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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의 현장에서
보라색 종이찰흙 공
- 전문성은 기쁜 일의 바탕


글 도건창 세례자요한 | 카리타스복지교육센터 소장

2015년 교구 내 장애인복지 시설 기관 동료들과 함께 독일 가톨릭 장애인복지 견학을 갔다. 그 연수 중에 한 동료를 만났다. 그의 이름은 크리스토프, 지적 손상으로 장애를 겪는 사람들을 위한 치료보육교사다. 그와 친구들이 선물해준 짙은 보라색 종이찰흙 공은 오늘도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다.

 그가 일하는 곳은 “촉진그룹”이었다. 촉진그룹에서 하는 일은 우리나라의 장애인 주간보호센터와 비슷하다. 장애인 주간보호센터에서는 지적능력에 손상을 입은 사람이나 그 가족을 돕기 위해 낮 동안 그들과 함께 작업도 하고 여가시간도 함께 보내는 곳이다. 하지만 독일에서 지적 손상을 입은 사람을 위한 촉진그룹에서 추구하는 목적은 우리나라의 주간보호센터와 다르다. 촉진그룹은 지적 손상으로 장애를 겪는 사람들을 낮 동안 돌보는 곳이 아니라 그들에게 다른 사람과 같은 하루 일과와 일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곳이다.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성인들은 아침에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서 일어나면 일터로 가서 일하고, 퇴근해 돌아오면 여가시간을 가진다. 그처럼 심한 손상 때문에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도 다른 사람과 동일한 일과를 가질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곳이 장애를 가진 사람을 위한 작업장이다. 이 작업장에 딸려 있는 촉진그룹은 직장이나 직업재활센터에서 일하기 힘들 정도로 지적 손상이 심한 사람들도 직장에 가서 일을 배우거나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돕는 곳이다.

 

크리스토프 씨는 우리에게 자기 촉진그룹 구성원에 대해 자랑스럽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가 이 그룹을 맡으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룹 구성원들이 즐겁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꼼꼼하게 살펴본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크리스토프 씨는 A씨와 B씨가 하루 종일 쉬지 않고 걸어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C씨는 한 곳에 앉아서 손으로 축축하고 물컹물컹한 것을 만지는 것을 즐겨한다고 했다. D씨, E씨, F씨는 손으로 가구나 물건을 계속해서 두드리는 행동을 하면서 재미있어 한다고 했다. 끝으로 대부분의 그룹 구성원들이 공이나 물건을 집어 던지거나 물건을 건드려서 그것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즐거워한다고 했다.

 이렇게 관찰한 다음에 그는 그룹 구성원들이 함께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크리스토프 씨네 촉진그룹이 속한 작업장에서 하는 여러 가지 작업 가운데 하나가 개인정보가 담긴 문서를 파쇄하는 일이었다. 그는 이 작업에 모든 사람이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작업과정을 작은 단위로 나누고, 당사자들과 상의해서 각자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역할을 분담했다.

 

 

 A씨와 B씨는 계속 왔다 갔다 하는 것을 좋아하니 촉진그룹 방을 한 바퀴 돌 때마다 한 번씩 수동 종이절단기로 파쇄할 종이를 자르는 일을 맡기로 했다. 움직이는 것은 좋아하지 않지만 축축하고 부드러운 것을 만지는 것을 즐기는 C씨는 잘려진 종이를 물이 담긴 플라스틱 그릇에 넣어 불리고, 불려진 종이를 만져서 다 풀어지도록 하는 일을 담당하게 했다. 크리스토프 씨는 불려진 종이에 풀을 섞어 종이찰흙을 만드는 작업을 맡았다. D씨, E씨, F씨에게는 작은 콩알 크기의 돌을 넣은 플라스틱 공에 종이찰흙을 두드려 붙이는 공정을 맡겼다. 그렇게 만들어진 종이찰흙 공을 그늘에 말리고 난 다음에, 각자 자기 마음에 드는 색깔의 색종이를 종이찰흙 위에 붙이고 방수를 위한 칠을 하면 종이찰흙 공이 완성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공은 주로 그룹 구성원들이 던지며 노는 놀이 도구로 사용된다. 던지는 쾌감에 촤르르 하는 돌 구르는 소리까지 들려서 사람들이 더 좋아한다고 했다. 다른 공들에 비해 멀리 굴러가지 않아 쉽게 주워와 다시 던질 수 있는 것도 장점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 종이찰흙 공을 선물하거나, 여러 개의 종이찰흙 공을 줄에 연결시켜 방 중앙에 걸어두는 장식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 공은 크리스토프 씨네 촉진그룹 구성원들이 공동으로 만들어 낸 생산품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사회적 기여였다. 크리스토프 씨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 기여하는 것이 있을 때 자신을 가치 있는 사람으로 여길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한 시간 넘게 신바람 나게 자신과 그룹 구성원들이 하는 일들을 소개하던 그와의 만남을 끝내고 연수단 버스를 탈 때 함께 간 동료 한 분이 말했다. “같은 일을 하는데 저 사람들은 저렇게 웃으면서 하고 우리는 왜 그렇게 힘들어하면서 할까요?”

그 즐거움을 가능하게 해주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부러웠다. 지적 손상을 지닌 사람들의 일상을 정상화(normalize)하고 일할 권리를 실제로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는 정부의 정책이, 정책의 취지를 실무에서 구현하는 일에 함께 앞장서는 민간 사회복지법인의 노력도 부러웠다. 하지만 사회복지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으로서 정부와 운영법인의 노력에 구체적인 열매를 맺게 하는 크리스토프의 전문역량과 그 역량을 온전하게 살리는 그의 열정이 무엇보다 가장 부러웠다.

가끔 사회복지 일을 잘하기 위한 전문성과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에 담긴 사랑의 마음이 따로 떨어진 어떤 것인 양 말씀하는 분들을 만난다. 그럴 때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회칙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섬기려면 우선 전문적인 역량을 갖추어야 합니다. 협력자들은 올바른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양성되어야 하며, 지속적으로 돌보는 임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중략) 우리는 인간을 대하고 있으며, 인간에게는 언제나 적절한 전문적인 도움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합니다. 인간애가 필요합니다. 인간에게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정성이 필요합니다.”(『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31항 가)를 인용하며, 올바른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전문성도 없는 것이라고 목청을 높인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연구에 따르면 직장인들은 자기 업무가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할 때, 또 그 일을 자신 있게 해낼 수 있다고 여길 때 행복하다고 한다. 그렇기에 크리스토프 씨는 그렇게 즐거웠나 보다. 작년부터 장애인복지 분야에서 일하는 동료들을 위한 체계적인 보수교육과정을 만드는 작업을 소박하게 시작했다. 지금 우리가 어떤 위치나 처지에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를 향해 나아가기를 원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믿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