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병원사목을 하며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주세요


글 정진섭 도미니코 신부 | 교구 병원사목부 담당

 

찬미예수님! 저는 병원사목부에서 환우들과 함께하고 있는 정진섭 도미니코 신부입니다. 제가 병원사목을 하면서 자주 받았던 질문은 “힘들지 않나?”입니다. 사실 저도 매일 아픈 환우들을 만나는 것이 처음에는 두려웠습니다. ‘내가 환우들의 삶에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루하루 환우들을 만나면서 이러한 의문과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제가 무엇인가 해 드리는 것이 환우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머물러 드리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제가 만나고 함께하는 환우들은 일반 대학병원뿐만 아니라 요양병원에도 계십니다. 처음 병원사목부에 와서 요양병원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미사를 드리고 봉성체를 하는데 점심때가 다 되었습니다. 마지막 어르신이었는데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냥 나올까?’ 하다가 ‘그래도 기도해 드리면 좋아하시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어르신에게 다가갔습니다. “어르신, 잠깐 기도해 드릴게요.” 하고 나서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순간 어르신이 제 손을 딱 치시면서 “어데 어른 머리를 만지고 그 카노?”라고 하시는 겁니다. 저는 순간 당황해서 “죄송합니다. 식사 맛있게 하세요.”라고 말씀드리고 급하게 병실을 나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요즘 요양병원을 방문하게 되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르신들은 지금 지난날의 어디쯤을 기억하고 계실까?’ 이 물음의 시작은 치매를 겪고 계시는 분들을 바라보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었습니다. 사실 치매를 앓고 계시는 어르신들과 대화가 잘 안 통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잘못 생각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저는 제 중심으로 대화를 하려고 했습니다. 어르신들이 하는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어르신들이 기억하는 순간에 머물러 드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의학적 지식은 없지만 ‘치매’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치매는 기억들이 지워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어느 한 부분, 어르신들이 생각하기에 중요했던 순간이나 사람은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치매는 다른 기억들은 희미해져 가도 어느 한 순간이나 사람을 기억합니다. 그러니 그 기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겠습니까? 어떤 어르신은 저를 보면 피하고 숨으십니다. 아마도 무서웠던 순간을 기억하고 계신가 봅니다. 어느 한 어르신은 저를 보면 “그래~ 우리 아들 왔나!” 하시며 너무 반가워하십니다. 아마 사랑하는 아들이 기억에 남아 있었나 봅니다. 어느 어르신은 화를 잘 내시고 폭력도 서슴지 않으십니다. 아마 화를 풀지 못했던 순간을 기억하시나 봅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어르신들을 만나면 그 기억에 함께 머물러 드리고자 합니다. 저를 보면 자꾸 피하시는 어르신들에게 “괜찮아요.”라고 말씀드립니다. 저를 보면 아들을 기억하시는 어르신에게는 “예, 아들 왔어요.”라고 맞장구쳐 드리기도 합니다. 화를 내시고 폭력도 쓰시는 어르신에게는 무섭지만 다가가 손도 잡아드리고 등도 쓸어드립니다. 

기억은 나에게 의미 있거나 중요한 순간을 저장해 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억이 점점 사라져 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내 기억 속에 소중한 순간과 사람들이 점점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나의 삶을 수놓았던 순간들과 사람들이 점점 희미해져 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슬픈 일일까요? 제가 함께하고 있는 어르신들은 중요하고 의미있는 그 순간을, 그 사람을 그래도 잡으려고 애쓰고 계십니다. 다른 순간들, 다른 사람들은 다 사라져 가고 희미해져도 그 순간, 그 사람은 잡고 살아가시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무엇보다도 어르신들의 기억에 함께 머물러 드리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기억들을 저장해두고 계신가요? 여러분의 기억 보따리를 열어 보세요. 누가 있나요? 어떤 순간인가요? 그 기억들이 좋은 것이든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든 그 기억에 머물러 보세요. 그러면 좋은 기억은 배가 되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기억은 조금씩 풀려갈 것입니다. 그냥 잊히도록 내버려 두지 마세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맞이하게 될 순간, 사람을 소중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순간, 그 사람은 여러분들이 소중하게 꺼내 볼 기억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요양병원에서 어르신들과 함께하며 슬픈 순간이 있습니다. 지난번에 갔을 때에는 건강하시던 분이 오늘 갔을 때 건강이 너무 나빠지시거나 그 자리에 안 계실 때입니다. 말씀도 잘하시고 잘 걸으시던 분이 갑자기 안 좋아지시거나 돌아가시게 될 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르신들의 시간은 나의 시간과 같지 않구나. 어르신들은 기다려 주시지 않는구나.’ 그러면서 ‘함께할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은 없을 수도 있으니 지금 함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의 기억에 머물러 주세요. 나의 소중한 사람이 어떤 순간을 기억하는지, 어떤 사람을 기억하는지 함께해 주세요. 머물러 줄 수 있을 때 머물러 주세요. 우리들의 삶에서 다음은 어쩌면 불확실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함께 머물러 주는 순간이 우리에게 선물이 되고 마음의 치유가 시작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