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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평협 가정 선교 체험 공모전 - 바오로사도상(대상)
아빠의 약속


글 강선옥 릿다 | 경산성당

2020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경산성당 교중미사에서 12명의 세례식이 있었다. 그중에 감색 양복의 노신사가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주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어쩌면 이 세상을 떠난 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을까?

남편은 술과 담배를 하지 않으며 빈틈없는 성격과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하다 보니 직장에서는 인정을 받았겠지만 가정에서는 처자식을 힘들게 했다. 자신은 절대 실수를 하지 않는다는 교만함에 처자식의 작은 잘못이나 실수는 용납되지 않았으며 자기 방식대로 자기 틀 안에 식구들이 따라 주기를 원했다. 그런 사고방식으로 인해 나뿐만 아니라 자식들과도 원만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음은 물론이고 개개인의 의견마저도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동네에서 소문난 효자였던 남편은 우리 가정은 뒷전으로 하고 어머니를 먼저 생각하니 거기에서 오는 갈등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우리 부부에게는 이 세상에 태어나 단 한 번도 앉아 본 적도 없고 제 손으로 밥 한 숟가락도 떠 먹어보지 못한, 그래서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으면 하루도 살 수 없는 중증뇌성마비를 가진 딸이 있었다. 아픈 아이를 데리고 물리치료를 받기 위해 매일 왕복 한 시간 이상 버스를 타고 다녀야 하니 솔직히 지치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남편은 아픈 자식보다 온통 시어머님 생각뿐이다 보니 남편 눈에는 내가 시어머님을 제대로 돌봐드리지 않는 듯 목을 조이니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지만, 나에게는 아픈 아이가 첫애이기도 하고 아직 젊어서 그런지 희망을 가지고 하루하루 힘든 생활 속에서도 기죽지 않고 항상 밝고 당당하게 생활했었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엔 늘 허전한 그 무엇이 자리잡고 있었다.

하루는 신자인 언니와 동생을 따라 성당을 찾아가서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도대체 나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편안하게 해주는 이곳은 어떤 곳일까?’ 하는 궁금증에 성당에서 하는 교리를 받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다니다 보니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은 나를 힘들고 슬프게 할 수 있겠지만 주님과 성모님은 나를 힘들고 슬프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런데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남편에게는 성당에 같이 가자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한 채 딸은 ‘보나’, 그리고 나는 ‘릿다’로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나의 신앙생활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한번은 레지오 활동을 위해 집을 비운 사이에 도둑이 들었는데 남편은 원망스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이유는 내가 신앙을 가지고 단체에 가입해서 활동을 하게 됨으로써 집을 비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로 인해 나는 레지오를 6~7개월 동안 쉬어야 했고, 남편은 주일미사에 가는 나를 보지 않으려 자는 척도 했었다. 남편 눈에는 성당에 나가는 내가 눈에 가시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언젠가 심한 말다툼 중에 남편은 화를 삭이지 못하고 방에 있던 십자가와 성모상과 촛대를 마당에 내던져 부수어 버렸다. 그 장면을 목격한 나는 마치 거리에 옷이 벗겨진 채로 서 있는 듯, 이전까지는 느껴보지 못했던 느낌을 받았다. 또한 마지막 희망마저도 사라져 버리는 듯 했다. 결국 손가락이 뒤로 다 젖혀질 정도의 엄청난 충격을 받고 헉헉거리고 있으니 남편은 그 모습에 놀라 나를 주물러 주었고, 그 다음날 남편은 허락까지는 아니지만 미안한 마음에서인지 본인이 부수었던 성물들을 모두 새로 사라며 돈을 주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주일미사 참석이나 성지순례를 가게 될 상황이 생기는 등 성당과 관련된 그 모든 활동에 대해 여전히 남편의 눈치를 봐야 했던 내가 지금까지도 신앙생활을 계속 이어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딸의 기도와 많은 위로 덕분이었다.

보나는 손을 전혀 쓸 수 없어 문에다 색종이로 묵주를 만들어 눈으로 매일 묵주기도 20단(교황님, 주교님, 이 세상의 모든 사제와 수도자를 위하여 5단, 엄마, 아빠, 가족을 위하여 5단, 지인들이 부탁하는 기도 5단, 죽은 영혼들을 위하여 5단)을 바쳤고 삼종기도와 아침, 저녁기도와 식사 전·후 기도, 교황님과 주교님, 사제와 수도자를 위한 기도, 오후 3시에는 자비의 기도, 부모를 위한 기도, 연도, 자신의 선종을 위한 기도 등과 엄마의 레지오 협조단원으로서 매일 까떼나를 모두 외워서 바쳤다. 어릴 때 우리나라 뇌성마비 최고 권위자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분께서 나에게 ‘딸아이가 똑똑하니 잘 키우세요.’라고 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딸아이는 뇌성마비이지만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초·중학교는 휠체어로, 고등부는 평상에 누워서 특수학교를 포함한 12년을 무사히 졸업을 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딸아이가 몸은 심한 장애를 갖고 있지만 사람들과 공감을 형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 주님께서 참 공평하신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보나는 하루하루 힘들게 살았지만 그런 와중에 특히 세 가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살았다. 첫째는 주님께서 언제든지 ‘가자.’ 하시면 ‘예.’ 하는 한마디만 하고 따르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엄마는 이 세상에서 자기를 낳고 키워 주었지만 천상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꼭 만나러 가는 것, 셋째는 손을 전혀 쓸 수 없기 때문에 물 한 모금 마시는 사소한 것이라도 항상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졌다. 나에게 ‘이 세상에 엄마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하느님께 잠깐 빌려쓰는 거에요.’ 라며 과욕은 화를 부른다고도 했다. 하느님은 어디든 계신다면서 한 달에 한번 봉성체 할 때 자주 고해성사를 하려고 하니 ‘보나는 천사니까 성사를 자주 안 봐도 된다.’는 신부님 말씀에 ‘저는 천사가 아니에요. 하느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라고 답했다. 본당 교우들 중에는 보나가 기도하기 위해 태어난 아이 또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아이라고도 했다.

재작년 종합병원에서 가족 곁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두 달이라 했지만 1년 6개월을 더 우리 곁에 머물렀다. 작년 가을 병원에 입원한 후 괜찮아져서 퇴원했는데 퇴원한 그날 밤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9월 11일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에 매년 보내주던 꽃바구니 대신 작년에는 자기가 꽃이 되어 하늘나라로 갔다. 평소 고통 없는 하늘나라로 가는 기쁜 날 분홍색 관보를 덮어주고 제대로 향해 갈 때 양쪽에 꽃길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보좌신부님과 수녀님, 제대회원들의 수고로 해바라기 꽃으로 제대 장식과 예쁜 꽃길, 보나 관보 위 예쁜 꽃장식, 촛대까지 꽃장식이 되어 참 아름다웠다. 장례미사였지만 흡사 딸을 시집보내는 것 같았다. 보나가 살아있을 때 아빠가 성당에 나가길 누구보다 간절히 기도했었다. 남편도 이제 보나가 더는 우리와 함께 있음이 힘들다는 생각이었는지 보나에게 “아빠가 뭘 해줄까?” 라는 말에 보나는 즉시 “아빠, 다음에 천국에서 나를 만나려면 하느님을 믿고 성당에 나가세요.” 그 말에 꼭 그렇게 하겠다고 하니 딸은 안도의 표정을 짓는다. 그렇게 하여 보나가 죽기 전에 아빠가 성당에 나가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42년을 누워서 살면서 짜증 한번 부리지 않고 매일 기도하고 오직 주님과 성모님을 생각하며 죽음마저 의연하게 받아들인 보나와 또 보나를 떠나보내는 장례미사에서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잘 살면 되지. 종교 가질 이유가 없다.’던 남편의 부정적인 마음이 많이 흔들렸으리라 생각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비신자로 성당이 낯섦에도 불구하고 백 일 동안 보나를 위한 위령미사에도 딸과의 약속을 지키려 꼬박꼬박 참례하였다. 드디어 딸의 소원대로 작년 11월 17일 입교하여 교리도 열심히 받았으며 부활 때 받을 세례가 코로나 땜에 미루어져 성모 승천 대축일에 받았다. 그리고 바로 레지오 입단도 했다. 주일미사 때 다른 부부들이 함께 미사참례하는 것을 많이 부러워 했는데 이제는 주일미사와 평일미사를 남편과 같이 할 수 있음이 너무 행복하다. 보나가 살아있었다면 휠체어에 태워 셋이서 미사에 참례했더라면 더 좋았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보나가 하늘나라로 간 지 어언 1년이 되어가니 더욱더 보고 싶어진다.

한번은 딸이 나에게 “엄마가 42년 동안 삶아 씻어 준 제 천기저귀를 하나하나 묶어 하늘에서 내려 줄게요. 그걸 잡고 하늘나라로 저를 보러 오세요. 해바라기 꽃밭에서 기다릴게요. 엄마는 해, 저는 해바라기 꽃, 항상 해바라기 꽃이 해를 쳐다보듯이 엄마와 저는 해바라기 사랑을 하잖아요.” 라고 했다. 지금도 보나가 너무 보고 싶어 많이 힘들고 괴로워도 훗날 내가 하늘나라에 갈 때는 보나가 두 다리로 걸어서 활짝 웃으며 나를 마중 나오리라 확신하며 위로를 삼는다. 딸이 곁에 있을 때는 내 몸 하나로 둘이서 사느라 바빴는데 지금은 남편이 레지오 예비단원이라 매일 해야 하는 지시기도와 성당에 관한 모든 것을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고 삼종기도, 아침·저녁기도, 식사 전·후 기도를 꼭 같이 하다 보니 딸이 옆에 있을 때만큼 바쁜 건 매 한가지인 것 같다. 아직은 긴가민가하며 혼자서도 찾아 해야 하는 기도를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새삼 여러 가지로 만감이 교차한다. 왜냐하면 남편은 신을 믿을 바에는 내 주먹을 믿으라고 할 정도로 자기 자신만을 믿었었기에 그런 남편이 이렇게까지 세례를 받고 성당에 나갈 것이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 했었다. 주위 지인들도 남편이 종교를 가질 거라고 생각도 못 했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할 정도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보나는 오랫동안 봉성체만 했었고 보나의 아픈 상황과 이름만 알 뿐, 막상 얼굴을 모르는 교우들이 대부분이지만 많은 신자들이 보나를 위해 연도를 바치러 와주었고, 뿐만 아니라 보나 장례식이 추석 전날이라서 바쁜 와중에도 장례미사에 참석하는 고마운 모습을 보고 딸을 보내는 비통하고 슬픈 마음을 위로받으며 신앙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해 본다.

돌아보면 경산성당과 우리 가정은 뜻깊은 일이 많았다. 9년 전에 아들의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혼배미사를 했고, 작년에는 우리 보나의 아름다운 장례미사를 했으며, 올해는 남편이 주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세례성사가 있었다. 딸의 소원에 못 이겨 “꼭 성당에 가마.” 라고 약속한 것 때문에 신의 존재를 그렇게 부정하던 남편이 주님을 받아들였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이다. 뿐만 아니라 주님을 만나게 되면서 남편의 성격이 많이 부드러워졌고 웃음도 전보다 많아지게 되면서 우리 부부가 조금 더 사이가 좋아지게 된 것 같다. 지난날 딸애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주님께서 그 모든 잘못을 용서와 사랑으로 치유해 주시리라 믿는다. 오늘도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남편에게 격려와 사랑을 보내며, 우리 가족 모두 항상 주님 사랑 안에서 살아가길 기원해본다. “주님께 그 모든 것 의탁하오니 저의 가정을 축복하여 주소서. 아멘.”

 

* 이번호부터 3회에 걸쳐 한국평협에서 주최한 ‘한국평협 가정 선교 체험 공모전’에서 수상한 대구대교구 소속 신자의 작품을 소개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