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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야기
“열혈사제?(2)”


글 김윤식 안토니오 신부 | 하양성당 보좌

 

먼저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지난 호에서 저는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매체를 통해 소비되어 온 ‘사제의 이미지’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작성하다 보니 분량이 애매해져 불필요한 말도 많이 하게 되었고, 제대로 완결도 하지 못한 채 글의 마무리를 다음 호로 미뤄버리는 무책임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더욱이 한 달간 드라마 ‘열혈사제’를 보고 그에 관해 얘기해 보겠다는 그 약속도 결과적으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네, 저는 그 드라마를 끝내 보지 못했습니다. 그 어떤 이유도 핑계일 뿐, 독자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제 무책임함을 사과드립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4월 20일 밤, 드라마는 큰 인기와 호평 가운데 잘 마무리되었고, 바로 그 밤에 우리도 무사히 부활을 맞았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드라마의 마지막과 부활성야가 맞물린 것은 제게 또 하나의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물론 작품을 보지 못했기에 그에 대해 깊이 다룰 수는 없지만 지난 호에 이어 ‘열혈사제’라는 드라마의 존재 자체가 제게 던져 준 그 의미에 대한 단상으로 조심스레 글을 이어 가볼까 합니다.

 

‘열혈’이라는 단어는 사전적으로 1.‘더운 피’, 2.‘열렬한 정신이나 격렬한 정열 따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의 의미를 지니는 명사지만 독자적으로 쓰이기보다는 또 다른 명사 앞에서 그 단어를 꾸며주는 역할로 더 많이 쓰입니다. 특히 특정 직업군 앞에서 그 직무의 성격을 더 강조하고 그 직무를 더욱 열정적으로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역할을 하는데, 그렇게 ‘열혈농부’, ‘열혈교사’, ‘열혈의사’, ‘열혈상인’ 등 다양한 캐릭터가 만들어지죠.

 

하지만 드라마 ‘열혈사제’가 처음 공개되었을 당시에 제작진의 의도는 그와 조금 달랐던 것 같습니다. ‘열혈’이라는 단어는 ‘사제’라는 직무를 꾸며 주기보다는 1번 의미 곧 ‘더운 피’에서 파생된 ‘다혈질’이라는 특정한 사람의 성격을 표현하는 말로 한정되어 쓰였고, 그것이 (일반적으로는) 고상하고 거룩한 이미지를 지닌 ‘사제’라는 단어와 결합됨으로써 발생하는 ‘모순’을 노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모순으로 인해 거룩한 미사 가운데 신자를 향해 삿대질하며 소리를 지르고, 험한 말과 술을 입에 달고 살며, 길거리 한복판에서 다수의 싸움을 주도하는 ‘분노조절 장애 다혈질 사제’라는 독특한 캐릭터가 탄생했습니다. 거기에 김남길이라는 멋진 배우가 다소 과도하게 느껴질 수 있는 캐릭터에 설득력을 더했고, 이 모든 요소의 조합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 매우 유효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 성공한 캐릭터가, 회차가 거듭될수록 본격적인 임무를 수행해나가기 시작합니다. ‘구담’이라는 상징적인 도시에 뿌리내린 구조화되고 조직화된 사회악과 악인들을 하나둘 헤쳐나가며 펼치는 화려한 액션과 속이 뻥 뚫리는 사이다 같은 대사들, 현실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놀라운 방식들로 흥미진진하게 처리해나가는 일들. 드라마는 이 일을 설득력 있게 수행해나갈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재구성해낸 ‘열혈사제’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통해 멋진 ‘현실 대리만족형 판타지’를 선보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드라마 ‘열혈사제’는 ‘열혈’이란 단어가 가진 ‘1번 의미(다혈질)’에서 ‘2번 의미(직무에 열정적인)’로 건너가는 과정을 그려왔고, 그 과정은 저에게 ‘열혈사제’라는 단어의 참된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도록 만들었습니다. ‘열혈사제’라 함은 자고로 ‘사제직무에 충실하고 열정적인 사람’이고, 그가 하는 언행들은 곧 그 ‘사제직무’와 밀접한 연관이 있기에, 한편으로 이 드라마는 ‘사제란 과연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왜 하필 사제여야만 했는가’라는 질문을 은연 중에 많은 사람에게 던지고 있는 작품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드라마를 통해 묘사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한마디로 압축해보자면 ‘구조화된 사회악과 불의에 맞서는 정의의 사도이자 약자들의 희망’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지난 호에서 나열했던 우리나라 미디어가 ‘사제’라는 이미지를 소비해온 흐름 안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지닙니다. 다소 과장되고 왜곡된 부분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안에 담긴 교회와 사제를 향한 사회적·시대적 요청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나아가 그렇게 새롭게 각인된 사제의 이미지가 단지 또 하나의 ‘이미지’로 소비되고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적절한 교회의 반응과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물론 그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와 준비가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보다 본격적인 문제는 그러한 이미지와 현실 속 사제들의 모습 사이의 괴리에서 찾아옵니다. 과연 우리는 그와 비교하여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문제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 성찰의 화두였습니다. 삶 자체가 가장 훌륭한 콘텐츠였던 예수님, 그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사제 역시 그 삶 자체가 하나의 대체 불가한 콘텐츠가 되어야 한다면, 신자들을 열렬히 사랑하고 직무에 열정적인 ‘열혈사제’의 모습이 과연 지금 내 안에 있는가. 사제로서 겨우 두 해를 보낸 초짜지만, 처음의 열정은 온데간데없는 저에게 이 ‘열혈사제’라는 드라마는 그 존재만으로도 큰 자극이 되었습니다. 나아가 지금 우리 가운데에는 ‘1번 의미’의 열혈사제가 많은가, 아니면 ‘2번 의미’ 열혈사제가 많은가. 제대로 된 ‘열혈사제’가 교회에 좀 더 많이 있었다면 우리 교회가 지금 직면해 있는 수많은 현실적 문제들로부터 조금은 자유롭지 않았을까 하는 따위의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제 부족한 글을 읽으시고 먼저 인사를 해주시는 분들이 점점 늘고 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뒤통수를 한 대 맞는 듯합니다. 아차, 싶어 급하게 책을 펼쳐보면 그제야 마음에 들지 않는 문장들이 눈에 띕니다. 그리고 매번 마감일에 마음 졸이며 해치우듯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제 모습부터 반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독자분들에게 감사함과 책임감을 함께 느낍니다. 남은 시간 이 글 속에서라도 좀더 ‘열혈사제’로 살아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