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함께 가는 성지
어농성지, 한국천주교회 최초 사제영입 밀사(보호)의 주역 3인


글 박정길(마르코)|형곡성당

   

1783년 이승훈(베드로)이 베이징 북당에 가서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온 후 천진암 강학회원들과 입교자들에게 세례를 주면서 모두 신앙심이 부풀었으나 가장 큰 문제는 ‘사제(司祭)의 부재(不在)’였다. 그래서 1786년 이승훈은 권일신, 이존창, 유항검 등과 의논한 끝에 북당에서 본 것을 모방하여 주교와 사제를 뽑아 견진성사와 고해성사, 미사집전 등을 약 2년간 열심히 했다. 그러던 중 신품성사의 의문을 발견한 유항검의 제안으로 밀사를 북경교구에 보내어 신품성사에 관해 자세히 알아오도록 계획을 세웠는데, 누구를 보낼까 고심하다가 마침 권철신의 제자로 성격이 온순하며 입이 무거운 윤유일을 지목했고 그도 이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는 아직 신입 교우였으나 신심만큼은 동료들이 탄복할 정도로 깊었다.

 

사제영입의 밀사 윤유일(바오로)과 지황(사바)

1789년 10월 조선을 떠난 윤유일 밀사는 천한 상인의 신분으로 행세하며 깊숙이 숨겨온 서한을 북경 주교에게 전했다. 그리고 이듬해 초, 북당에 있던 라자로 선교회 로오 신부로부터 조건부 세례를 받고 주교로부터 견진성사도 받는다. 그가 돌아와 가성직(假聖職) 제도와 조상 제사를 금하라는 북경 교구장 구베아(포르투갈 출생) 주교의 명을 전하자 다수의 양반은 제사 금지를 받아들일 수 없어 교회를 떠났다. 파란만장했던 시대의 굵직한 사건을 꼽자면 1785년에는 창립 주역 이벽(세례자 요한) 선조가 가문처형으로 요절했고, 1786년 김범우(토마스)가 유배지에서 숨을 거두었으며, 1791년 제사 거부로 진산에 살던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이 순교했고, 1792년은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고문의 상처가 깊어 유배를 가다가 객사한 해였다. 진산사건으로 한국교회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는데 제사 폐지에 따른 큰 요인으로 백 년 동안 박해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계기가 된 것이다.

1790년 밀사 윤유일 바오로(尹有一, 1760~1795년)는 다시 베이징에 가서 한국교회에 사제를 보내달라는 청원서를 구베아 주교에게 전하고 돌아왔다. 구베아 주교는 1791년 마카오 출생 레메디오스 신부를 파견하려고 약속한 장소로 보냈으나 윤유일은 뜻밖에 진산사건(신해박해)이 터져 검문이 강화되자 신부를 모시러 나갈 입장이 못 되었다. 레메디오스 신부는 이런 줄도 모르고 2년 동안 연변에서 머물다가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다행스러운 것은 구베아 주교가 한국교회의 어려운 상황을 세계교회에 알렸는데 비오 6세 교황이 이 사실에 감동하여 한국교회를 축복하고 구베아 주교에게 적극적으로 도와주라고 당부했다는 점이다.

제사 문제로 유식하고 부유한 양반들이 떠나고 무지한 백성들만 남게 되자 경제적으로 어려워졌고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사제영입의 절실함은 변함이 없었다. 실정이 어렵다고 계속 미룰 수 없어 논의를 거듭한 끝에 윤유일 바오로와 지황 사바(池璜, 1767~1795년)는 신부를 모셔오는 일에, 역관의 아들인 최인길 마티아(崔仁吉, 1765~1795년)는 신부의 거처를 마련하고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우리는 거리의 개념 없이 ‘윤유일이 북경을 다녀왔구나.’ 하고 막연히 생각할 수 있기에 백과(百科)의 안내를 받아 227년 전으로 잠시 되돌아 가보자.

1335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세 가지 기본정책을 세우는데 농본, 숭유배물, 사대교린(事大交隣)이었고, 사대교린 정책으로 조선정부는 북경에 파견하는 외교사절단 부연사(赴燕使)를 만들어 정사, 부사, 서장관 3인의 사신과 수행원들을 따라가게 했는데 부연사의 종류는 동지사, 정조사를 비롯하여 정기 사행과 비정기 사행이 있었다. 수행 인원은 600~150명 정도로 45일이 걸렸으며, 혹한과 북만주 벌판의 강풍으로 얼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북경에서 40~60일 묵은 다음 2월 중에 떠나서 3월 말, 4월 초에 돌아오는 것이 통례였다고 하는데 이렇게 초봄에 귀국하기까지, 약 5개월이 걸리는 멀고 긴 험로를 그것도 세 번이나 오갔으니 밀사 윤유일이 사제영입을 위해 한국교회에 바친 업적과 희생은 참으로 지대하다.

1794년 3월 마침내 윤유일은 지황과 함께 북경에 도착하여 구베아 주교를 만났다. 구베아 주교는 레메디오스 신부가 조선 입국에 실패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후임 사제를 우리와 가장 많이 닮은 중국인 신부로 뽑았는데 이 분이 주문모(야고보) 신부였다. 일행은 압록강 물이 얼 때까지 10개월을 기다렸다가 변장한 주문모 신부를 모시고 한밤중에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서울 북촌(北村, 지금의 계동)에 무사히 도착했다.

 

신앙 선조들의 고해성사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복음이 시작된 해가 1784년 명례방 집회였으니 한국교회 설립 10년이 되는 해에 첫 사제가 조선에 들어온 것이다. 주문모 신부는 최인길(마티아) 집에 머물며 비밀리에 사목을 시작했는데 교우들이 제일 바라는 것은 고해성사였다. 그러나 주 신부는 짧은 인사말 정도만 겨우 할 뿐 한국말을 못했다. 신자 중에는 신부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수십 리 길을 걷느라 굶고 잠도 못 잔 채 찾아온 교우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고해를 했으나 보속을 주는 것이 문제였다. 소통의 한계로 고해자들에게 일일이 보속 주기가 어렵게 되자 할 수 없이 종아리를 때리는 것으로 보속을 대신했다고 한다. 남녀가 유별한 시대에 처음 보는 신부 앞에서 부끄러운 종아리를 걷고 매를 맞는 여교우들의 모습도 애잔하지만, 한국말을 몰라 보속으로 매를 칠 수밖에 없었던 사제의 심정인들 오죽했으랴…. 교우들은 매 맞는 것이 아파서가 아니라 감격해서 울고, 사제는 이런 처지가 너무 안타까워 울었다. 이렇게 감동적인 성사가 이루어지던 어느 날 주 신부의 일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었다. “나는 피로에 지쳐 견딜 수 없었다. 그런데 열의에 찬 고해자가 또 왔다. 내가 어찌 그에게 성사를 주지 않으리오. 그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난 후 나는 조금 전의 피로가 씻은 듯 사라진 것을 느꼈다.”

1795년 4월 5일 주 신부의 집전으로 조선 땅에서 최초로 부활절 미사가 봉헌되었다. 이때 사용한 포도주는 1793년 윤유일과 지황이 북경에 갔을 때 구베아 주교가 포도나무 묘목을 선물로 주면서 재배방법과 수확, 포도주 담그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지황이 포도나무를 잘 가꾸어 그 나무에서 수확한 것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보호한 최인길(마티아)

표면적으로는 평정했으나 천주교 신자들은 감시의 대상이었다. 제사 문제로 냉담했던 한영익(韓永益)이 주 신부를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그가 주 신부를 의금부에 밀고한 사실을 알아채고 최인길은 믿을 만한 교우를 시켜 주 신부를 여회장 강완숙(골롬바)의 집으로 신속히 피신시키는 한편,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자주 연습한 기량으로 신속히 주 신부의 사제복으로 바꿔 입었다. 포졸들이 들이닥치자 역관의 아들인 최인길은 주 신부로 행세하며 시간을 벌기 위해 유창하게 중국어로 술수를 쓰지만 얼마 못 가 탄로 나고 말았다. 포졸들이 혈안이 되어 다시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주 신부의 행방을 뒤쫓았으나 찾지 못했다. 결국 주 신부의 입국 경위가 드러나고 신부의 잠입을 도운 윤유일과 지황도 체포되었다. 포도청에 이송되어 세 사람은 혹독한 형벌을 받았으나 주문모 신부의 행방은 일절 발설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형벌이 참혹해지고 주먹질과 매가 난폭해졌다. 그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폭행을 당하면서도 천상적 기쁨으로 얼굴에 빛이 나자 박해자들은 더는 방법이 없음을 알고 두려움과 화가 사그라질 때까지 무자비하게 때리고 또 때렸다.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 한국 최초 사제영입을 위해 투신해 온 윤유일은 35세로, 지황은 28세로, 주 신부의 은신처를 만들어 온몸으로 보호했던 최인길은 30세로 감옥에서 순교했다. 박해자들은 은밀히 의논한 끝에 한밤중에 시신을 살곶이 다리(현 한양대학교 동쪽) 부근의 강물에 돌을 매달아 던져버렸다. 그래서 한국 교회사에 이름과 세례명은 길이 남지만 시신 수습이 안 된 다수의 순교자처럼 윤유일과 지황, 최인길의 묘는 없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어농성지에 3인의 의묘(擬墓)와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주문모 신부, 윤유일의 일가족 묘를 비롯하여 14명을 현양하고 있어 위안이 된다. 세 분이 순교한 이후, 윤유일 밀사 후예로 선발된 밀사 황심(토마스)이 구베아 주교에게 순교 당시의 상황을 보고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공경하느냐?’는 질문에 용감히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또 그리스도를 모독하라고 하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참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기보다는 차라리 천 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단언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한 사람이 순교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줄 아는데 아니다. 순교는 많은 파장과 파문을 일으킨다. 나로 인해 하루아침에 집안이 몰락하고 사랑하는 가족이 불이익을 당하거나 연좌제로 노비가 되어 유배를 가기도 한다. 순교자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인데 어찌 애착과 두려움이 없었을까? 이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잔머리를 굴리거나 타협하지 않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그 길을 당당히 걸어간 순교자들을 보면 부럽다. 그분들의 용덕이 참으로 부럽다. 윤유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 윤장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양근에서 체포되어 신안 앞바다의 임자도(荏子島)로, 그의 숙부인 윤현은 강진으로 유배되었고, 또 다른 숙부인 윤관수는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이처럼 윤유일과 그 일가족은 모두 신앙을 증거하다가 순교했는데 그의 동생 윤유오(야고보)와 윤유일의 사촌 누이동생이자 동정녀로 살았던 윤점혜(아가타)는 양근에서, 윤점혜의 동생 윤운혜(루치아)는 서소문 밖에서, 윤운혜의 남편 정광수(바르나바)는 여주에서 각각 순교했다. 이분들은 모두 윤유일(바오로), 지황(사바), 최인길(마티아)과 함께 2014년 8월 16일 광화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어 복자품에 올랐다.

지면상 윤유일의 나무에 가려 복자 지황과 복자 최인길을 제대로 언급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두 분의 숨은 희생도 결코 빼놓을 수 없기에 기회가 되면 다시 만났으면 한다.

 

* 어농성지 :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어농로 62번길 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