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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 함께여서 행복하여라 - 제12화
해외 선교 나가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글 양 수산나|대봉성당

  이제 열두 번째, 마지막 이야기.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대구에서 살게 되어 기쁘다. 내가 살도록 부름 받은 교구로 돌아 온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 30여 년 동안 일한 것도 대구대교구 협조자로서 한 것이다.

 

나는 2004년에 은퇴했다. 대구는 내 집이고 대구에 첫발을 디딘 지 57년째다. 나는 농담조로 친정은 영국이고 시집은 대구이고 직장은 프랑스라고 자주 말했다. 나는 신천 가까이 작은 서민 아파트에 살고 있어서 신천둔치에서 산책을 할 수 있다. 은퇴자로서 작은 사명들이 있다. 대구가톨릭대학교병원(이하 대가대병원) 직원들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친다. 대구에 돌아 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이 나서 대가대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다. 그 후 병원장 신부님이 이 일을 제안했고 이문희 대주교님께서 내게 맞는 사명이라 하셨다. 조환길 대주교님도 그것을 격려해주셨다. 대가대병원 영어반과 마찬가지로 두 개의 재미있는 영어반이 더 있다. 하나는 이 대주교님이 시작한 앞산밑 북카페에서 목요일에 교황 회칙 『복음의 기쁨』을 영어로 함께 읽고, 영어로 이야기 나누는 일이다. 또 하나는 내 아파트에서 하는 토요반이다. 이 반은 불교, 개신교, 가톨릭 신자 등 종교도 직업도 다양하다. 불교신자는 그동안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우리는 함께 영어 성경을 읽고 다양한 주제로 토론을 벌여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 의미가 크다.

 

그 외에도 본당, 대학, 고등학교 등지에서 특강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이제 내 나이 80을 넘어서니 이런 활동을 줄이고 있다. 그러나 이 병원의 직원 팀과 한 특별활동에서 우리 모두에게 큰 기쁨이 되었던 것은 우리가 함께 마련한 연극들이었다. 내 작은 아파트에 비좁게 들어서서 나와 그들의 부모들과 언니, 오빠들의 도움으로 어린아이들이 연기를 했다.

 

내가 쓴 연극 중 우리 모두에게 기뻤던 것은 성탄극이었다.

내 구상은 이랬다. 예수께서 태어나실 때 이쪽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가야 왕국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하면 신자가 아닌 사람들의 관심도 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예수님은 ‘동방에서’ 온 세 현자의 방문을 받았는데 우리는 그들이 한국에서 베들레헴에 갔다가 엄청난 영감을 받고 돌아와 가야국을 세웠다고 상상했다. 아이들과 부모들은 이 주제를 가지고 재미있는 연극을 만들었던 것이다!

가장 감동적인 연극은 2009년 김수환 추기경님이 돌아가신 후 그토록 훌륭한 그분의 삶을 다룬 것이었다. 30여 명의 부모들이 작은 거실에 관객으로 좁게 들어찼다. 큰 여자(중·고등학생) 애들은 천사 옷을 입고 어린아이들의 의상 입는 것과 ‘무대’에 나가는 순서를 도와주었다. 침실과 식당은 분장실이었고 부엌이 무대였다. 아이들이 연극을 하는 동안 부모들은 내가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쓴 김 추기경님의 생애를 노래 불렀다. 노래의 내용을 아이들은 연기했다. 독자들은 우리 모두가 연습을 많이 못 했지만 10대들이 짬을 내어 연습을 하면서 얼마나 즐거운 시간을 가졌는지 상상해 보시라! 추기경님께서도 하늘에서 내려다보시며 즐거워하셨기를!

 

내 은퇴한 삶에서 또 하나 나눌 만한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조그만 할머니가 내 옆에 걸어오며 물었다. “한국말 하세요?”, “예.”라고 대답했다. “101동 101호에 사세요?”, “그렇습니다.” 그러자 그 할머니가 말했다. “내 집은 102동 101호인데요, 가끔 할머니 손님들이 우리 집 벨을 눌러서 나를 보고 당황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할머니 손님들은 나를 사람 취급합디다.” 그 할머니는 이 말을 기쁘게, 강하게 말했다. 어릴 때부터 가난했고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고 남편과 두 아들을 돌보느라 평생 청소를 한 사람…. 이 할머니는 내 손님들(사제들, 수도자들, 열심한 평신자들)이 얼마나 자기를 존중해 주는지 느끼는 영적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분은 금방 내 대녀가 되었고 아들 한 명은 지금 교리를 배우고 있다. 집을 잘못 찾은 내 손님들에게 감사!

 은퇴한 후 6년 안에 은인들이 세 번이나 비행기 표를 사주어서 나는 루르드와 영국에 있는 가족들을 방문할 수 있었다. 이때 아주 친한 한국 친구들을 아름다운 내 고향 스코틀랜드로 데리고 갔다. 내 사촌들은 그때 나이가 70대였는데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고 재워주었다. 물론 두 사촌 오빠가 젊었을 때 한국전쟁 참전 용사여서 더 그랬다.

그러나 2010년 이후 나는 한국을 떠난 적이 없다. 내 여동생과 남동생 내외는 두 번씩 한국을 방문했다. 작년에 방문한 남동생이 말했다. “내가 19년 전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한국은 개도국이었는데 지금은 놀라운 속도로 벌써 선진국이 되었네!” 맞다. 인상적인 사실이고 내게도 큰 기쁨을 주는 사실이다. 그리고 내게 더 큰 기쁨을 주는 것은 한국교회에 일어난 변화다. 내가 젊었을 때 한국은 아직 나 같은 외국인의 도움을 청했다. 이제 한국과 한국교회는 선교사들과 온갖 분야의 봉사자들을 모든 대륙에 파견하고 있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하느님이 사랑이듯이 교회도 사랑이다. 우리는 아버지, 아들, 성령의 놀라운 사랑의 하나 됨 안에 모두 하나다.

 

이제 나는 80대에 들어서서 활동은 줄어들고 쉬엄쉬엄 천천히 가고 있다. 온 세상을 위해 기도는 더 많이 하고 있고 갈수록 더 행복하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내가 드리는 ‘하느님께 감사’에 함께 해주기를 바라며 이런 기회를 주신 조환길 대주교님과 ≪빛≫잡지 모든 분들, 그리고 나를 그토록 따뜻이 맞아 준 한국에 큰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번역과 타이핑과 문장을 다듬는데 수고해 준 두 친구에게도 감사하고 싶다.

 

● “하느님과 함께여서 행복하여라”는 이번 호로 끝맺습니다. 1년 동안 집필해주신 양 수산나 님과 애독해주신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