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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가는 성지
진산성지,복자 윤지충(바오로)와 복자 권상연(야고보)


글 박정길(마르코)|형곡성당

한국 천주교 창립 선조들을 한 분씩 만나다 보니 이제야 진산을 찾았으나 창립 선조들과 진산사건은 밀접한 관계가 있어 선조들의 약전을 소개하면서 자주 언급된 곳이기도 하다. 진산사건이 일어난 225년 전에는 진산이 전라북도에 속했으나 몇 차례의 행정 개편을 거쳐 지금은 충청남도로 편입되었다. 하지만 전주교구 관할이던 진산이 대전교구로 편입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걸려 1980년 8월 29일 지리적 여건과 대전에 가까운 생활권, 신자들의 편의와 보다 효율적인 신앙을 고려하여 대전교구로 이관되었다.

 

진산사건과 박해의 발단

진산은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尹持忠, 1759-1791)와 외종사촌인 권상연 야고보(權尙然, 1751-1791)가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다. 윤지충은 총명한데다가 품행이 단정했으며 1783년 봄 진사시험에 합격했다. 이 무렵 고종사촌인 정약종 형제를 통해 천주교에 입문한 후 1787년 인척인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어머니와 동생 지헌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유항검과 자주 왕래하며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했다. 1790년 말 북경 교구장 구베아 주교가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은 권상연과 함께 신주를 불사른다. 당시는 집안에서 일어난 일이니 외부인이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듬해 1791년 음력 5월, 윤지충의 어머니(권씨)가 사망하자 유언에 따라 유교식 제사를 폐지하고 천주교의 예절에 따라 정성껏 장례를 치렀는데 이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나가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고 말았다. 이를 보다 못한 유림과 친척들이 들고 일어나 무군무부(無君無父)로 고발했다.

 

친인척도 아니면서 고발에 발 벗고 나선 배교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홍낙안이다. 그는 공서파(功西派, 천주교를 배척하고 공격하는 세력)의 선봉에 서서 신주를 불사른 윤지충과 권상연을 고발하는 장서(長書)를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에게 올리는 한편, 진산 군수 신사원(申史源)에게 사건의 전모를 수사하여 윤지충과 권상연을 처형토록 부추기고 승정원(承政院)에 권일신을 사학(邪學)의 교주라고 고발했다. 또한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가져온 서학서(西學書)로 반촌(泮村)에서 강습(講習)한 사실을 고하자 강습에 연루되었던 이승훈, 최필공, 이존창 등이 줄줄이 체포되었다. 진산사건은 백일하에 드러난 만큼 장서를 쓸 수도 있으나 반촌에서 강습한 것은 어떻게 알아냈을까? 홍낙안은 천주교 신자 색출에 혈안이 되어 첩자를 심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마치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처럼 기회를 노렸을 것이다.

 

체포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윤지충과 권상연은 몸을 숨겼다. 윤지충, 권상연 두 분의 행적에 시선이 집중되고 화두가 될 수밖에 없으나 필자는 이 사건의 계기가 된 윤지충의 어머니 권씨를 먼저 조명해 보고 싶었다. 왜냐하면 진산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위대한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윤지충은 독단으로 위패를 불사르지 않고 동생 지헌이와 노모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제사폐지와 신주를 없애는 방안을 자연스럽게 설명한 후 동의를 얻었을 것이다. 어쩌면 권씨는 아들이 신주를 불사르는 광경을 직접 봤을 수도 있다. 권씨가 “내가 죽으면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마라.”고 유언을 한 것을 보면 이런 가정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의 어머니는 어려운 결정을 하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며 아들이 유림과 이웃들로부터 받게 될 원성과 고초를 모를 리 없다. 그러나 하느님을 선택한 권씨의 영웅적인 결심이 마침내 자식들을 복자로 이끌었다. 윤지충은 천주교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랐고 어머니의 유언대로 해드렸으니 한 점의 여한도 없었을 것이며, 권상연도 고모의 유언을 지켰으니 떳떳했을 것이다. 진산 군수가 그들을 대신하여 숙부를 감금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윤지충과 권상연은 곧장 진산 관아를 찾아가 자수한다. 관아에서 진산 군수 신사원(申史源)의 회유와 논쟁이 벌어졌는데 윤지충의 간단명료한 대답이 우리를 감동시킨다. “천주교 교우가 부모에게 효도를 드리지 않는다는 말은 잘못 아신 겁니다. 십계명 중 넷째 계명에 부모를 공경하라 하셨고, 나는 그 계명을 지켰습니다. 또 죽은 것은 잠을 자는 것과 같다 말할 수 있는데 주무시는 부모에게 음식을 드리는 자식이 어디 있습니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내 몸은 부모한테서 받았는데 나에게 피와 살과 뼈를 물려주신 부모를 어찌 하찮은 나무토막으로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제사는 양반만 지내지 상민은 지내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가 법을 어겼다면 양반의 법을 어겼을 뿐입니다.”

 

1791년 10월 28일 사교이단(邪敎異端)으로 전라감영에 이송되었으나 고문과 감사의 훈유에도 굴하지 않았다. “만약에 제가 살아서건 죽어서건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배반하게 된다면 제가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증언하며 권상연과 함께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당시 전라 감사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 “윤지충과 권상연은 유혈이 낭자하면서도 신음 한 마디 없었습니다. 그들은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다고 하면서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며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였습니다.”라고 쓰여있다. 이에 조정에서는 불효, 불충, 악덕 죄로 참수하되 사학 천주교를 철저히 엄계(嚴戒)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1791년(정조 15년) 12월 8일(음 11월 13일) 윤지충은 33세로, 권상연은 41세로 “예수 마리아”를 외치며 참수되었다. 십 년이 흐른 뒤 1801년 신유박해 때 사제영입을 위해 힘쓰던 그의 동생 윤지헌(프란치스코)도 전주 풍남문 밖에서 참수되어 형님과 더불어 124위 복자품에 올랐다.

 

성품이 온화하고 탕평책(蕩平策; 당쟁의 폐해를 없애고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여 당파 간의 정치 세력에 균형을 잡는 정책)을 견지해 온 정조(正祖)는 윤지충과 권상연의 사형집행중지를 명했으나 이미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것이 선례가 되면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할 수밖에 없으므로 천주교를 믿지 말라는 포고문을 전국에 붙이도록 명했다. 이로 인해 천주교를 모르던 백성들도 천주교가 어떤 종교인지 관심을 두는 계기가 된다. 윤지충과 권상연이 참수되자 함께 체포됐던 교우들이 배교로 하나둘 석방되었고 홍낙안의 밀고로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지킨 권일신 선조는 이듬해 봄 유배를 가다가 깊은 상처로 인해 객사(客死)하고 만다. 배교와 유배로 신해박해는 일단 마무리되었으나 서학서의 반입이 엄격히 금지되고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저버린 강상죄(綱常罪)로 진산 지역 전체가 연좌의 벌을 받아 5년간 군(郡)에서 현(縣)으로 강등되었다.

 

언행일치(言行一致)의 신앙

복자 윤지충과 복자 권상연의 믿음을 보면 청정지역의 1급수와 한 방울의 물도 남기지 않고 빨아들이는 흡착포가 연상된다. 윤지충이 읽은 책은 교리서와 서학서가 전부였을 것이며 그중에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많았을 것이다. 양반들은 평판이 두려워 교회를 떠나는 마당에 윤지충은 배교의 물살을 거슬러 올라 구베아 주교가 명한 제사 금지령을 그대로 지켜 양반 신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처럼 윤지충과 권상연은 듣고 배운 것을 그대로 실천했다. 현세를 사는 우리는 어떤가? 필자를 포함한 우리는 많이 듣고 배워 윤지충과 권상연보다 훨씬 더 아는 것이 많다. 이렇게 머리에 든 것이 많은데 휴대폰 문자로 묵상 글과 좋은 글이 또다시 들어온다. 우리도 1급수였는데 언제부턴가 머리의 용량이 초과하면서 녹조 현상이 생긴 탓인지, 아니면 너무 좋은 것을 너무 많이 들어 무감각해진 탓인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정리가 안 될 때도 있다 보니 정작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대단히 굼뜨다.

 

휴대폰에 불필요한 것을 삭제하듯이 머릿속에 쓸데없는 것을 한순간에 지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복자 윤지충과 복자 권상연, 우리는 이 두 분에 비하면 참으로 행복하다. 우리는 이분들이 꿈에서 그리던 성체를 마음만 먹으면 매일 영할 수 있고, 또 얼마나 많은 성사 안에 살고 있는가? 생각해 보면 너무 행복에 겨워 눈물이 날 지경이지만 생전에 신부님 얼굴 한 번 봤으면, 그래서 미사참례 한번 하는 것이 소원이었던 선조들과 옥에 갇힌 채 배가 너무 고파 바지저고리에 솜을 뜯어 씹으며 신앙을 지켰던 선조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고 미안한 마음이 자꾸 든다. 시대는 바뀌었어도 영생의 길은 같기에, 풍요로운 성사 안에 살고 있는 우리는 하느님 보시기에 더 잘 살아야 할 의무가 분명 있다. 그러려면 불순물을 걸러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 많이 배우고 많이 알고 있는 만큼 성덕으로 나가지 못하고 오히려 배운 것이 교만의 요소가 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서 신앙 선조들의 단순함을 배우고 용덕을 배우고, 조금 불편하게 사는 것도 배울 필요가 있다. 몸은 늘 편한 쪽으로 기울기 마련이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

 

* 진산성지 : 충남 금산군 진산면 실학로 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