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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치유의 해’
잃어버린 시간들


글 이영승 아우구스티노 신부 | 통합의료진흥원 전인병원 원목 담당

 

 

여러분은 계절을 잘 타나요? 저는 쓸데없이 유행에 민감한지라(?) 계절을 참 잘 타는 것 같은데, 그중에서도 가을을 제일 잘 타는 것 같습니다. 괜스레 마음이 차분해지고, 평소에 읽던 책도 심각한 책보다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에 손이 더 가는 걸 보면, 시대가 아무리 요즘처럼 답답하고 막막해도 삶은 살아지는 것 같습니다.

정호승 시인이 말한 것처럼 ‘외로우니까 사람’이라지만 저는 제가 살아있음을 가장 절실히 느낄 때가 이 외로움을 이겨내려고 안간힘을 쓸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누구도 외로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어느 날 문득 외로움이 저를 찾아오면 저는 그 외로움에 빠져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서 자꾸만 무언가를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게 한다고 저를 둘러싼 외로움이 쉬이 가시지 않음을 잘 알면서도 말이지요.

그래서일까요? 요즘에는 산책이 너무 하고 싶어졌습니다. 딱히 목적 없이 그냥 걸으면서 불어오는 바람도 맞고, 걸음걸음 내딛으며 생각도 정리하는 시간을요. 그 산책 시간을 한번 가지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너무 하고 싶은 일’까지 되어 버렸나 싶지만, 어쩌면 몸은 쉽게 지쳐버리고 마음엔 여유가 점점 더 사라져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신학생 때는 매일 저녁 식사 후에 산책을 하게끔 되어 있어서 그 시간의 소중함을 잘 몰랐는데, 요즘은 누군가 저더러 ‘반드시 이 시간에는 나가서 걷다가 와!’하고 강하게 말해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기도 합니다. 그럼 마지못해 나가 30분 정도 걷다 올 수 있을 테니까요.

걷는다는 것은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들에겐 너무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갓난아기가 두 발로 서서 걸었을 때의 감격을 기억하는 부모님들이라면 우리가 두 발로 걷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놀라운 체험이 될 수 있습니다. 내 다리로, 두 발로 어디론가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작은 기적의 순간이기도 하지요.

병원에서 매일 마주치는 많은 환우 분들 중에는 이 기적의 체험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저마다 이유는 다르지만 내가 내 발로 땅을 딛고 한 걸음 내딛는 것이 너무도 간절하신 분들입니다. 병원 복도에서 걷기 운동에 열심인 한 환우 분이 계신데, 유난히 저와 자주 마주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늘도 열심이시네요, 응원드려요!” 하고 말씀드렸더니 뜻밖에 이런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잃어버린 시간들이 너무 많으니 이제라도 다시 찾아야지요.” 저를 지나치시며 던지신 한마디였지만 그 말이 저로 하여금 한참을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들. 이 말이 왜 그렇게도 마음에 사무쳤을까요? 누구나 살면서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고 또 되찾고 한다지만 시간을 잃어버렸다는 그 말씀이 그날은 너무도 깊은 인상으로 남아서 저만의 잃어버린 시간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 저의 상황에서 가장 되찾고 싶은 시간이 있다면, 너무나 당연하게 신학생 시절의 산책 시간입니다. 노을이 살짝 걸쳐진 해질녘에 하루 종일 있었던 일을 이야기 나누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면 주머니에서 묵주를 꺼내 들고 삼삼오오 무리지어 성모님께 기도드리던 그 시간말입니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간이 여전히 그립습니다. 물론 저 혼자서 길을 걸으며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묵주기도를 바칠 수 있지만 그날의 감성은 이제 제 안에서만 되풀이될 뿐이겠지요.

매일 퇴근 시간이 되면 병원 주차장에는 몇몇 환우 분과 보호자 분들이 병원 주차장 군데군데에서 바람을 쐬고 도로를 달리는 차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계신 것을 발견하곤 합니다. 찬바람을 쐬는 것이 조금 걱정이 되긴 하지만 그래도 그분들에게 그 시간을 마음껏 만끽하시라고 권해 드리곤 합니다. 하루 종일 병원 안에서 재활치료를 하시다가 그제야 자신들만의 하루 갈무리 시간이 주어지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언젠가 그들 또한 지금의 이 시간이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고 보면 잃어버린 시간은 지나가 버린 것일 뿐, 다른 방법으로 그 시간을 되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학생 때처럼 산책을 하다가 삼삼오오 모여 운동장을 돌면서 묵주기도를 바치는 그 시간이 다시 돌아오진 않겠지만, 오늘 저만의 산책 시간과 저만의 묵주기도 시간을 마련하는 것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그날의 감성과 마음가짐은 조금 다른 형태로 변했을 뿐 그런 시간이 제 삶에서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판단일 것입니다.

우리는 희망하는 사람들입니다. 내일은 더 건강해질 것이라 희망하고, 앞으로는 좋은 일들이 펼쳐질 것이라 희망하며, 언젠가는 예수님처럼 부활하리라 희망하는 사람들입니다. 매일 절망하기 위해서 아침에 눈을 뜨는 사람은 없습니다. 조금이나마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꿈꾸며 하루를 시작하지요.

그러니 여러분도 혹시나 문득 떠오른 잃어버린 시간이 있으시다면, 마냥 그 잃어버린 것들에 사로잡힌 나머지 지금의 소중한 시간을 또 잃어버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보다는 지금 나에게 희망이 되는 일을 시작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형태는 다르겠으나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방법이기도 할 테니까요.

날씨가 조금 쌀쌀해졌습니다. 하지만 이제라도 ‘너무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습니다. 산책 말이지요. 서로 생활패턴이 바뀌어버려서 당장 옆에서 시시콜콜 이야기를 나눌 누군가가 없어도, 함께 묵주알을 굴리며 성모송을 바칠 동료가 없어도 오늘 제가 하는 산책은 또 그 나름의 의미가 있는 시간이 되리라 희망합니다.

여러분도 오늘은 어디든 좋으니 한번 걸어보시면 좋겠네요. 예전에 했던 산책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겠지만 오늘만의 감성은 충분히 느낄 수 있으실 겁니다. 그리고 오늘의 산책은 오늘뿐입니다. 그러니 마음껏 그 시간을 즐기시면 좋겠습니다. 아, 요즘 날이 차니 옷은 따뜻하게 입으실 것을 꼭 권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