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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이야기
우리학교


글 박경현(프란치스코)|포항 오천고등학교 교장, 진량성당

천주교대구대교구는 초등학교 1개, 중학교 8개, 고등학교 7개, 그리고 대학교 1개 등 모두 17개의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가톨릭 재단에서 설립, 운영하는 성립학교(聖立學校)의 설립은 박해를 피해 곳곳에 형성된 신자촌에 공소나 성당의 신축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운영된 서당형태의 교육기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대구본당 주임 사제로 임명된 김보록(로베르) 신부님이 1898년 대구 계산성당에 ‘해성재’로 명명한 건물을 지어 한문서당을 개설했고 그 후 1908년 해성재 서당을 학교제도로 변경했으니 지금의 효성초등학교의 토대가 되었고, 해방 후 효성중, 효성여고, 대건중·고등학교 설립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1901년 김천본당 신부님인 김성학 신부님에 의해 성의학교가 개교하여 현재의 성의중·고등학교, 성의여중·고등학교로 성장했다. 경주본당의 주임신부님으로 임명된 서울교구출신 신원식(루카) 신부님에 의해 1949년 학원형태의 근화여자중학교가 태동하게 되어 지금의 근화여중·고등학교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하양성당 주임 신부님이었던 이임춘(펠릭스) 신부님에 의해 1966년 무학중학교가 개교하면서 무학중·고등학교가 뿌리 내렸다.

한편 1911년 대구대목구가 설정되고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안세화(드망즈) 주교님의 노력으로 1914년 축성된 유스티노신학교와 1952년 교구에서 설립한 효성여자 초급대학으로 출발한 효성여자대학교가 1994년 통합하여 오늘의 대구가톨릭대학교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대안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정홍규(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이 2003년 오산자연학교를 개교하여 지금의 영천 산자연중학교가 된 것이다.(참고서적 : 김진식 저 『복음화를 위한 사업』) 신학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가톨릭계 학교는 교구차원이 아니라 신부님들 개개인의 의지에 의해서 설립, 운영되었다.

 

6.25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55년 당시 하양본당 주임으로 부임해 오신 이임춘 신부님은 “우선 살려놓고, 그 다음에 선교하자.”라고 외치며 가난과 무지를 몰아내는 일을 교회가 해야 할 현실적인 과제로 생각했다. 그래서 가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육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본이 부족하여 유럽의 여러 가톨릭교구와 구호단체에 편지를 보내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이처럼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들은 대부분 성직자들의 헌신과 세상의 많은 은인들의 봉헌의 결실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학교들은 사회와 교회에 대한 보답으로 올바른 교육에 대한 책무를 느끼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평준화 교육정책이 시작되면서 사립학교들은 공교육의 일부로 취급되어 사학의 건학이념을 구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제약이 많다. 모든 학교가 입시와 취업이라는 무한경쟁의 체제에 매몰되어 중등학교와 대학의 서열화 정책에 따라 끝없는 생존경쟁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대도시에 인접한 하양의 무학고등학교에 근무하면서 지역의 우수한 학생들의 특목고나 역외 학교로의 유출을 막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진학 교육에 전념하고 있을 때 “그것이 교회학교로서 자랑할 일입니까?”라던 어느 신부님의 지적이 아직도 귓가를 맴돈다. 교회학교는 오늘도 추구해야 할 가치와 냉혹한 현실 사이에서 끝없는 갈등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2012년이 저물어 갈 즈음 소문귀가 어두운 나에게까지 이야기가 들려온 것을 보면 일이 제법 진척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우리 교구가 오천중·고등학교를 인수하기로 했으며 이 학교가 재단의 갈등으로 매우 복잡한 상태에 있다는 것과 학교 인수에 관하여 법인에서도 이견이 있어 제법 기간이 걸릴 것이라는 내용도 곁들였다. 하지만 불과 한두 달이 지나자 학교 인수가 기정사실이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2013년 8월 30일 대주교님이 재단이사장에 취임하면서 오천중·고등학교가 우리 교구가 운영하는 학교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우리학교를 교구의 학교로 편입한 사례는 앞서 이야기한 성립학교들과 비교되는 하나의 놀라운 사건으로 여겨질 만큼 의외의 일이었다. 거기에는 지금은 모두 알 수 없지만 특별한 하느님의 뜻이 있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3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비록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오천중·고등학교는 가톨릭재단이 들어오면서 너무 좋아졌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가톨릭’이라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이제 우리학교는 소용돌이와 같은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들을 서서히 걷어내고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가톨릭’이라는 말이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번져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학교의 정상화를 넘어 가톨릭 학교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을 생각할 시점이 되었다고 판단되어 2016년도에 들어오면서 교내 경당과 교목실을 갖추기로 했다. 우리 법인의 학교들은 교내의 기존 시설을 리모델링하여 경당과 교목실로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학교는 가톨릭에 익숙하지 못한 구성원들의 정서를 고려하여 법인에서 경당과 교목실 신축을 위하여 4억 원을 지원하기로 파격적인 결정을 했다. 그러나 교내의 여건을 생각하면 규모도 좀 더 크게 해야 하고 각종 기자재를 갖추려면 부족한 예산이었다. 그래서 부족분은 모금으로 충당하자는 조심스러운 제안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학교에 대하여 자세히 알지도 못하는 교우들의 희사를 기대한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잘 알고 있는 일이다. 4대리구의 몇몇 성당으로 나가 모금을 하기로 결정하고 나서는 혹시라도 신자들로부터 외면당하거나 비난을 받지 않을까 두려웠다. 가뜩이나 포항 경제가 어려워 다들 허리끈을 졸라맨다고 아우성이고 여러 본당에서 번갈아가며 모금하러 오는 경우가 잦다고 하는데 우리까지 나서서 교우들에게 부담을 준다는 생각에 발길은 무거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짧은 기간에 세례를 받은 많은 학생들이 음악실과 강당으로 전전긍긍하면서 미사를 봉헌하고, 하느님을 전혀 알지 못했던 아이들이 미사참례를 위해 달려와서 경쟁이라도 하듯이 기쁘게 미사를 준비하고 복사를 신청하는 모습과 예비신자 교리반을 찾는 학생들의 숫자도 놀랄 만큼 불어나는 현실을 생각하면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하는 심정이기도 했다.

우리학교 신자교직원들을 중심으로 모금을 한 것도 예상을 뛰어 넘는 감동적인 성과를 보였다. 여기에 힘을 얻어 조심스럽게 모금에 나서며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감사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교목신부님께서 미사를 집전하고 많은 선생님들이 어깨띠를 하고 동행하며 응원했다. 강론을 통하여 학교의 변화된 내용을 전해들은 신자분들은 우리들의 우려와는 달리 아낌없는 격려를 보내주었다. 지곡성당, 효자성당, 이동성당, 대잠성당 이렇게 네 개 본당에서 모금을 한 결과 우리는 놀라운 기적을 보았다. 예상을 뛰어 넘은 호응과 격려는 마치 천국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낯선 본당을 찾은 우리들에게 다가와 “오천고등학교의 발전을 위하여 기도하겠습니다.”, “자식이 한 명 더 있으면 우리학교에 보내고 싶다.”는 말씀들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우리학교’라고 불러주면서 마치 당연한 듯이 봉헌에 동참하는 분들이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천사들 같았다.

모든 것이 다 감사하고 새로운 경험이었지만 효자성당에서 만난 한 형제님은 우리들에게 각별한 감동을 선물해 주었다. 토요일 저녁 특전미사 후 약정서를 받으며 서 있는데 중년의 형제분이 다가왔다. “우리 본당에는 언제 모금 오시나요?”라는 질문으로 보아 이 본당 신자가 아닌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 본당에는 모금계획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듣고는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그러면 제가 한 번 학교로 찾아뵙겠습니다.”라는 이례적인 인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그것이 끝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틀 후 그 형제님 부부가 교장실로 찾아왔다. 그리고 깜짝 놀랄 큰 금액의 봉헌금을 내어 놓았다. 그분은 인근 성당에 적을 두고 있는데 효자성당의 특전미사에 참례했다가 모금상황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뜻이라는 것이다. 그 응답으로 기쁜 마음으로 봉헌금을 준비했다고 한다. 함께 전해준 기도의 지향에는 비록 내 아들은 사제로 키우지 못했지만 손자들 중에 꼭 성소가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이다. 거듭거듭 하느님께 감사의 마음을 표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두 분의 표정과 태도에서 눈부신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학교 인근의 오천성당에서도 ‘우리학교’의 일을 외면할 수 없다며 성당의 여건을 생각하면 감당하기 힘든 큰 금액을 모금하여 보내 주셨다. ‘모라자면 언제든지 이야기하라!’는 여러 신부님들의 격려 등 이 벅찬 감동을 우리만 누려서 될 일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우리는 세상속의 선한 사람들을 통해 돈보다 더 중요한 많은 것을 얻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학교’ 라는 그 말이 너무도 따뜻하게 다가왔다. 머잖아 축복예정인 경당에서 ‘우리학교’라고 여기며 기도해 주시고 성원해 주신 모든 분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꿈만 같다. 대구대교구에는 우리학교가 17개 있다. 척박한 교육여건에서도 복음화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 ‘우리학교’를 따뜻한 눈길로 바라봐 주신다면 참 좋겠다. ‘우리학교’, 이 말만으로도 가슴이 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