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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의 현장에서
서로 다름과 의논하기


글 도건창 세례자요한 | 카리타스복지교육센터 소장

 

다른 사람을 돕는 행동은 어떤 것일까? 올해 5월 서울 노원구에서 40대 남성이 어머니가 20년간 모아둔 쓰레기에 깔려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 어머니처럼 어디에 쓸지 알 수 없는 물건을 상식적인 범위를 넘어 계속 모으고 보관함으로써 위안을 얻는 행동을 ‘저장 강박증’이라 한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몇몇 지방자치단체가 자원봉사단체와 협력해 비슷한 행동을 하는 지역주민에게 물건을 모으지 않도록 설득하고, 설득되지 않으면 매년 정기적으로 찾아가 쓰레기 분리수거를 한다고 했다. 또 일부 언론은 이 증세가 치료가 필요한 정신증이라고 보도했다. 언론과 지방자치단체의 저장 강박증 대처방식이 타인을 돕는 행동에 꼭 필요한 한 가지를 다시 묻게 했다.

당사자가 원하지만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거드는 행동을 할 때 우리는 “내가 그 사람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한 사람이 스스로 원해서 오랜 시간에 걸쳐 힘들게 모은 물건을 치우면서 그 일에 봉사, 곧 도움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 사람이 그것을 왜 모았고,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며, 그것들을 어떻게 처리하기를 원했는가는 한두 기사에서만, 그것도 당사자 인터뷰가 아니라 저장 강박증을 설명하는 전문가 의견으로만 보도되고 있을 뿐이다. 도움을 받은 사람의 의지에 반대되는 행동에도 도움이나 봉사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당사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그들이 모아놓은 물건을 치우는 일이 무조건 부당하다는 뜻은 아니다. 한 사람이 모아 놓은 물건 때문에 자신과 이웃의 안전이 위협받거나 심각한 불편을 겪는 것을 막기 위해 당사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그 물건들을 치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공익을 위한 행정조치 집행이지 봉사는 아니다. 그런데 지방자치단체, 언론 그리고 자원봉사단체는 자신들이 한 일을 봉사라고 부른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 상상해본다면 위생과 깔끔함이 행복한 삶, 인간다운 삶에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자신이 행복하다고 여기는 삶을 상대방도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을 도움이라고 여기지 않았을까?

문득 한 만남이 떠올랐다. 예전에 신체장애를 가진 사람을 위한 집을 지으려고 하던 한 가톨릭 노숙인시설로부터 독일 장애인 주거시설들을 돌아보고, 건물구조에 관해 자문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다. 덕택에 다양한 규모의 장애인 주거시설, 주택가에서 6~7명이 함께 사는 그룹홈, 혼자 살면서 일주일에 한 번 함께 모여 여가시간을 같이 보내거나 생활에서 부딪히는 어려운 문제를 같이 학습하는 생활학교 등 여러 장애인 주거시설과 지원기관을 견학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생활학교 담당 사회교육사와 독립생활을 하는 한 청년을 방문했다. 방에 들어갔더니 포장용 종이상자가 2미터 가량 쌓여 있었다. 그는 그 위에 누워 책을 읽다가 우리를 맞이했고 그 상태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껏 고개를 치켜들고 대화하는 상황이 어색했지만 나를 제외한 두 사람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다. 그 집을 나오면서 함께 방문했던 사회교육사에게 물었다. 그는 “이유는 모르지만 ??? 씨는 저 방에서 가장 편안해합니다. 그 결정은 그의 몫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어떻게 하면 그 결정을 우리 사회에서 잘 현실화시킬 수 있을까를 그와 함께 찾아내는 것입니다. 먼저 그에게 우리가 염려하는 사고 위험과 위생문제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 씨와 어떻게 하면 종이상자를 사고가 나지 않고 병의 원인이 안 되게 쌓을 수 있을까를 의논했습니다. 그래서 길에 버려진 종이상자를 줍는 대신 대형 마트에 물건 들어오는 시간에 가서 얻기로 합의했고 종이상자가 쓰러져서 다치는 일이 없도록 나무로 된 틀을 같이 만들었습니다. 처음에 ??? 씨는 아무도 방에 못 들어오도록 했는데 요즘은 당신처럼 낯선 사람과도 이야기를 나눕니다.”

  

도움의 관계에서 도움의 방법, 절차, 목표에 관한 의견이 다른 경우가 많다. 돕는 사람과 도움을 받는 사람 사이에는 당연히 의견차이가 있다. 각자 살아오면서 서로 다른 경험을 했고, 같은 경험이라도 다르게 해석하며,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하므로 동일한 문제에 대처하는 행동이나 방식도 달라진다. 자기 삶을 통해 이루고 싶은 목표 역시 다르다. 사람은 그렇게 유일무이한 존재가 된다. 다름을 인정하는 사람이 누군가를 도우려 한다면 그는 상대방과 의논해야만 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자기 생각과 의견도 밝혀야 한다. 만약 서로 다른 사람이 의논하지 않고 결정을 한다면 어느 한쪽의 뜻만 주인공이 된다. 다른 쪽의 의견은 무시된다. 자기 의견을 무시당한 사람이 돕는 사람이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도움을 줄 수 없고, 도움을 받는 사람이라면 도움이라는 행위의 본질이 깨어져 버린다. 만약 그 도움이 사랑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우정을 설명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르친 순서를 뒤집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 곧 상대방에게 유익한 것을 원하고 유익한 행동을 해주는 것을 맨 앞에 둔 반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상대방이 있고 살아 있기를 원하는 것을 첫째로 꼽았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드물지 않게 의논은 기대했던 합의에 이르지 못한다. 그럼에도 다름의 인정과 의논하기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당신을 찾아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물었던 사람에게 예수님은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는 제안을 했다. 그 사람은 예수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어 슬퍼하며 떠났다. 예수님도 그를 붙잡지 않는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야기할 뿐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를 도와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는 구원에서 멀어졌을까? 아니면 비록 슬퍼하며 떠났지만 그에게 자신의 뜻만을 강요하지 않았던 예수님으로부터 다름을 인정받는 구원을 체험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