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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아동복지의 선구자 옥잉애 여사 영면에 들다
사랑과 봉사, 섬김의 삶을 보여주다


취재|김선자(수산나) 기자

 아동복지를 위해 평생 헌신한 옥잉애(잉애, 엘레른캄프 잉게보그, Ellernkamp Ingeborg) 여사가 지난 6월 25일(토) 오전 3시 25분 자택에서 선종했다.(향년 84세) 장례미사는 27일(월) 오전 9시 복자성당에서 교구장 조환길(타대오) 대주교의 주례로 전임 교구장 이문희(바울로) 대주교, 원로사제 이성우(아킬로) 신부와 교구사제단, 수도자,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봉헌됐다. 이날 미사에는 살아생전 고인과 인연을 맺은 은인, 지인 등이 함께해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1932년 독일 리드링언에서 태어난 옥잉애 여사는 독일 카리타스 사회복지대학을 졸업하고 유치원 교사로 일하다,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던 친구 하 마리아 여사의 추천으로 1963년 대구 땅을 밟았다. 당시 대구대교구장 서정길(요한) 대주교는 평신도 사도직의 활성화를 위해 힘쓰고 있었다. 대구에 온 옥잉애 여사는 대구SOS어린이마을의 소년기숙사에서 고아들을 돌봤다. 그러던 중 택시 기사가 자녀를 맡길 곳이 없어 택시에 태워 함께 다니는 것을 보고 저소득층 가정과 맞벌이 부부 자녀들을 위해 1965년 대구·경북 최초의 가톨릭 소화보유원(小花保幼院,, 현 보육원)을 열었다. 이 가톨릭 소화보유원은 1982년 가톨릭 소화새마을유아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1990년 현재의 가톨릭 소화어린이집으로 변경되어 각각 대명동과 상인동에서 운영되고 있다. 또한 1992년 독일의 상황중심교육을 도입해 어린이 교육에 관한 교사들의 질적향상을 꾀했다. 1989년부터 1996년까지 한국가톨릭아동복지협의회 회장을 역임한 옥잉애 여사는 2008년까지 대구가톨릭아동복지협의회 회장을 지냈으며 35년간 아동복지에 헌신한 공로로 대구가톨릭사회복지대상, 문교부, 내무부, 보건복지부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 이밖에도 대구대교구와 대구광역시로부터 다수의 공로패와 감사패를 수상한 옥잉애 여사는 어린이뿐만 아니라 가난한 노동자 등 소외된 계층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힘썼다.

 

조환길 대주교는 강론을 통해 “53년 전 당신 나라 독일을 떠나서 가난했던 우리나라에 오셔서 젊음을 다 바치시고 떠나신 옥잉애 여사의 삶을 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무엇인지, 우리가 되새겨야 할 점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며 “아동복지사업의 선구자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늘 조용하고 겸손한 삶을 사셨던 옥잉애 여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섬김과 봉사, 헌신의 삶을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고 가셨다.”고 애도했다.

미사 후에는 이문희 대주교의 주례로 고별식이 거행됐으며 고인의 약력 소개와 유서의 한 부분이 대독된 가운데 모든 이가 고인을 추모했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고인의 고해사제로, 친구로 함께 한 이성우 신부는 “어린이뿐만 아니라 노동자, 가정 등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한 옥잉애 여사는 종교적으로 영적으로 대화하면서 제게 늘 감명을 주셨던 분”이라며 “한 번 인연을 맺으면 끝까지 도움을 주셨고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어 감명을 주신 분”이라고 회고했다.

옥잉애 여사는 2000년 은퇴 후 본당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유학준비생과 연수생에게 독일어를 가르치며 하느님 안에서 이웃사랑을 실천했다. 대덕성당에서 구역장과 반장으로 인연을 맺고 복자성당에서 다시 이웃사촌으로 옥잉애 여사를 만나게 됐다는 김 스텔라 씨는 “선량하시고 한국 사람보다 더 애국자이셨으며 종교를 떠나 모두가 아끼고 사랑하셨던 분”이라며 “원장님은 하느님 곁으로 가셨지만 그분이 보여 주신 삶은 제 마음 속에 남아 그분처럼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추억했다.

고별식을 마친 고인의 유해는 교구사제단과 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군위묘원에서 영원한 천상 안식에 들었다.

 

한센인들을 위해 평생 헌신하고 있는 엠마 프라이징거 여사는 친구인 옥잉애 여사에 대해 “독일어를 하는 사람이 없었던 그 시절 한 달에 한 번 고인과 만나 하루 종일 모국어로 얘기하고 놀이도 하며 우정을 키웠다.”면서 “고인은 착실한 사람으로 믿음 안에서 살았고 돌아가실 때도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면서 믿음 안에서 평화롭게 하느님께 가셨다.”고 말했다. 30년 전 가톨릭 소화어린이집에서 1년간 일하게 되면서 옥잉애 여사의 영향으로 세례를 받고 대모와 대녀로 연을 맺으며 신앙인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박 도미니카(소화어린이집 원장) 씨는 “하느님과 교회가 그분 삶의 중심에 있었고 아이들의 마음과 부모의 마음을 대변해 주신 원장님은 이성적이며 분명하시고 도움이 필요한 곳은 어디든 찾아 가셨다.”며 “소박하시며 타인의 시간을 함부로 뺏지 않으셨고 교사들의 품위를 지켜주셨는데 교사로 사는 데 많은 영향을 받았다.”면서 떠나는 날까지도 한 치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애도했다.

 

평생 어린이들과 함께하며 하느님 안에서 사랑과 봉사, 섬김의 자세로 이웃사랑을 보여준 옥잉애 여사는 그동안 받은 은혜에 감사와 미안한 마음을 유서로 전했다. “모든 이에게 감사합니다. 나는 한국에서 보람있게 살았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잘못했다면 용서를 빕니다. 미안합니다. 사과드립니다. 이 다음에 모두들 천국에서 하느님 앞에서 다시 만납시다. 내 불쌍한 영혼을 위하여 기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