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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에서 온 편지 - 볼리비아
신앙, 살아있는 하느님 체험


글 석상희(요셉) 신부|볼리비아 선교

하느님을 알게 된 지 500년이라는 긴 시간을 살아온 대륙 남아메리카. 그런 짧지 않은 시간임에도 그리스도교인의 사명인 선교가 끝나버린 듯한 땅 남아메리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시간동안 가졌던 식민지라는 정치·사회적인 환경과 조상들이 살았던 또 다른 신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 문화·종교적인 환경 안에서 이루어진 특수한 가톨릭 신앙의 땅 남아메리카. 이 땅에서 선교사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시간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된다.

볼리비아! 파라과이와 함께 남미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내륙 국가로, 이 땅에 대구대교구가 선교사를 파견한 지 20년을 맞이하면서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8월 22일(월)부터 26일(금)까지 선교사제들의 피정이 있었다. 특별히 20년이라는 선교 기간 동안 구세주 그리스도(Cristo Salvador) 본당에 첫 사제 파견 후 현재 10명의 사제들이 3개의 본당 공동체(Nuestra Señora Aparecida, San Antonio de Lomerío)에서 사목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런 양적인 성장이라는 외적 현실 안에서 선교사라는 우리들의 내적인 정체성을 다시 한 번 바라보기 위해 마련된 이번 피정은 현재 아르헨티나 상 마르틴 교구의 보좌주교로 계시는 문한림(유베날) 주교님을 모시고 진행되었다. 남미에서 신학생으로 양성과정을 거치고 사제로, 그리고 현재 주교로 살아온 시간 안에서 쌓인 연륜과 경륜, 나아가 사제로서의 영성을 나눌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특별히 이번 피정은 어떤 특정한 주제나 성경을 가지고 침묵 안에서 개인적 묵상을 가지는 형태의 피정이 아니라 사제이기 이전에 한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다시 한 번 다짐하고 바라볼 수 있는, 또 한편으로는 익숙해진 가톨릭 신앙의 새로운 복음화가 필요한 남미의 교회에 유용하게 적용할 수 있는 그런 사목적인 피정이었다. 멕시코에서 시작된 SINE(Sistema Integral de la Nueva Evangelización;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통합적 시스템)라는 프로그램의 도입부분에 만나게 되는 이 케리그마 피정은 중남미 교회가 겪고 있는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준비된 피정 프로그램이다. 이 피정의 가장 큰 특징은 어떤 체계적인 교리교육 과정을 통해서 하느님을 배워서 알게 되고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 자신의 주님이시고 구원자이신 예수님과의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만남이라는 체험을 통해서 신앙을 고백하고, 하느님에 대해서 알고 싶어 교리교육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복음화가 요구되는 남미 대륙의 가톨릭교회에 절실하게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복음이 전파된 지 500여 년이 지났지만 1차 선교 후에 신앙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교육 부재를 겪고 있는 남미 교회의 어려움은 성사생활이 마치 하나의 관습이나 절차처럼 받아들여진 신앙의 문화화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고 가톨릭 신앙을 고백하고 있고 또 현재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증가도 나날이 눈에 띄지만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의 실제적인 삶은 또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증가하는 마약의 공급과 소비, 그와 관련된 각종 청부 혹은 보복 살인, 가정의 파괴, 혼인 외의 동거, 낙태와 버려지는 아이들, 인신매매, 정치의 부정부패 등등.

이런 범죄나 부정부패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비신앙적인 삶을 자연스럽게 살면서도 가톨릭교회 안에서 세례와 견진을 받고 주일미사에 참례하여 성체를 모시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다시 말해 가톨릭 신앙이라는 것은 태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주어진 문화적 환경의 한 부분일 뿐, 그 신앙을 삶 안에서 고백하고 살아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 가장 큰 이유는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나 익숙해진 관습 혹은 문화의 한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내 삶의 주님으로서, 내가 살아가야 할 방향을 결정하고 인도해주는 살아있는 주님으로서의 체험과 고백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저 익숙해져 있을 뿐, 심사숙고를 통한 개인의 결단으로 받아들이거나 살아가는 신앙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로 2007년 브라질 아빠레시다에서 있었던 중남미와 카리브해 주교회의에서 새롭게 절실한 필요성이 확인된 “새로운 복음화”, 다시 말해서 가톨릭 신앙이 문화의 일부분으로 자리잡아 화석화된 신앙이 아니라, 삶의 기준이며 가치관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있는 신앙을 살기 위해서 모든 가톨릭 신앙인들에게 하느님에 대한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체험은 필수불가결한 시작점인 것이다.

대구대교구의 볼리비아 선교가 20주년을 맞이했고 또 개인적으로는 이 안에서 10년이라는 시간을 살면서 사제로서, 선교사로서 무엇보다 신앙인으로서의 내 삶을 바라보게 된다. 어릴 때부터 가정환경 안에서, 그리고 주일학교와 신학교의 양성과정 안에서, 나아가 사제가 되어 한국 교회 안에서 살아가며 익숙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왔던 것들이 10년이란 시간동안 볼리비아에서 선교사로 살아가면서 많이 무너졌고 새롭게 자리잡았으며 또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되었다. 문화와 역사가 다른 곳에 산다는 것, 그것은 단순한 외적인 환경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문화와 역사로 인해 형성된 가치관과 사고방식들, 신앙을 살아가는 방식까지도 다른 환경 안에서 새롭게 사제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 정체성을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야 한다. 다르다는 것이 우등이나 열등의 문제 혹은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성을 통해서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이야기한다는 것, 그리고 그 가능성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기에는 많은 인내심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익숙한 것들을 잠깐 뒤로 제쳐두고 새로운 것들에 마음을 열고 다가가기 위해서는 진정한 겸손함과 인내심이 요구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피정 끝 무렵에 문 주교님이 이야기하신 “돌로 된 심장이 아니라 살로 된 심장”처럼 열려있고 가능성이 있는 마음, 다른 환경에서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예수님을 알아차릴 수 있는 깨어있고 준비된 마음이 요구된다.

어느 곳에서든지 오래 머물면 긍정적인 부분과 함께 경계해야 할 부분도 생긴다. 좀더 잘 알게 되고 그래서 할 수 있는 것도 많아지는 것이 긍정적인 부분이라면, 익숙해짐에 안주해서 머물고 싶어하는 인간적인 욕심은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성령께서 바람과 불처럼 규정된 형태가 아닌 존재로 우리 안에서 우리를 움직이시듯, 내 마음도 성령의 움직임에 따라 형태가 주어지는 부드러운 “살로 된 심장”이 되어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신앙을 살아가기를 바란다. 교리 안에 가두어진 규정된 하느님이 아니라 다양한 환경, 다양한 사람들 안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모습의 살아있는 하느님을 만나며 살아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