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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 함께여서 행복하여라 - 제9화
가출소녀의 고향에 따라가니 웬 수라상이


글 양 수산나|대봉성당

 

서정길 대주교님께서는 평신도 사도직을 크게 활성화 시킨 분일 뿐만 아니라 가톨릭의 사회사업을 드러나게 발전시킨 분이다.

그분이 초대한 모든 외국인 평신도 가운데(남자들도 있었지만 요리를 잘 못해서 일찍 떠났다!) 나를 포함한 우리 세 사람은 80대 노인들로, 한 사람은 간호사로서 한센인 환자들을 위한 봉사로 잘 알려진 엠마 프라이징거 씨이고, 다른 한 사람은 가난한 맞벌이 부부들을 위한 어린이 집을 시작한 옥잉애 씨이다.(옥잉애 씨는 얼마 전 6월 25일 하느님 곁으로 떠났다.)

기술학원 이야기를 계속하겠다. 구두닦이 소년들의 경우처럼 새로운 가출소녀들의 집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가톨릭 학생회와 젊은 의사들이 무료로 도와주었고 베네딕도회 수녀님들 - 파티마병원뿐 아니라 삼덕본당에서 일한 수녀님들 - 이 도와 주었다. 수녀님들은 기술학원에 와서 예비신자 교리를 해주셨다. 학원 아이들이 수녀님들의 가르침을 받는 특권을 누리는 게 중요하기에 우리 스스로 교리를 가르친 적은 없었다.

 가출한 아이들이 가족과 다시 만나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충청도에서 온 계선이는 전쟁 후 한 번도 집에 간 적이 없어서 용기가 필요했다. 옛날 책에서 다시 인용한다. “마을에 돌아갔을 때 오빠가 왔다가 주소를 남기지 않고 떠나 버렸다는 것을 알고 그 아이는 자신의 연락처를 남겼다. … 몇 달이 지난 후 새벽 5시 30분에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대문을 열어보니 계선이와 똑 닮은 남자가 서 있었다. 왜 왔는지 물어 볼 필요도 없었다.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며 뛰쳐 나가는 계선이를 보며 우리 모두는 눈물을 찔끔거렸다.” 계선이는 어머니와 남동생을 만나 뿌리를 찾았다.

 

많은 아이들이 집에 갈 때 함께 가주기를 바랐다. 직원 가운데 내가 외국인으로서 부모들이 이웃에게 가출한 딸이 내내 무사했다는 안심을 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다. 양재나 미용을 외국인 여자의 도움으로 배우고 있다는 것을 여러 마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던 것이다. 적어도 몇 달 아니면 몇 년 동안 어떻게 집을 나가 살았는지 가족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나의 동행이 필요했다.

강원도, 전라도, 제주도…. 한국의 여러 곳을 찾아다녔다. 그 당시 시골 가는 기차는 가축을 싣는 칸에도 사람을 태워주었고 자리가 없을 때는 신문지를 깔고 바닥에 앉기도 했다. 장거리 여행 이야기를 하기 전 대구 가까이 있는 집 방문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 아버지는 벌써 집을 비우셨다. 방이 하나뿐이어서 어머니와 다른 동생들과 우리 모두가 끼어 자야 했기 때문이다. 한겨울 추운 방에 우리가 모두 눕자 기술학원의 ‘동생’(그 가정의 ‘언니’)이 두 살된 아기를 팔에 안고 왔다. “언니!” 그 아이가 귓속말을 했다. “‘유담뿌’ 1)가 없어요. 미안합니다. 아기를 안고 자면 따뜻할 겁니다.” 물론 나는 아기를 깨울까봐 잠을 못 잤지만 그 아이의 배려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대체로 여행은 시간이 많이 걸렸다. 강원도 어느 마을은 이틀 만에 도착했다. 첫 날은 제일 가까운 본당의 친절한 아일랜드 골롬반 외방선교회 신부님들이 재워 주었고 다음날 아침 젊은 신부님이 자동차로 우리를 데려다 주기로 했다. 얼마 후 도착하기 전 차가 언덕 위 진흙에 깊이 빠져 버렸다. 신부님도 차를 버리고 우리와 함께 터벅터벅 걸었다. 우리가 도착한다는 소식을 받은 가족들이 기뻐서 굉장한 환영 점심을 차려 놓았다. 그들은 내 이야기를 믿고 기술을 계속 배울 수 있도록 일주일 후 그 아이를 다시 보내 주기로 했다.

 또 하나 생각나는 일은 그 젊은 아일랜드 신부님이 힘들게 언덕을 올라오셨는데 음식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가정을 방문할 때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규칙 때문이었다! 참 마음이 안 됐지만 그분의 영웅적인 순명 정신에 깊은 존경심이 일어났다.

 또 하나의 감동적인 가족 재회 이야기는 명랑한 제주도 아가씨에 관한 것이다. 혼자 사시는 어머니가 너무나 가난해서 이모가 이 조카를 육지에 데려왔다. 하지만 육지에 도착하자 이모는 이 아이를 잘 보호하지 않았다. 이 마음씨 따뜻한 아이는 결국 우리 집에 와서 세례를 받았다. 이 아이는 집 주소도 전화번호도 몰라서 내가 제주도 집을 찾아가는데 동행하기로 했다. 부산에서 제주도까지 배를 탔다. 배가 작아서 궂은 날씨에 많이 흔들렸다. 우리는 여러 시간 계속 구토를 하면서 누워 있었다. 내가 누운 맞은편에 스님 한 분이 누워계셨는데 우리 둘은 누가 더 잘하나 경쟁이라도 하듯이 벌떡벌떡 일어나 그 공동의 구토 통을 비우곤 했다. 석가모니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우리는 결국 비겼다!

 우리 목적지 가까이 있는 친절한 본당 신부님이 하룻밤 재워주고 아침에 버스를 타도록 주선해 주었다. 그 아이 어머니 집에 도착한 것은 한낮이었다. 내가 대문에서 기다리는데 그 아이를 몇 해 만에 본 어머니가 기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다음에 나를 인사시켰다. 그러나 부엌에 보리쌀 조금밖에는 아무 것도 먹을 게 없다고 했다. 나는 제주도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2시까지 점심을 기다려 달라고 했다. 물론 나는 “그러겠다.”고 하고 모녀를 따라 해변으로 갔다. 나는 학교 다닐 때 수영을 아주 잘해서 자신있게 물에 들어갔지만 이 모녀 해녀에게 깨끗이 졌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나는 바다에서 겨우 그들의 반 정도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2시 점심은? 우리가 수라상을 받았다 해도 될 정도였다! 어느 고급 호텔의 음식도 이 어머니의 해물 수라상과 견줄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아이가 엄마와 2~3주 지내게 하고 학원에 돌아와 행복한 보고를 했다. 그리고 학원을 도와 준 분들에게도. 왜냐하면 소년의 집과 기술학원을 도와준 1960년대 초 많은 학생들의 노고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그 후 그들은 저명한 인사들이 되어서도 여전히 우리를 기억해 주었다. 그래서 신부님들과 수녀님들, 의사들, 학생들, 직원들, 요리사들(주방책임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질병, 나쁜 습관과 때로는 후퇴해도 우리가 다시 받아들여 두 번째로 성공을 거둔 젊은 아가씨들은 우리와 함께 모두 사랑을 쏟아 부어주는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로운 은총의 힘을 목격했다.

 다음 달엔 언덕 위 농장과 젖소, 그리고 신학생들에게 근대철학을 가르친 이야기! 그리고 다른 새로운 일, 성모님 발치 루르드에서 일어난 흥미로운 현장에 대구가 어떤 도움을 줬는지 보자.

 

1) 일본 사람이 다다미방에 잘 때 뜨거운 물을 넣어서 안고 자는 고무주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