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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動)하다
가끔 물을 주려고 합니다


글 김관호 리카르도 신부|수성성당 보좌

 

나는 요즘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요즘 사람답게 ‘식집사(반려식물을 키우는 사람)’가 되어서 방을 초록으로 물들이고 있다. 사실 요즘 사람이라서 식집사가 된 것은 아니다. 우연히 들어간 식물농원에서 초록빛의 위로에 마음이 홀려 식물들과 살아가게 되었다.

 

그렇게 그리고 저렇게 인연이 닿아서 아홉 개의 화분을 방 안에 들여놓게 되었다. 나의 소중한 초록 아이들 중 ‘콩크’라고 부르는 율마를 가장 아낀다. 물을 말리면 안되고, 공기 순환과 일조량이 중요한 율마의 특성상 콩크에게 온갖 정성을 쏟아붓는 건 당연한 일이다. 콩크를 처음 만났던 방에선 일조량이 부족한 것 같아 식물등으로 부족한 일조량을 채워 주기도 했었다. 세상에서 비를 맞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내가 빗물이 식물에게 좋다는 이야기를 듣곤 빗물을 받기 위해 비 오는 날을 기다린다. 그리고 지금은 미세먼지 심한 날이라도 콩크가 바람과 햇빛을 많이 받을 수 있도록 창가에 콩크를 모셔 두고 있다.

 

이런 정성을 두고 사람들은 ‘극성이다’, ‘유별나다’고 혀를 차기도 한다. 사람들의 말을 차마 부정할 순 없다. 사제관을 오래 비워 둘 땐 콩크를 대신 맡아 줄 사람을 찾아다닌 유별난 나의 모습을 스스로 즐거워하고 사랑했기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실 부끄럽지만… 나는 콩크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스쳐 지나온 수많은 사람과 기억에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더 마음이 끌리는 많은 것에게, 내 것이라고 여겼던 수많은 것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

 

그럴 깜냥도 되지 않으면서 어떻게든 무엇이든 해 보려고 했다. 나가 떨어지기도 했고 무엇이 되어질 수도, 되어줄 수도 없는 내 초라한 깜냥이 서글퍼지기도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보들보들한 콩크의 잎을 쓰다듬고, 내 손에 서린 콩크의 향기를 맡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콩크가 변했다. 보드러움과 율마만의 그 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콩크를 쓰다듬으면 따끔함이, 그리고 손에는 내 체취만이 느껴졌다.

 

콩크가 아프다고 했다. 그냥 감기 같은 것이 아니라 죽을 수도 있는 병이라고 했다. 콩크의 아픔은 나의 과잉보호에서, 점점 더 어른이 되어가는 콩크의 작은 가지 하나라도 잃기 싫은 그런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빡빡해진 줄기와 가지들로 인해 콩크의 잎이 숨을 쉴 수 없어 병에 걸린 것이었다.

 

잘라진 단면이 병들지 않도록 가위를 소독했다. 작은 가지와 너무 아쉬운 여러 줄기를 잘라냈다. 이렇게 끊어내고 잘라내면 콩크의 건강이 좋아질 거라고 했다.

콩크는 다시 좋아지고 있다. 부디 그렇게 되길 바란다. 내가 놓아주지 못해 굳어져 갔던, 커 감의 흔적들을 떨쳐버리고 다시 부드러워지고 있다. 콩크는 나의 어리석은 집착과 걱정과는 달리 씩씩하게 자라고 있다. 가지들이 사라지고 드러난 콩크의 줄기는 더 큰 율마가 되기 위해 나무가 되어가고 있다. 콩크는 지극정성을 들여야 하는 아기 율마가 아니었음을 철없는 나에게 알려줬다.

 

모든 것을 지킬 수 없었다. 나의 빈틈과 공백과 상관없이, 지키고 싶었던 내가 사랑한 것들은 스스로 자신을 지켜내고 자신을 키워가고 있다.

 

이 당연하고 자명한 사실을 보호라는 핑계와 명분으로 외면했다. 나의 빈틈과 공백이, 내가 사랑한 모든 것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호하려 했다. 스스로 키워가는 그 모습을 바라볼 용기와 힘이 없었다.

 

내가 사랑했고 사랑할 모든 것이 병들지 않고 소중하게 남을 수 있도록 그들의 자리를 만들어 가는 것이 바로 사랑임을 나는 배운다. 그리고 떠나가 버린 그들이 병들지 않도록 나를 다듬어 내는 것이 사랑이었음을 되새긴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예뻐지고, 고고해지는…, 그래서 나의 요란스러운 관심을 부담스러워하는 콩크를 바라보며 느낀다. 그저 가끔 물을 주듯 얽매이지 않은 채 사랑했고 사랑하는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었다. 이렇게 나는 또 사랑을 배워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