유일 것이다. 대학입시도 실패하면 인생의 낙오자가 되는 장애물이 아니라 나를 성장시키는 의미 있는 많은 도전들 중의 하나로 받아들인다면 입시 공부가 지옥이 아니라 인생을 학습하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고독에의 도전』이라는 책에서 코바야시 아리카타(小林有方) 주교님이 하신 말씀은 아무리 자주 인용해도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베풀기 위한 목적으로 능력을 쌓기 위해서 바치는 수고는 고통이 아니라 축복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큰 사랑을 베풀기 위하여 노력하는 이 순간을 행복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내일 갑자기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을 애도한다.”라는 문구가 유행어처럼 나돈다. 취업이 어려운 시기에 세상으로 내몰린 젊은이들에게 위로의 말로 건네기에는 너무도 두렵다. 앞으로 좀 더 세월이 지나면 “태어난 것을 애도한다.”고 말하게 될 것 같아 소름이 끼친다. 이처럼 취업의 문제는 우리 사회의 생존을 위협하는 엄중한 문제가 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젊은이들을 받아들일 만한 안정된 직업을 많이 마련해 놓지 못한 탓도 있지만 그것보다 편하게 근무하고 많은 봉급이 주어져야 좋은 직업이라고 강요한 말의 책임이 더 무겁다. 지금 산업의 현장에는 일 할 사람을 구하지 못해 많은 외국인 근로자들을 고용하고 있다. 이러한 기현상은 직업의 가치를 근로 조건만으로 판단하는 가치관이 바뀌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이다. 봉급이 내가 취업해야 하는 목적이고 봉급의 액수가 내가 하는 일의 귀천을 판별하는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나라 청년 실업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일과 직업은 내가 세상에서 받은 것에 대한 작은 보답의 기회가 되고 그것을 통하여 행복해질 수 있다면 내가 어떤 일을 하든지 그것은 고귀한 역할이 될 것이다. 직업이 생계의 수단만이 아니라 삶의 가치를 실현하는 기회일 때 우리는 진정 행복해질 것이다. 비록 세상 사람들은 초라하다고 여기는 일이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 일을 통하여 얼마든지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가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 것이 너무도 절실하다.

학교폭력예방을 위해 최저 임금의 절반 수준에 못 미치는 예산으로 배움터 지킴이제도를 국가에서 운영하고 있다. 봉급이라 부를 수도 없어서 봉사수당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하루 35,000원, 월평균 50만 원을 지급한다. 그래서 근무 조건도 정하지 않고 자원봉사자 수준으로 채용을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이 분은 아이들이 등교를 시작하는 아침 7시부터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는 늦은 밤까지 아이들을 살펴주고 있다. 휴일에도 늘 학교 주변을 오가면서 아이들을 챙기고 많은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하며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네며 사랑과 봉사를 몸소 보여주고 있다. “교장 선생님! 저는 소원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건이 좋지 않아 군인으로 살았지만 지금 이 나이에 학교로 출근하는 것이 너무도 행복합니다.” 늘 이렇게 이야기하며 보는 사람에게 힘을 준다. 게다가 매년 2개월 봉사수당을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으로 내놓고 있다. 넉넉한 살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학교로 출근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받을 것을 다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미 근무의 결과를 봉급이라는 금액으로 평가하지 않는 것이다.

오늘도 학교의 현장에서 불철주야 아이들의 곁을 지키는 선생님들이 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근무시간도 의식하지 않고, 주말과 공휴일도 학교에 매달린다. 학생과 학부모로부터 선생님이라는 이유로 존중을 받았던 시절도 이미 아니다. 그러나 나를 선생님이라 불러주는 아이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진심 하나로 제자들의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헌신에 의해 내가 과분하게 누릴 수 있었던 것을 기억하며, 제자들의 삶에 작은 도움이 되는 그 순간의 행복이 우리 선생님들이 받고 싶은 귀한 봉급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