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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골목신앙
진짜 믿음은 50원을 눈감아 주는 것


글 이재근 레오 신부 |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너같은 것들은 잡생각이 많아서 믿음이라는 걸 모르지? 믿는다는 게 뭔 줄 아냐? 그 사람이 날 속여도 끝까지 속아 넘어가면서도 그냥 믿어버리는 거. 그게 믿음이다.” -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 중에서

 

초등학교 5학년 때 일이다. 어머니께서 미용실에서 머리카락을 자르고 오라며 2,000원을 주셨다. 항상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적이었던 나는 머리카락을 잘랐고 비용으로 1,000원을 지불했다. 그렇게 임무를 완수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우연히 오락실을 보게 되었다. 어떤 아이가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오락실에 가는 걸 엄청 싫어하셨다. 그 당시 모든 면에서 완벽했던 나에게 두 가지 단점이 있었는데, 외모와 공부였다. 외모는 방법이 없으니 놔두고 공부라도 어떻게 살려보자 생각하셨던 어머니께서는 내가 오락실에 가는 것을 막으시고 그 시간에 차라리 밖에 나가서 움직이며 놀던가 아니면 집에서 공부를 하라고 하셨다. 그렇게 오락실과의 인연을 끊어가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오락실 앞에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오락실에 갔다는 사실을 들키게 되면 종아리가 멍들 때까지 맞겠지? 하지만 오락을 한 것도 아니고 잠깐 구경만 한 건데 그걸 가지고 때린다면 말이 안 되지… 그래! 잠깐 구경만 하다가 가자.’ 결국 잠깐 구경만하기로 마음먹은 나는 어느 순간 동전 교환기에 1,000원짜리 지폐를 넣은 후 오락을 하고 있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공부 빼고 모든 게 완벽했던 나는 그 오락을 엄청 잘했다. 당연히 끝판까지 갔고 결국 승리했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시, 집으로 가려고 일어선 내가 처음으로 목격한 것은 오락실 문 앞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어머니였다. 어머니들은 참으로 신기하다. 동네에 오락실이 여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오락실이 아닌 놀이터에 갔을 수도 있는 건데 어떻게 내가 있는 곳을 늦지 않게 정확하게 찾아내셨던 걸까? 만약 다른 곳을 먼저 찾아보셨더라면 그 틈에 집으로 갈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어머니에게 끌려 집으로 가던 길은 군복무를 하던 시절 휴가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하던 길보다 더 지옥 같았다.

어머니께서 물으셨다. “오락실에 가지 않기로 엄마랑 약속했는데 왜 갔어?” 그래서 나는 대답했다. “오락실 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오락하던 친구가 지금 급하게 집에 가야 된다며 대신 좀 해달라고 했어.” 이렇게 대답하고 나서 나는 ‘내 자신이 천재가 아닐까?’ 생각했다. 너무나 완벽한 거짓말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어머니께서는 미용실 비용이 얼마였냐고 물으셨고 나는 당당하게 1,050원이라고 말씀드렸다. 왜냐하면 오락한다고 50원을 썼기 때문에 지금 내 수중에는 950원이 남아있었고, 오락하면서 쓴 50원을 미용실에서 쓴 것으로 말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막힘없이 계산을 해서 정확하게 말하는 나 자신을 보며, 순간 수학천재가 아닐까? 생각도 했었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참 웃긴 대답이었다. 어떤 미용실도 비용을 50원 단위로 받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 어머니께서는 알겠다고 말씀하시고 내 말을 믿어주셨다. 말도 안 되는 나의 거짓말을 알고 계셨으면서도 나를 믿어주셨던 것이다.

 

우리는 흔히 믿음과 신용을 헷갈려 한다. ‘신용’은 쉽게 말해 믿을 만한 사람을 믿어주는 거다. 성경에도 나와 있듯이 도둑도 그대로 돌려받을 것을 알고 있다면 돈을 빌려줄 수 있는 것이 신용의 한 예이다. 반면 ‘믿음’은 그렇지 않다. 믿음에 대한 명확한 표현을 예전에 드라마에서 봤다. 소매치기범으로 살아가는 한 남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에게 두 번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그 여자는 어떤 사건으로 인해 그 남자를 믿지 못하고 오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또 다른 인물이 그 여자에게 해주는 말이다. “너 같은 것들은 잡생각이 많아서 믿음이란 걸 모르지? 믿는다는 게 뭔 줄 아냐? 그 사람이 날 속여도 끝까지 속아 넘어가면서도 그냥 믿어버리는 거. 그게 믿음이다. 근데 걔는 안 속여.”

 

어릴 적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어머니를 통해 체험했으면서도 마흔이 넘은 나는 여전히 잡생각이 참 많은 사람이다. 내 기도가 이루어지면 하느님을 믿었고,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을 믿지 않고 원망했다. 그리고 나는 당당히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해왔다.

함께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과연 나는 하느님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그분에 대한 나의 마음이 세상 누구나 할 수 있는 신용인지, 아니면 누구나 할 수 없는 믿음인지 말이다.

분명한 것은 하느님은 우리를 믿으신다는 점이다. 내일 우리가 똑같은 말로 거짓말을 할지라도 오늘 나를 믿어주시는 분이 우리가 의지하는 ‘신’이다. 그리고 그분의 믿음은 우리가 더 이상 속이지 않고 떳떳한 사람이 될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이런 하느님이시기에 오늘도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시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