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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순교 복자의 후손, 성당 짓는 신부되다
- 복자 김종륜의 손자 김승연 신부의 사목활동


글 김정숙(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한국교회는 순교자들의 피 위에 건설되었다. 그리고 교회는 순교자들을 기려왔다. 지상에 교회를 세우고 활동할 수 있게 된 시기에 주교가 된 뮈텔 주교는 “순교자들의 꽃이여 피어나라”를 문장 표어로 정했다. 그리고 드망즈 주교도 문장 위에 팔마 가지를 그려 넣어 순교자들의 승리를 기억하고자 했다. 그러나 수많은 시복시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는 순교자들에 대하여 아는 사실이 적다. 순교자들의 고향, 가족관계, 성격, 생활 등 기본적인 사실도 모르고 있다. 더구나 순교자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분들의 순교 장면을 평생 가슴에 담고 살았을 순교자들의 후손에 대해서는 아직 관심을 제대로 기울이지 못하고 있다.

 

김종륜 복자의 손자 김승연 신부 용평본당을 세우고

용평본당의 삼덕당 정녀들은 오늘날 예수성심시녀회라는 거대한 식구로 성장했다. 그런데 그 한적한 곳 용평에 이러한 정녀들이 나타나게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곳의 공기는 순교자의 후손들이 뜸 들인 믿음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에는 용평이 이 지역 천주교의 중심이었다. 용평마을에는 경상남북도를 모두 합쳐 다섯 번째로 성당이 섰다. 용평보다 앞서 세워진 성당으로는 대구 계산동, 부산진, 가실, 김천(황금)성당뿐이었다.

화산면 용평리는 영천지방에 가톨릭교회의 터전을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곳에 처음으로 복음의 씨가 떨어진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김승연(1874-1945) 신부가 1874년 이곳에서 출생했다. 김승연의 아버지 김종황은 ‘대구 어른’으로 용평 사람들에게 존경받았는데, 바로 김종륜 복자의 차남이었다. 그가 대구에서 이곳으로 이주한 때는 1870년대 초라고 추측된다. 즉 1868년 여름 울산 장대벌에서 순교한 허인백, 김종륜, 이양등 세 순교자의 가족들은 가장이 순교한 다음 모두 대구로 이사했다. 그 후 김종륜의 큰아들 가족은 다시 청주로 떠나고 둘째 아들이 용평으로 왔다. 큰아들은 고향 쪽으로 귀환했고, 작은아들은 연고가 있던 경상도 지역에 머물렀다.

김종륜의 본관은 경주였다. 그의 조부 김휘빈이 언양현감을 지냈다는 구전이 있으나 문헌상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김휘빈은 1861년 63세로 공주에서 별세하여 그 무덤이 공주 서면 용소동 선영에 있다. 이러한 구전은 김종륜의 신분이 양반이었음을 암시해준다. 그는 조선교회 창설 직후부터 신자가 많았던 충청도 공주에서 태어나 어릴 때 입교했다. 김종륜은 교양과 학식이 풍부하여 교리서를 비롯하여 동정부부 순교자인 이순이의 옥중수기도 필사하여 갖고 있었다. 김종륜은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부모를 모시고 공주를 떠나, 경상도 상주군 멍에목(상주 가항리) 교우촌으로 피난했다. 그러다가 상주에서도 검거선풍이 일자, 다시 조부 때부터 일정한 연고가 있었으리라 추정되는 언양 근처로 내려왔다. 그는 대재라는 깊은 산중 신자촌으로 피난해서 그곳 회장이던 이양등을 만났고, 또 얼마 후에는 허인백을 만났다. 세 사람은 순교까지 함께했다.

 용평공소는 1907년 이곳 출신 김승연 신부가 초대 본당주임으로 부임하면서 본당으로 승격했다. 김승연은 용평에서 출생하여 열 살이 되던 1884년에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당시 국내에는 신학교가 없었으므로 그는 밀항하여 말레이시아 반도에 있는 페낭신학교로 유학을 갔다. 아직 공소도 서지 않은 외딴 교우촌에서 그가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면 그 집안의 내력이나 학식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용평에 공소가 선 것은 김승연이 신학생으로 선발되고서도 몇 년이나 지난 뒤였다. 용평 신자촌에 공소가 서는 데는 서상돈의 권유로 영세한 김태호(1854-1915)의 공로가 컸다. 그는 석촌동에 살았는데, 1888년 관청의 박해가 일자 석촌에서 2km 떨어진 용평 교우촌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그는 1893년 자신의 집 사랑채를 공소로 제공하고 교우들을 모아 용평공소의 문을 열었다. 공소는 1898년경부터 가실본당에 소속되었다가 1905년부터는 대구본당 관할하에 있었다.

이때는 김승연이 페낭에서 한창 공부하고 있을 때였다. 방인성직자 양성에 주력했던 파리외방전교회는 1665년경부터 당시 샴 왕국의 수도였던 유타이아에 신학교를 설립, 운영해 왔으나 박해와 전쟁으로 신학교를 베트남, 인도 등지로 자주 옮겼다. 결국 신학교는 1807년 영국령이었던 페낭에 정착하게 되었다. 박해로 인해 신학교를 설립할 수 없었던 조선, 중국, 베트남, 일본, 버마, 태국, 말라카이 등지의 10여 개국에서 온 신학생들이 이 학교에서 사제수업을 받았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블랑 주교는 신학생 파견을 재개했다. 블랑 주교는 1882년, 1883년, 1884년 3차례에 걸쳐 21명의 신학생을 페낭으로 보내어 사제수업을 하도록 했다. 1887년 서울 용산에 예수성심학교가 설립되자 한국천주교회는 페낭의 신학생들을 본국으로 소환했다. 이 중 12명이 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1884년 열 살에 유학을 떠난 김승연은 1892년 귀국하여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이듬해 삭발례를 받았다. 그러나 신학교에서는 페낭에서 유학한 학생들 중 건강이 나쁘거나 어려서 조선을 떠나 조선인의 관습에 익숙하지 못할 것이 염려되는 학생들은 18개월에서 2년간 본당에 실습 차 파견키로 했다. 이에 김승연은 용평공소를 관할하고 있던 계산본당 김보록 신부에게 가서 지도받고 다시 용산신학교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수문품, 차부제품, 부제품을 차례로 받은 뒤 1900년 김양홍, 김문옥 등과 함께 사제품을 받았다. 그가 공부를 시작한 지 16년만이었다. 사제가 된 뒤 그는 약 6개월간 서울 용산신학교 교수로 있다가 전라도 지역 포교담당으로 임명되었다. 당시에는 신부가 성당마다 파견될 수 없었으므로 한 도시를 거점으로 그 일대의 사목을 담당했다. 김승연 신부는 전라도에서 사목하며 1903년 정읍본당을 세웠다. 1907년에는 자신의 출신지 용평본당 초대주임으로 오게 되었다. 자신이 용평을 떠난 지 23년만이었다.

용평에 부임한 김승연 신부는 사제관이 없어 임시 거처를 회장 집으로 정하고 즉시 성당과 사제관 신축공사에 들어갔다. 그는 자신이 몸소 노동을 하여 교우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고 교우들도 분발케 했다. 이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 김태호 외 4명은 성당건립추진위원회를 만들어 모금을 시작했다. 김태호는 공소로 사용하던 자신의 집을 성당부지로 기증했다. 신자들은 원래 초가였던 김태호의 집을 허물고 청통면 은해사 위에 있던 안능사라는 절 건물을 매입하여 옮겨 와 기와성당을 지었다. 성당은 1904년 말경 완공되었다. 1912년 드망즈 주교는 용평성당을 축성하며 ‘성당은 간소하지만, 아주 어울린다.’고 했다. 본당 주보는 예수성심이었다.

용평본당은 초대주임 시절부터 본당 내에 서당을 개설하여 교리와 한문을 가르치는 등 교육도 수행했다. 김 신부의 부친은 유식했으며  본당의 1대, 2대 회장이 모두 한학자였으므로 이들이 글을 가르쳤다. 100여 호로 이루어진 본당은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육과 노동과 친목의 중심이 되어 평화로운 이상촌이 되었다. 당시 용평은 윗동네는 교우촌이고 아랫동네는 외인이었는데 확실한 차이가 있어, 이는 교우들이 문답 책을 배우며 문맹을 퇴치한 결과라고들 했다. 즉 용평은 김태호에 의해 공소가 세워졌고, 또 페낭에 유학한 지역 출신 신부가 성당을 세웠고, 교우들이 한마음으로 공동체를 이룬 마을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프랑스인 신부들이 징집되자 성직자가 모자라 1915년 김승연 신부는 제주도로 전임되었다. 이때부터 용평본당은 공소와 본당으로 승강을 거듭하다가, 결국 1948년 영천본당 소속 공소가 되었다. 용평공소는 1966년 이래 신녕본당 소속 공소가 되었다가 현재는 화산면에 신축되어 화산공소라 불린다.

 

김승연 신부, 김천황금동성당을 짓다

김승연 신부는 제주도로 전임되었다가 섬의 풍토가 맞지 않아 1916년 전주본당 주임으로 발령받고 전주, 임실, 김제, 정읍 지역 등의 포교를 담당했다. 그리고 1919년부터는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의 경리담당 겸 라틴어 교수가 되어 10년간 신학교에 있었다. 그는 1929년 김천성당 주임으로 발령을 받았는데, 이때 김천성당을 외부 세상에 크게 드러낼 건물로 짓고 미래로 가는 터전을 마련했다. 김진소 신부는 김승연 신부가 김천황금동성당을 세웠다고 소개한 적이 있다. 그러나 김천황금동성당 역사나 성의학원 역사에는 김성학 신부가 이를 세웠다고만 기록되어 있고, 김승연 신부로는 소개되어 있지 않다. 이는 김천황금동성당이 너무나 많은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김천황금동성당은 본래 김천성당으로 김성학(1870-1938) 신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김성학 신부도 페낭 유학생이었다. 김성학 신부는 1898년 경북 가실본당 2대 주임신부로 발령받았다. 그러나 그는 가실이 본당 자리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김천에 성당을 지어야 한다고 뮈텔 주교께 건의했다. 그는 현재의 경북 김천시 황금동에 위치한 자라밭골에 초가 한 채를 매입해 임시성당으로 사용했다. 그러다가 1901년 김천본당이 설정되어 초대 주임이 되었다. 그는 1907년에 성당을 기와집으로 지었다. 그리고 10년 동안 김천지방 선교의 기틀을 다졌다. 1911년에는 대구교구가 설정되면서 김성학 신부는 서울로 돌아갔다. 그리고 김천본당은 2대 김문옥 신부, 3대 이약슬 신부가 사목했다. 특히 이약슬 신부는 성당 신축의 긴급함을 느끼고 불철주야 노력했고, 마침내 교우들도 이에 호응하게 되었다. 그들은 성당신축금을 3천 원이나 모았다.

1929년 김승연 신부가 김천본당 주임신부로 전보되었다. 김승연 신부는 전임 신부의 뜻에 감동하여 남모르게 성전신축 준비를 했다. 그리고 그는 신축금이 5천 원을 넘어서자 총공사비 2만여 원 드는 성당을 신축하기로 했다. 김승연 신부가 건축비를 마련한 일화가 있다. 1932년경 신부의 고향 땅인 영천 지역이 크게 흉년이 들었다. 주민들은 전답을 헐값으로라도 팔아야만 생활을 해 나갈 수 있는 형편이었다. 김승연 신부는 그 딱한 사정을 보고 드망즈 주교께 이러한 참상을 품신하여 재정적 도움을 얻어 수십 두락(斗洛)의 전답을 매입했다. 그런데 이듬해 이 지방은 대풍작을 이루었다. 그러자 주민들은 전 해에 팔았던 농토를 다시 사들이게 되었다. 김 신부는 여기에서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자금을 시작으로 김승연 신부는 김천성당과 벽돌로 된 2층의 학교건물과 유치원 등을 건립했다. 물론 흉년을 만난 주민들을 돕다가 약간의 수익금이 생겼다고는 하지만 성당을 비롯한 학교 등 거대한 공사의 ‘총 5만여 원’에는 김 신부의 절약 생활로 비축한 사재 전부가 들어갔다고 한다.

성당은 1934년 12월 23일 완공되었다. 붉은 벽돌과 슬레이트 지붕을 한 고딕식 건물이었다. 사제관은 한옥이었으나, 네 벽에는 유리미닫이문을 달았다. 1936년 5월 김천성당 축성식은 당시 한국인 사제 15명이 참석하려고 계획했던 대대적인 행사였다. 현존하는 붉은 벽돌 성당은 1930년대 김천에서는 처음 보는 이색적이고 현대적 건물이었다. 더욱이 황금동본당에서는 대희년과 본당설립 100주년을 맞은 2000년에 구성당을 그대로 보전한 채 현대식 새 성전을 지었다. 한편 김천성당은 1958년 평화동본당을 분가하면서 행정구역 명칭을 따라 김천황금동본당으로 바뀌었다. 1901년부터 1958년까지는 김천본당, 이후는 김천황금동본당으로 불리고 있다.

김승연 신부는 이렇게 사제생활 초기에 정읍본당, 이어 고향에 용평본당, 그리고 이제 고딕식 김천본당을 지었다. 즉 순교자의 후손인 그는 신부가 되어 천주교를 지상 위에 드러내는 건물들을 지어 갔다. 순교자의 후손은 결국 사제로, 수도자로 우리 교회사를 빛내고 있다. 이미 박해시대에도 이승훈의 후손인 이재의, 정약종 복자의 아들 정하상도 앵베르 주교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이렇게 순교자들의 신앙은 바로 후손에게 이어져 내려간다. 순교자의 후손을 찾아보는 일은 바로 그들의 신앙을 살피는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