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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사목을 하며
교정사목 봉사회 회장단 좌담회(2)


글 김종률 스테파노 신부 | 대구대교구 교정사목담당

 

사회자(교정사목 담당 김종률 스테파노 신부) : 봉사활동을 하면서 가장 좋았던 경험이나 기억에 남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 부분이 우리 좌담회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최옥이(데레사, 포항교도소 봉사회장) : 예전에 자기 분노를 못 다스려서 화가 나면 자해를 해서 손과 발에 수갑을 채워 진정될 때까지 독방에 수감되곤 하던 재소자가 있었습니다. 그 형제가 너무 불쌍해서 직원에게 개인면담을 해 보고 싶다고 했더니 면회를 허락해줬습니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근본적인 원인은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었습니다.(편집자 註 : 가정폭력의 가정사와 이후 비뚤어진 개인사, 그리고 계속 만남을 이어가면서 돌봐 주었던 이야기는 생략한다.) 그 형제와는 출소한 후에도 계속 연락을 주고받으며 그 형제가 엄마를 만나러 갈 때면 차비도 챙겨주곤 했습니다. 하지만 부모에 대한, 특히 아버지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쉽게 변화되지 않았고 삶이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성당까지 찾아와 돈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 형제를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소식이 끊겼다가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정신을 차려서 지금은 목욕탕 세신사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요즘은 연락이 없지만 잘 지낸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안심이 됩니다. 그제야 예전의 수고에 대한 보람을 얻은 것 같아서 기뻤습니다.

 

김선희(요안나, 경주교도소 봉사회장) : 두 사람이 생각납니다. 말썽을 자주 부려 교도관들도 같은 수형자들도 싫어하던 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제가 교도소 봉사하면서 딱 한 번 울었는데 바로 그 사람 때문이었을 정도로 저도 힘들었습니다. 어느 날 본당에서 오전미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아래위로 하얀 옷을 입고 벤치에 앉아 있는 그 형제를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출소해서 인사하러 왔다기에 “나는 교도소 안에 있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이지 교도소 밖에 있는 사람을 돌보지는 않는다. 잘 살았으면 좋겠다.”라며 차비를 주어 보냈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그 형제가 한때 경주교도소 일을 많이 도와주셨던 신부님을 통해 연락을 해서는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원래 중화요리사였는데 고향에 가서 취직을 했다면서 그때부터 매달 간식비를 보내주었습니다. 지금까지 출소한 사람 중에 제일 많이 보내줬습니다. 작년 성탄 무렵 전화가 와서 요즘 장사가 너무 안 되어서 더 이상 보내주기 어렵다며 미안해하기에 그동안 보낸준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정말 고맙다고 인사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제가 봉사하는 경주교도소의 천주교 반장인데 무기수로 들어왔습니다. 그 형제에게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죽고 싶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나.”하면서 너무 괴로워하다가 옆 사람의 권유로 천주교에 나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예비신자교리를 다 배우고 세례를 받던 날 눈물을 흘리며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죽지는 않겠습니다. 이제 숨을 쉴 수 있겠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기쁘고 보람됐습니다. 지금 그 형제는 ‘경주교도소 천주교 반장’을 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좋은 기회들을 포기하고 십여 년째 반장을 하고 있습니다. 경주교도소에는 인원도 그리 많지 않은데 자기가 다른 교도소로 가버리면 천주교를 이끌어갈 사람이 없고, 또 자기는 무기수이기 때문에 어디를 가서 사나 마찬가지니까 그냥 경주에서 살겠다고 합니다.

 

안도범(요아킴, 김천소년교도소 봉사회장) : 저는 가브리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사회에서 조직폭력배 생활을 하다 소년수로 들어온 가브리엘은 리더십이 있어서 다른 아이들을 잘 이끌었고 그 아이가 자리에 앉기 전에는 아무도 자리에 앉지 못할 정도로 카리스마도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각 종교마다 반장제도가 있었는데 교도관들은 가브리엘 형제가 세례를 받자마자 반장을 시켰습니다. 반장에게는 사동 내에서 자유롭게 다니며 종교행사 인원 연출(편집자 註 : 종교행사에 참가할 인원을 파악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권한까지 있어서 교도관들도 많이 수월했습니다. 아이들은 반장인 가브리엘을 잘 따랐고 분위기도 좋았습니다. 몇 년 후, 안동교도소로 이감됐고 만나지는 못했지만 편지를 주고받고 주보나 책을 보내주면서 잘 지내다가 만기 출소를 했습니다. 그러고는 2~3년 후에 불쑥 찾아왔는데, 솔직히 만나니까 두렵기도 했습니다. 출소 후에 결혼도 하고 직장생활도 잘 하고 있다면서 자기 집에 한 번 와 달라고 해서 봉사자들과 같이 가서 축하를 해줬습니다. 소식이 끊긴 지 몇 년 되었는데 지금은 어디선가 잘 살고 있으리라 믿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회자(교정사목 담당 김종률 스테파노 신부) : 김천소년교도소의 소년수 가운데 짱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짱들이 주로 천주교 집회에 나오는 것 같습니다. 짱이 천주교 집회에 나오면 우르르 나오고 안 나오면 모두 다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재작년이었나요? 당시 짱이었던 아이는 얼굴도 잘 생기고 아주 남자답고 씩씩하고 신자는 아니었지만 꾸준히 종교행사에도 나오고 봉사자들에게도 사랑받던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가 출소한다고 했을 때 봉사자들이 모두 섭섭해 할 정도였습니다.

 

안도범(요아킴, 김천소년교도소 봉사회장) : 소년수들을 보면 진짜 순수한 아이들인데 자라온 환경을 들여다보면 전부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 중에는 결손가정, 조손가정인 아이들이 많은데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주변 환경 때문에 그런 경우가 많아서 무척 안타깝습니다.

 

최옥이(데레사, 포항교도소 봉사회장) : 우리 주변에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여섯 명이 같이 폭행했는데 부모가 있는 아이들은 다 빠져나가고 한부모 가정에 힘들게 살던 아이만 교도소에 들어갔다가 병까지 얻어 출소해 제가 데리고 다니면서 치료받게 도와주고 돌봐주었습니다. 학교는 제대로 다니지 못했지만 사회성이 좋던 그 아이는 출소후 사회생활도 성실히 하고 어느새 1남 2녀를 둔 가장으로 잘 살고 있습니다.

 

사회자(교정사목 담당 김종률 스테파노 신부) : 출소 후에 찾아오는 사람들의 경우… 원래는 개인적으로 찾아오면 안 되는데… 그렇죠? 이런 것도 알려줘서 찾아오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봉사자들이 봉사할 때에는 사랑의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봉사하지만 밖에서는 봉사자의 사생활이 보호받아야 한다. 출소 후에 개인적으로 봉사자를 찾아가거나 만나는 것은 좋지 않다. 만일 만나고 싶거나 전할 말이 있으면 ‘교정사목 사무실’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회자(교정사목 담당 김종률 스테파노 신부) : 이번에는 박영자 회장님의 차례인데 저는 예전에 했다는 체육대회 이야기를 먼저 듣고 싶습니다. 대구교도소에서는 매년 재소자들 체육대회가 있었다면서요?

 

박영자(벨라뎃다, 대구교도소 봉사회장) : 그동안 안 한 지 10년쯤 됐는데 1년에 한 번씩 종교별, 구역별(용접, 토목, 양재 등등)로 나누어 체육대회를 했습니다. 종목은 족구, 배구, 2인 3각, 장애물 달리기, 릴레이 등을 했는데 모든 게임은 토너먼트로 미리 예선전을 치루고 당일에 결승전을 했습니다. 체육대회를 하면 언제나 천주교가 이겼습니다. 봉사자들도 목이 터져라 응원했습니다.

 

김선희(요안나, 경주교도소 봉사회장) : 경주교도소에서도 체육대회를 했었는데 신종 플루가 유행하면서 없어졌어요.

 

최옥이(데레사, 포항교도소 봉사회장) : 포항교도소도 그때부터 없어졌어요.

 

사회자(교정사목 담당 김종률 스테파노 신부) : 예전에는 종교행사에 봉사자들이 직접 음식을 준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준비하셨던 음식 가운데 기억에 남는 음식은 어떤 것인가요?

 

박영자(벨라뎃다, 대구교도소 봉사회장) : 네, 무의탁 수형자나 모범수들 가족 면회 때 교도소 측에서 종교를 떠나 천주교에 가장 많이 의뢰했습니다. 그래서 밤을 새워 음식을 준비하곤 했습니다. 제가 했던 음식은 밥과 국을 기본으로 불고기, 김밥, 유부초밥, 잡채, 닭고기, 여러 과일, 그리고 전 등등 보통 잔칫상에 올라오는 음식들은 거의 다 했어요. 봉사자 한두 명이 한번에 10인분 정도씩 준비했는데 불고기와 국은 찜통째 들고 가곤 했습니다. 그때는 검식이 까다롭지 않아서 웬만한 음식은 다 들어갔는데 지금은 많이 까다로워졌습니다. 당시에 그분들은 참 따뜻한 사랑을 먹는다며 눈물을 삼키며 먹곤 했어요.

    

사회자(교정사목 담당 김종률 스테파노 신부) : 그럼 이어서 기억에 남는 일이나 사람에 대해서 말씀해주시죠.

 

박영자(벨라뎃다, 대구교도소 봉사회장) : 저는 기억에 남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편집자 註: 이야기 하고픈 사람이 많았으나 두 사람의 이야기만 옮긴다.) 그 중 한 사람은 연극을 했던 사람인데 교도소 안에서 3년에 걸쳐 연극을 준비해서 재소자들 500명 앞에서 공연을 했습니다. 교도소 측에서는 작품이 좋아서 외부인들을 초대해서 세 차례나 더 공연할 만큼 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때가 대구교도소 내의 천주교 활동이 가장 활발할 때였기에 성탄, 부활 때에는 180-200여 명이 서로서로 붙어 앉아도 자리가 부족해서 벽에 기대어 서서 미사를 봉헌하기도 했습니다. 23년 만에 가석방으로 출소한 그는 자신이 받은 사랑을 베풀어야 된다는 마음으로 5명에게 공부를 가르쳐서 그 중에 2명을 대학교에 보내면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도 통화했는데 사회에 봉사하는 것에 마음이 있어서 사회복지학과 진학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 한 사람은 2000년 4월 5일 식목일에 처음 만난 김 요한입니다. 그 전까지 저는 수형자들을 개인적으로 만나려고 하지 않았는데(편집자 註: 개인 접견을 말한다. 봉사자들은 무의탁 수형자나 최고수 수형자 등을 접견하는 봉사도 하고 있다.) 어느 봉사자가 그 형제는 너무 착하니까 좀 챙겨달라고 했습니다. 그 형제가 세례를 받을 때 김종철 토마스 형제(편집자 註: 당시 대구교도소 직원)가 대부를, 제가 대모를 섰습니다. 그는 13년 동안 취사반장을 할 정도로 올곧고, 교도관들도 이 형제의 가석방을 기다릴 정도로 잘 살았습니다. 28년 만에 가석방으로 출소한 그 형제는 빠스카교화복지회에 입소해서 빠스카식품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김 요한 형제와의 관계는 저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가 함께 동참했습니다. 남편도 아들딸도 김 요한 형제를 가족처럼 생각하며 접견을 하곤 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요한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강경중(루치아노, 대구구치소 봉사회장) : 저는 오랫동안 봉사해 오신 여러 회장님들과 달리 봉사기간이 짧아 기억에 남을 만한 경험이 별로 없습니다. 대구 구치소에 복역하고 계신 분 중에 대구 시내 폭력조직에서 유명 한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하지만 심성이 여립니다. 그 형제와 미사 전 짧은 대화를 나누면서 ‘내가 폭력배들에게 거리감을 두는 것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살아가면서 누구나 죄를 짓는데 교도소에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우리와 다르게, 비뚤어진 시선으로 보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분들 중에는 굉장히 순수하고 너무 착해서 뭐라도 더 해주고 싶은 분들도 있습니다.

저는 본당에서 위령회도 맡고 있는데, 얼마 전 한 장례식장에 가게 됐습니다. 그곳에서 하얀 가운을 입은 장례지도사가 인사를 하는데 누군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잠시 후 그 장례지도사가 “봉사자님!” 하고 부르는데 그제서야 구치소에서 만났던 수용자라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때 기억이 많이 남고 자신을 도와줘서 고맙다면서 반갑게 인사하더니 친구에게 받은 볼펜 세트를 제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참 순수하고 밝은 그 형제와 그렇게 헤어졌습니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 ‘내가 삶의 태도를 바꾸고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저는 교정사목 봉사를 참 잘 시작했고, 대구구치소에 몸담길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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