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사회복지의 현장에서
“인생의 동행자로 살아봅시다.”


글 강구희 루시아 | 가톨릭푸름터 사무국장, 진량성당

 

중학교 때부터 책가방 속에는 늘 동전주머니와 작은 손톱깎이가 들어 있었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다급하게 어딘가 전화를 걸어야 할 때 제때 동전을 바꾸지 못해 당황했던 적이 몇 번 있었다. 그 당시 공중전화를 이용하려면 20원이 필요했다. 그래서였는지 그때부터 10원짜리가 생기면 모으는 버릇이 생겼고 자연스럽게 동전주머니를 지니게 되었다. 손톱깎이는 용모검사에도 반드시 필요했다. (지금은 휴대전화 사용으로 동전주머니가 없어졌지만 손톱깎이는 여전히 가지고 다닌다.) 그렇게 10원짜리 동전과 손톱깎이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 반의 가까운 친구들이 모두 알 정도가 됐고 친구들이 달라고 하면 그냥 주는 것에 맛을 들인것 같았다. 그리고 별것은 아니지만 친구들에게 무언가 도움을 준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지곤 했었다. 이런 마음은 더 어렸을 때부터 많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항상 ‘내가 어떤 일을 하든지 남을 위한 삶을 살면 좋겠다.’라는 막연한 바람을 늘 지니고 있었다. 생각이 삶을 낳는다 했던가. 어느 순간 사회초년생으로 사회복지시설에 근무하게 되었고 사회복지를 전공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회복지 일에 몸담은 세월이 벌써 25년이 되었다.

25년이라는 세월이 마냥 좋을 수만도 없었고 소진되어 지칠 때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서로를 격려해주는 직원들과 주변인들로 힘을 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만큼 시간이 지나고 보니 좋았던 일만 생각나고 언제나 내가 원했던 삶을 하느님께서 들어주신 것 같다. ‘당신의 뜻과 저의 뜻이 같게 하소서.’라는 기도도 많이 드렸지만, 평생 자식을 위해 기도해 오신 엄마의 기도 덕이 엄청나게 컸다고 생각한다. 그 기도 덕분에 모든 것이 부족한 나에게 든든한 힘으로 작용했고 어디에서든 당당할 수 있었다. 돌아보면 어느 순간에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씩 이루어져 있음을 발견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오롯이 살 때 더 알게 하시는 것 같다. 지적장애아동시설, 지체장애아동시설을 거쳐 현 시설인 여성복지시설에서의 사업이 선도보호시설, 청소년지원시설, 미혼모자가족복지시설로 바뀌면서 나는 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또 이곳에서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 가운데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서 나의 삶이 더 풍요로워진 것도 사실이다. ‘근묵자흑(近墨者黑)’,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진다.’는 말처럼 주변의 좋은 사람들이 나를 더 성실하게 살도록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또 감사하다.

푸름터에서 당직하던 어느 날이었다. 미라(가명) 씨가 “선생님! 영순(가명) 언니가 아기를 낳았어요.”라고 소리치며 1층으로 헐레벌떡 달려왔다. 저녁 8시 간식시간에 영순 씨가 간식을 먹으러 내려오지 않아 미라 씨가 방에 가보니 영순 씨가 갓난아기를 안고 있더라는 것이다. 분만예정일이 아직 남았지만 조산기가 있어 입원했다가 퇴원한 지 며칠 되지 않은 때였다. 저녁 먹을 때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지적경계선장애가 있는 영순 씨가 푸름터 집에서 아기를 낳은 것이다. 아기는 너무나 우렁차게 울고 있었다. 때마침 봉사하러 오신 두 분의 한의사 여선생님과 함께 영순 씨를 안정시키고 119를 불러 병원으로 갔다. 원장님과 함께 방을 치우면서 참 귀한 일을 봤고 건강하게 태어나서 감사하다는 얘기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또 한 번은 역시 당직날 간식시간의 일이다. “선생님! 선생님!”하며 부르는 소리에 달려 가보니 ○○ 씨가 전치태반으로 하혈을 하는 바람에 황급히 병원으로 이송하여 1.1kg 아기를 낳았다. 아기는 곧바로 인큐베이터로 옮겨졌고 혹시라도 아기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응급상황에 대해 의료진의 설명을 들은 아기엄마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서류에 사인을 했다. 장차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아기엄마는 물론 우리 모두 걱정과 염려스러움으로 매일 기도하며 지냈다. 그렇게 몇 개월간 모두의 걱정과 기도아래 아기는 다행히 2.6kg까지 자라서 퇴원을 했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너무나 감격스럽고 기쁜 기억으로 자리하고 있다.

 

가톨릭푸름터가 미혼모자복지시설(2015년 7월 사업변경)로 사업이 바뀌면서 언제든 위급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생길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물론 이보다 더 긴박한 일들도 앞으로 생기겠지만 누구보다 빨리 겪게 되어 다행이고 당황하지 않고 안전하게 일을 해결할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했다. 이처럼 이곳에서의 생활은 어려움도 있지만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 아기의 울음소리가 쉼 없이 들리는 축복의 공간이기도 하다. 아기를 보면 어른들의 복잡한 생각은 단순함으로 위로받는다. 그리고 건강하게 잘 자라도록 마음으로 축복을 빌게 된다. 어떤 이유에서든 푸름터에 오는 이들은 저마다 생명을 선택한 자들이다. 때론 엄마의 인생, 아기의 인생, 가족과의 관계, 세상의 시선 등을 치열하게 고민하는 그들의 보이지 않는 심적 변화는 대단하다. 그럴 때 옆에서 안정감을 주고 가족처럼 관심을 가져주고 격려하는 것은 그 어떤 심리상담보다, 그 어떤 프로그램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되고,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한 사람이 아기만을 생각하며 엄마가 되어가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태어난 아기의 생명력은 몇 백배 더 주변을 밝게 변화시키니 기적과도 같다. 그토록 반대했던 가족들도 막상 아기를 보면 마음을 돌리고 용서를 하게 된다.  

어떠한 삶의 형태이든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알고 결코 현혹되지 않은 채 ‘생명’을 선택한 엄마들! 그들로부터 태어난 아기와 함께 행복했으면 좋겠다. 나 또한 지금 이 자리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아 현명했으면 좋겠고, 내가 행복하면 주변이 저절로 행복해진다는 진리를 터득하면서 소소하지만 일상의 행복을 같이 느끼며 인생의 동행자로 오늘도 그들과 함께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 강구희 님은 (복)서정길대주교재단 가톨릭푸름터 사무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재)대구광역시청소년지원재단 실행위원, 대구청소년여자단기쉼터·일시(이동형)청소년쉼터 운영위원, 수성구지역사회보장실무협의체 위원, 미혼모자 공동생활가정 ‘샤론의 집’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