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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이야기
아내


글 박경현 프란치스코 | 포항 오천고등학교 교장, 진량성당

 

지난 8월 15일 전후의 일이다. 객지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딸이 휴가를 내고 집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징검다리 공휴일에 맞춰 무려 5일간 연휴를 만들어 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집을 떠난 후 대학생활과 이어진 취업으로 거의 7년여만의 일이다. 그동안 무엇이 그리 바쁜지 명절이나 집안의 큰 행사가 있어야만 손님처럼 얼굴만 삐죽 보이고는 서둘러 훌쩍 떠나버렸다. 그럴 때마다 ‘품안에 있을 때 자식’이라는 말이 빈말이 아님을 실감하며 짧은 만남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간 집에 머문다는 뜻밖의 소식에 마음이 들뜬 사람은 아내였다. 우리 가족은 대구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포항은 객지나 다름없다. 친구나 친척도 없고 그렇다고 딱히 나갈 곳도 마땅하지 않아 집 가까이 식당을 이용하는 것을 제외하면 주로 집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을 하였기 때문에 세 사람이 같이 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평소 아내 혼자 있던 집에서 매일 딸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지만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특별한 이벤트도 딱히 없었다. 출근 생각에 내가 먼저 잠자리에 들 때에도 아내와 딸은 대낮과 다름없었다. 그 시간 이후에 무엇을 했는지 몇 시에 잠들었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아침에 출근 준비하는 나의 소란한 움직임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을 보면 두 사람이 거의 새벽에 잠들었을 것이라 짐작되었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대칭을 이루며 웅크리고 자는 자세만 보아도 모녀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서 혼자 웃었다.

그렇게 예정된 기간을 지내고 반찬과 과일을 담은 봉지를 쥐어 주며 열차에 딸을 맡긴다. 무심한 열차가 빠르게 사라져가는 방향으로 멍하니 바라보다가 아내와 나는 말없이 집으로 돌아와 이리저리 아이의 흔적을 느끼며 마음을 진정시킨다. 마치 먼 나라에라도 보낸 듯 허전한 마음을 다독이며 연신 시계를 쳐다본다. 도착했을 시간에 맞춰 전화벨이 울리며 ‘예쁜 우리딸’이라는 발신자 이름이 뜬다. 엄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딸은 소리 내어 울먹이기 시작한다. 열차가 출발하자마자 다른 사람 몰래 내내 눈물을 훔쳤다는 것이다. 아내의 안타까운 설득이 이어졌지만 울음을 멈추지는 못했다. 그리고 밤새 몇 번의 통화가 이어진다. 이튿날 출근 때 눈두덩이가 퉁퉁 부어서 부끄러웠다는 말에 가슴이 짠하다. 딸이 집에 머무는 시간동안 했던 일이라고는 엄마와 같이 밥 먹고, 이야기하고, 텔레비전을 보고, 자고, 일어나서 같이 얼굴을 쳐다보며 웃고…. 특별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너무도 평범한 일상이었다. 그런데 그토록 깊은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아내가 딸의 엄마이기 때문이다.

 

20년도 더 지난 1996년 2월, 결혼 5년차 때의 일이다. 연년생으로 둘째 아이를 출산한 후 아내는 육아휴직을 하여 내가 근무하던 학교 가까이에서 3년간 생활한 적이 있다. 아내의 휴직으로 나는 마음 한구석에 가지고 있던 부담감을 덜 수 있었다. 결혼 후 처음으로 고향에서 생활하면서 장거리 출·퇴근에 대한 부담감도 없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살았다. 평소에는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학교생활에 전념하고 주말에는 성당에 살다시피 시간을 보냈다. 가끔씩 아내가 육아와 가사의 어려움을 이야기 하면 가장으로서의 직장생활에 비할 것이 아니라며 외면했다. 하루에 두 번씩 큰 찜통으로 기저귀를 삶아내고, 누나인 큰 아이는 앉아서 동생은 누워서 우윳병을 물고 있는 장면을 이야기하며 어려움을 하소연해도 그것은 당연히 아내가 감당해야 할 몫으로만 생각했다. 늦은 귀가에 불평하고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마련하라며 투덜거릴 때에도 바깥에서 나쁜 짓하고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직장과 교회에서 인정 받는 남편이 되기 위한 고충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며 오히려 아내의 너그럽지 못함을 탓하기도 했다.

이런 평소의 생활에 대한 미안함이 없지는 않았기에 결혼 5주년 기념일을 맞아 아이들이 어리니 가까운 곳에서 외식이라도 하고 집에서 여유 있게 시간을 가지자는 아내의 소박한 바람까지 외면하기는 어려워 쉽게 응답을 했다. 사소한 약속이지만 아내의 얼굴이 밝아지고 기대에 차 있었다. 들뜬 마음으로 기다리기를 며칠, 당일 아침 출근 때까지 우리의 약속에는 이상이 없었다. 나도 일 년에 하루만이라도 아내와의 약속을 최우선으로 지키고 싶었다. 그런데 그날 오후 본당에 신부님이 새로 부임해 오신다는 전화를 받았다. 순간적으로 잠시 갈등했지만 이내 마음을 정리했다. 시골의 작은 성당이기 때문에 신부님을 맞이하러 가는 일은 사적인 것보다 중요한 일이라 판단했다. ‘결혼을 기념하는 일이 꼭 오늘이어야 할 이유는 없잖아.’, ‘신심이 깊은 아내는 나의 결정을 이해해 주겠지.’라며 나는 나의 결정을 합리화할 많은 근거를 찾으며 아내에게는 “가능하면 빨리 오도록 노력하겠다.”는 짧은 전화만 남기고 성당으로 달려갔다. 결국 나는 결혼 기념일에 귀가하지 못하고 밤 12시가 넘어서 신부님과 성당의 몇몇 지인들과 집으로 와서 새벽이 될 때까지 나만의 축제를 보냈다. 그날 이후 오랫동안 토라진 아내의 마음에 오히려 내가 서운해 했다. “당신은 나의 아내잖아!”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에서 후배를 처음 보았다. 해맑은 여고생의 모습 그대로였다. 비록 내가 몇 년 선배이기는 하지만 나 역시 철부지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날 이후 나는 이 후배에게 마음을 빼앗겼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람과 부부의 연을 맺을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은 감정에 사로 잡혔다. 마취라도 된 사람처럼 목숨이라도 내어놓을 듯이 후배의 마음을 나에게 묶어두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었다.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처럼 말했다. 세상의 많은 부부들이 걷고 있는 어설픈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약속하기도 했다. 평생 귀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남편으로서 모든 희생을 다 할 것처럼 이야기했다. 나 아닌 다른 어떤 사람과 인연이 되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을 약속하면서 흔들리는 마음을 내 곁에 묶어 두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했다. 긴 편지를 쓰고 예쁜 사진을 찍고 멋진 시를 외우며 노랫말이 아름다운 노래를 배우는 등 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존재의 의미가 되었다. 3대째 이어오는 가톨릭의 집안에서 성장하여 몸가짐이 신중한 아내에게 나는 참으로 두려운 존재였다고 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날카롭고 차가운 첫인상이 자신이 평소 생각하던 이상향의 반대 방향에 있는 사람이었다. 넉넉하고 여유가 있으며 투박하지만 신뢰가 가는 사람을 좋아했다는데 나는 성급하고 속이 좁고 사회성도 부족하여 사람을 쉽게 사귀지도 못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아내는 아버지와 형제들 외에는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준 남자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 나에게 유일한 기회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에 빠지는 일은 머리에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아마 아내도 머리로는 끝없이 거절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외면하지 못한 채 오랜 갈등이 이어졌을 것이다. 나의 달콤한 약속들을 모두 신뢰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토록 절실한 마음이라면 약속의 절반 정도라도 현실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착하고 신심이 깊은 아내는 측은지심이 생겨 한 사람을 구원한다는 마음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단을 내렸다. 우리는 긴 연애의 기간을 거쳐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사랑하고 존경하기로 하느님 앞에서 서약했다. 그 순간에도 아내는 앞으로 꽃길만이 지속되리라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슴에 품었던 결혼에 대한 기대와 꿈들이 이렇게 빨리 쉽게 무너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맞벌이를 하면서도 아내는 늘 가사일의 대부분을 담당했다.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또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하지만 이런 불공정은 사소한 것이었다.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가장 무겁고도 엄중한 책무는 아내가 엄마가 되는 과정이었다. 체중이 2~3kg만 불어도 몸이 둔해지고 숨이 차고 거동이 불편해지는데, 무려 10~20kg까지 몸무게가 증가하는 임신의 기간을 견디어 나갔다. 뱃속 아이의 태동을 같이 느끼면서 신기해 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했지만 언젠가 닥쳐올 출산에 대한 두려움은 한순간도 떨칠 수가 없었다고도 했다. 처녀시절 목숨처럼 소중히 여겼던 몸매는 망가지고 붓기를 감당하지 못해 다리와 배의 피부가 갈라지는 고통 속에서도 잉태한 생명을 우선으로 하는 아내는 참으로 위대한 존재이다. 출산예정일 전날 아내는 만삭의 몸으로 집안을 깨끗이 청소했다. 설거지도 말끔하게 해두고 밑반찬도 일일이 통에 담아 냉장고에 가지런히 정리를 하고 나의 속옷과 양말을 서랍에 잘 챙겨두었다. 전장으로 떠나는 병사처럼 영영 돌아 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심정으로 방의 구석구석을 살피는 등 아내로서의 마지막 책무를 완수하고 그렇게 출산을 위해 병원으로 향하는 아내의 눈길을 지금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생명을 건 길고도 험한 산고의 순간을 철저하게 홀로 감당한 세상의 모든 아내들은 거룩하다.

나는 미로와 같은 먼 길을 돌아 이순의 나이를 눈앞에 두고 있다. 돌아보면 낯선 길을 많이도 허우적거렸지만 용케도 여기까지 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서툴고 아슬아슬했던 것은 남편으로서의 길이다. 다행히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은 것은 묵묵히 나의 곁을 지켜준 아내 덕분이다. 내가 한 모든 약속을 팽개치고도 아무런 책임감을 느끼지 못한 순간에도, 나만이 옳다며 한 발짝도 물러 설 줄 모르는 아집에 사로잡힌 그 순간에도, 나의 잘못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며 진심어린 사과라고는 할 줄 모르는 알량한 자존심을 앞세울 때에도, 말하지 않는 것도 알아 줄 것이라 여기며 표현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그 순간에도 기대를 거두지 않은 아내가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지극히 이기적이고 분열적이고 때로는 충동적인 많은 사람들이 그래도 이렇게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소리 없는 헌신과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아내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남편들은 지금 이 순간 아내의 손을 잡고 사랑한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나 역시 사랑하는 내 아이들의 어머니이며 지금도 철들지 못하는 나의 아내라는 이유만으로도…. 때로는 우리가 부부로 선택한 것을 후회한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생에서 잘못된 선택은 없다. 그 선택이 최선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오늘의 삶이 있을 뿐이다.’라는 말을 새겨들을 일이다.

세상의 모든 부부들이 지금 이 순간부터 그들의 선택이 최선이었음을 증명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그것은 단순히 부부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정과 학교와 교회가 속한 우리 사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