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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에서 온 편지 -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 1년을 지내며(11)
- 2015년 6월 23일부터 2016년 6월 23일까지


글 김형호 미카엘 신부 |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선교사목

 

비 오는 날의 풍경, 기다림: 3월 16일

비가 내리면 대체로 천둥번개를 동반한다. 강렬한 더위가 있은 후 별안간 상승기류가 생기며 거센 바람이 분다. 그런 다음 천둥번개를 동반하며 비가 내린다. 30분 정도 엄청나게 내리고는 금세 갠다. 이처럼 비오는 신호는 충분히 선명하고 대비할 시간을 미리 주기에 이 시간에는 모두들 잠시 쉰다. 짧게 지나는 비를 맞으며 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산이 없기도 하거니와 필요치 않은 듯, 우기의 비 내리는 풍경은 흔히 이랬다.

요즘 드물게 건기에도 비가 자주 온다. 오늘은 한국의 봄비처럼 사뿐히 내리는 비가 이른 아침부터 왔다. 퇴근해야 하는 야간근무자는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여기 사람들은 어쩔 수 없는 급한 일이 아니면 비를 맞지 않는다.) 그런데 보통 30분이면 그치던 비가 3시간째 내리고 있다. 집에서 2~3시간을 자고 다시 돌아와야 하는 그의 수면 시간은 1시간 남짓 남았다. 몇 시간만 비가 더 내리면 그는 쉼 없이 다시 근무를 시작해야 한다. 방 한 켠에 늘 쉬고 있던 우산을 건네주며 쓰고 다녀오라 하니 고맙다며 인사를 하고는 그제야 퇴근을 했다. 처음 접하는 3단 접이 우산을 펼치고 접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데 그의 손에는 오후 4시 반 경에 있을 교리교육 자료가 깨알같이 적혀있었다.

아무리 그리 보지 않으려 해도 그는 살아있는 성인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20여 년 동안 휴무 없는 야간근무를 하며 하루 2~3시간을 나무그늘 아래서 잔다는 그는, 얼굴에 피곤이 역력한 채 주름근육이 깃든 그는 쉬어야 하는 낮 시간에도 재능봉사를 찾아서 한다. 다시 출근한 그는 이 시간에도 모기와 함께 밤새 편하지 않은 작은 의자에 앉아 밤을 지키고 있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마태 26,38) 나는 자야 하는데 그는 아직 깨어 밤을 지키고 있다. 어제처럼 오늘도, 오늘과 같이 내일도….

 

이발의 추억: 3월 26일

오래 전 군 복무 시절에 내부반 이발병을 했다. 일과를 마치고 1년 반 동안 취침 전에 하루에 한두 명 정도 이발을 했으니 횟수로 따지면 꽤나 많이 한 전문(?) 이발병인 셈이다. 짧은 군인머리는 그랬었다. 참고로 이등병과 병장은 이발병을 시키지 않는다. 그때는 그랬다. 20년이 더 지나고 함께 사는 복지 가족들 몇 분에게 과거의 실력을 뽐내려고 권했는데 다행히 몇 분이 흔쾌히 응해줬다. 다소 긴 머리를 깎았는데 손이 많이 굳어 있었다. 망치진 않았지만 잘 깎지는 못했다. 파리에서 언어 연수 중 가끔 찾던 한국인 미장원이 있었다. 이발을 하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분께서 내 머리를 깎아주는 셈치고 간단한 이발도구를 다 준비해주셨다. 참 고마운 분이다.

이곳 사람들은 곱슬머리이기 때문에 머리카락을 자주 빡빡 깎는다. 이발소에서 깎으면 성인기준 500세파프랑(한화 1,000원, 거리이발소 200세파프랑)이다. 적지 않은 가격이라 면도날을 사서(50세파프랑) 직접 깎거나 서로서로 깎아주는 모습을 자주 본다. 깎아주고 싶으나 아직까지는 꾹꾹 참는다. 대신 방기에 함께 사는 한국인 몇 분에게 이발할 기회를 가졌었다.(참고로 이곳 사람들은 긴 머리를 못 깎는다. 더구나 동양인의 머리는 더 그렇다.) 다행히 망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잘 깎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고맙다며 기꺼이 기회를 준 그들에게 오히려 내가 더 고마울 뿐이다. 조금씩 긴 머리에 요령이 생겨나고 있다. 나만의 비밀이지만….

스님이 공중목욕탕에서 제 머리 깎듯 내 머리를 스스로 깎는 데에도 ‘감’이라는 게 생긴다. 문득 이등병 시절, 낮 시간에 그리 바쁘지 않은 보직을 받았다고(선발기준이 그랬다.) 저녁에 머리라도 깎으라며 이발 기술을 가르쳐 준 선임병이 고맙게 느껴진다. 이발을 마치고 나면 이내 바리캉을 충전한다. 여기저기 끼인 머리카락을 털어내고 가위와 바리캉 날에 기름을 치며 ‘다음에는 더 잘 해야지.’ 하고 다짐한다. 나름 다음을 위한 준비인 셈이다.

부활절을 맞아 오늘 내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다시 기름을 치고 충전을 했다. 내일을 살아야 하니까…. 이발소나 미장원을 나서는 사람들이 기뻐하듯 흡족하게 신나게…. 부활이다.

 

전쟁의 맛: 4월 7일

어릴 때 동네 뒷산에서 자주 전쟁을 치렀다. 고무총, 새총, 화약총을 들고 목검 차고 아무도 죽지 않는 전쟁을 치러냈다. 스무 살이 넘어서 진짜 총을 들고 나무 북한군을 표적으로 사격을 했다. 그때도 ‘멀가중 멀가중 멀중가중’으로 20발을 쏘면 17~18발은 명중시켰다. 거의 매일 밤 총을 들고 경계 근무를 섰지만 근무 중엔 한 번도 그 방아쇠를 당겨 보지 못했다.

2015년 한 나라의 혼돈 속에서 진짜 총소리를 들으며 말공부를 했다. 긴 밤이 지나 아침이 오면 지난 밤 옆 동네에서 몇 명이 죽었다는 얘기들이 들려왔다. 그러나 내게는 내가 개입하지 않은 실전의 전쟁보다 내가 치러야 할 작은 가짜 전쟁들이 더 중요했다. 낯선 말과의 전쟁, 연중 계속되는 여름과의 전쟁, 이미 익숙해진 편리함을 내려놓아야 하는 전쟁, 매일 치러도 질 수밖에 없는 모기와의 전쟁…. 예전 뒷동산에서 치르던 그 전쟁을 40대 중반의 나이로 다시 치러야 했다. 그때의 친구도 없지만, 그 시절의 즐거움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정겨운 내 집과 내 진짜 가족은 아니지만 그래도 힘든 것만은 아니었기에 다가오는 작은 즐거움을 부여잡고 지금에 서 있다. 아직도 낯선 환경 속에서 바보처럼 살지만 어린 아이 수준의 말을 할 수 있고 나에게 반갑게 인사해주는 사람들이 있고 함께 같은 길을 걸어가는 이들이 있으니 좋다. 이만하면 전쟁을 괜찮게 치르고 있는 셈이라 자찬한다.

이 나라가 긴 내전을 끝내고 새 대통령을 맞아 평화를 찾아가듯이, 나 또한 치러낸 전쟁으로 새로운 평화를 열어갈 것이다. 반복되는 그 전쟁들을 일상의 친구로 반기며 그래도 사람 사는 기쁨을 끌어안으며 잘 익은 망고를 맨입으로 씹어 먹는다. 흠~ 이 맛은 말하기 힘든, 참 멋진 맛이다.

 

골목 다방에서: 4월 18일

꽤나 오랫동안 습관처럼 커피를 마셨다. 좋아서 마시기도 하고 심심해서 마시기도 하고 만남의 안주로도 마셨다. 여기서도 가루커피(kawa, 까와)를 마신다. 일어나서 정신 차리며, 식후 언어와의 전쟁을 치러내며 깊은 곳에서의 끌림으로 마신다. 이곳 사람들도 커피를 마신다. 하지만 우리처럼 친구를 만나거나 일상의 빡빡한 머리를 식히거나 식사를 마친 뒤 후식의 기쁨으로 마시지 않는다. 이들은 배고픔을 달래거나 잊기 위해 마신다. 하루 한 끼를 해넘이 때가 되어야 뭔가 먹으니 그 긴 시간의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커피를 마신다. 이 또한 여의치 않은 사람들도 적잖음을 안다.

골목 여기저기에 제법 다방(카페)이 많다. 미리 준비해 둔 넉넉한 한 컵의 커피에 설탕 4~5스푼, 분말우유 1스푼을 넣어서 50세파프랑(100원)에 판다. 나도 가끔 동네 골목 카페에 간다. 배고픔을 달래는 이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식간에 마신다. 꼬마 다방지기에게 설탕도, 우유도 넣지 말고 달라고 하니 조금 신기하게 바라본다. 서로 ‘마심’의 다름을 참 묘하게 바라본다.

아프리카의 눈물 “커피”, 분명 기호식품인데 이들에겐 다만 작은 밥이다.

 

사는 게 뭐: 5월 8일

앞만 보는 것은 아니다. 보이는 것만 보지도 않는다. 앞을 보고 있지만 뒤돌아 말하는지 모른다. 보이지 않는 것을 잡으려다가 다시 오는 것을 모른 척 하기도 한다. 1,000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외국어로 강론을 해대며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셨다.”, “우리 서로 사탕해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공감의 웃음인지 어설픈 말들의 낯선 조합에 대한 읍소인지…. 그래도 웃어주며 고맙다고 말하는 사람들 너머 뒤돌아 계속 말하고 있는 나자신에게 여기 있는, 굳이 타향을 사는 이유를 묻는다. 앞을 보면서도 지나간 것들과 말하길 좋아하며 다가오는 작은 사랑을 외면한 채 뒤돌아 즐기는지도 모른다. ‘밤꿈’에 찾아드는 것, 품어보는 것들과 ‘낮꿈’에 살아가는 것, 다가오는 것들의 혼돈이 어쩌면 없어도 있는 척, 넉넉한 사랑인 척 그렇게 사는지 모를 일이다.

내가 없지 않고 바로 여기 있음을, 세상에 나를 있게 한 분의 꿈과 내가 세상을 향해 던지며 사는 용기와 살며 연결된 나를 둘러싼 것들의 바람과 지금 함께 사는 이들이 바라는 희망의 뒤엉킴을 풀며 직조하는 일이 어쩜 나의 십자가인 동시에 꿈이며 인생인지 모르겠다. 바로 지금 그 교차로에 서서 사방을 바라보고 살피며 놀고 있다. 사는 게 다 이런 걸까? 공교롭게도 오늘이 어버이날이다. 여긴 그냥 하루지만 하늘 어머니에게, 땅 아버지에게 큰 절을 올려야겠다.

 

성령 강림 대축일: 5월 15일

10년 전 성령 강림 대축일 미사를 마친 후 휴대전화가 울렸다. 모친의 임종이 가까웠다는 가족의 전화였다. 그렇게 갑자기 준비도 못한 채 엄마를 하늘로 보내드렸다. 성령 강림 대축일에 오는 전화는 그래서 짠하다. 하늘이 부르면 누구나 귀천해야 함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아직 세상을 사는 우리는 임종을 앞두고 있다는 전화가 죽도록 받기 싫다.

선불제 전화비를 충전하러 갈 때가 종종 있다. 한 번에 많이 충전하기 미안해 3,000세파프랑 또는 5,000세파프랑을 충전한다. 충전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누군가가 100세파프랑, 50세파프랑을 들고 와서 충전한다. 1~2분이면 방전인데 급한 누군가의 소통을 위해 달려왔다.

성령 강림 대축일에 하늘은 우리에게 늘 새로운 것을 선물한다. 받아들이는 사람의 형편에 따라 다시 하늘로 오르기도 하겠지만 그 선물의 새로운 충만을 아는 사람들은 노래하며 춤춘다. 올해 나는 또 무엇을 받았는가? 무엇을 받기를 기도했던가? 그저 걸려오면 받아야지 했다가 준비 없이 모친과 이별을 했듯이 별 준비 없이 강림의 내리 부르심을 받아버렸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10년의 축복을 청했다면 욕심일까? 행복에 건강을 더하는 것이 영원함의 욕심일진데 하늘은 이 욕심마저도 늘 거저 주고 있는데 매일 잊고 산다. 아버지는 늘 우

리가 청하는 것들에 열곱절의 축복을 얹어주시는데 늘 배고파 우는 우리인지도 모른다.

오늘 있으면 먹고, 지금 없으면 참는 사람들, 눈곱만큼의 충전에도 웃을 수 있는 사람들, 걸 수 없어도 누군가 불러주기를 기다리며 옛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기며 기다리는 사람들이 간혹 많이 부럽다. 오늘 교우분이 그려준 자화상을 선물 받았는데 기분이 참 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