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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선교이야기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글 진정순 요세피나|상주화령성당 모동공소

 

저는 어릴 때부터 절에 열심히 다니는 불교신자였습니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스님이 되겠다는 꿈을 가진 적도 있었고, 직장생활을 할 때도 불교 행사에 적극적으로 봉사했으며 결혼한 후 에도 남편과 열심히 절에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1995년) 남편이 뇌막염으로 쓰러져 대구에서 한 달 동안 입원한 후 서울로 옮겨 반년 이상을 병원에서 보냈으나 결국 무언가를 잡지 않고는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조금이라도 움직이려면 엎드려서 기어야 하는 장애인이 되어 대구로 내려왔습니다.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던 40대 중반의 남편은 갑자기 찾아온 병고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채 매일 울고 뒹굴고 욕하고 소리 지르더니 우울증까지 겹쳐 매일 죽을 궁리만 했고, 집안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어 갔습니다. 회생을 기약할 수 없는 긴 기간에 병원비와 생활비, 두 아이의 학비 등 경제적인 고통과 함께 정신적인 고통까지 겹쳐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은 오직 절망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던 저희 집에 어느 날 깔끔한 인상의 70대 손님이 한 분 찾아왔습니다. 자신을 ‘지산성당에 다니는 레지오단원 젬마’라고 소개하며 길에서 휠체어를 타고 나온 남편을 만나 ‘천주교 안내책’을 건네주면서 집을 알게 되어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젬마 자매님은 남편은 물론 저에게도 따뜻한 위로의 말씀을 건네고 기도를 해주면서 다시 한 번 천주교에 대해 설명한 후 “이 가정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했습니다. 당장 개종하라는 부담을 주지도 않고 어머니 같이 포근한 마음에 저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젬마 자매님은 종종 안부전화를 하셨고 부담되지 않게 가끔 간식과 용돈을 경비실에 맡기면서 남편이 하루 빨리 쾌차하기를 기도해주시는 따뜻한 이웃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이웃으로 지내던 중 입교 권유를 받고 남편이 먼저 입교를 했습니다. 젬마 자매님의 따뜻하고 헌신적인 보살핌 속에 남편의 우울증과 병세가 조금씩 호전되어 갔고 남편이 세례를 받은 후 저도 천주교로 개종했습니다.

젬마 자매님과 레지오 단원들, 그리고 교우들의 순수한 사랑 실천은 저희 부부의 인생을 바꿔 놓았습니다. 그동안 세상을 향해 가졌던 원망과 불평은 화해와 사랑으로 바뀌었고, 이제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가장 소중한 행복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신 그 사랑을 젬마 자매님과 교우들을 통해 저희 부부에게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직접 체험하고 나니 받은 사랑을 다시 누군가에게 되돌려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작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의 몸이 조금씩 좋아지면서 저는 그동안 하지 못했던 선교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가두선교단에서 담당신부님으로부터 선교에 대한 마음가짐, 태도, 응대 등을 지도 받으며 예수님과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알리러 나갔습니다. 이제 그 사례를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합니다.

본당에서 새로 입주하기 시작한 아파트 입구에 선교찻집을 차리고 입주민과 오가는 분들에게 차를 권하며 신자들에게는 성당 위치와 미사시간을 안내하고, 비신자들에게는 천주교 안내책을 전해드렸습니다. 그곳에서 젊은 새댁을 만나 안내를 한 후에 만나서 반가웠다면서 하느님의 축복을 빈다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그 후 가끔 전화도 하고 일상 대화를 나누며 친교를 쌓아가던 중 성당에 가보고 싶다하여 한 달 이상을 주일미사에 함께 참례하면서 성당 분위기를 익히게 도와주었더니 입교를 하고 세례를 받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성당에 관심 있는 분이 있다면서 연락처를 받았습니다. 전화를 드리고 자매님의 집으로 방문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분의 남편이 어릴 때 성당에 다녔다는 말에 바로 전화를 드렸더니 부모님께서 시골로 이사를 하면서부터 냉담을 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신부님과 면담 후 교적을 정리하고 조당해소와 혼배까지 정리한 후 남편 분은 다시 성당에 나오시게 되었고, 자매님이 교리를 받고 세례를 받을 때에는 제가 대모를 섰습니다. 부부의 영향으로 두 아이도 성당에 나오게 되었고, 40여 년간 냉담하시던 시부모님께서도 성사를 보고 지금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선교’는 너무나 부담스럽습니다. 앞서 저의 선교사례를 간단히 소개했지만 매번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수한 실패 속에 물질과 수고의 허무함에 회의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선교는 당장의 어떤 결과를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씨 뿌리는 농부의 마음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씨를 뿌리면 하느님께서는 또 다른 누군가의 손길을 통해 기르고 수확하신다는 것을 여러 번 체험하면서 그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건강 때문에 고향에 가 있는 남편으로 인해 대구와 상주를 오가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지난해에 개인사정으로 입교하지 못한 자매님에게 안부전화를 하고, 쉬는 교우인 헬레나 씨에게는 사순시기에 먼저 용서하고 화해하는 너그러움을 가지면 예수님께서 무척 기뻐하실 거라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지금 저의 활동은 작은 나비의 날갯짓처럼 아주 작고 미미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함께할 때 분명 그것은 큰 폭풍을 일으킬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내가 너에게 해준 것처럼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에 “예.” 하고 대답해봅니다. 그리고 복음에서 생활로, 생활에서 복음으로, 기쁨에 찬 생활이 표양이며 조금 더 배려하고 사랑하고 나누려합니다.

 

“주님! 오늘도 당신께서 제 안에 앉으실 자리를 더 크게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당신의 영광을 가리는 일을 하지 않도록 이끌어주십시오. 하느님은 찬미와 영광을 받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