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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動)하다
잠시 걷다


글 김관호 리카르도 신부|수성성당 보좌

개인적으로 축하 받을 일이 생겼다. 반가운 사람들이 축하해 주려고 해서 약속을 잡았다. 그래서 차를 두고 걸어갔다. 약속 장소를 향하면서 걷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었던 신학교에서의 시간을 버티게 해 준 것은 “잠시 걷자.”라는 말이었다. 역마살이 있었던 것도, 신학생으로 사는 것에 불만을 느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날이 너무 좋아서, 커피가 떨어져서, 책을 사야 해서, 논문 진도가 안 나가서 등등 별의별 이유로 산책을 나섰다.

 

산책을 하며 마주치는 사람들을 바라보곤 했다. 전화를 하는 사람들의 이런저런 이야기에 귀가 솔깃해지기도 했다. 때로는 신천에서 돗자리를 깔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들의 여유를 동경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큰 의미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쓸모없다고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나눴다. 말장난과 돌이켜 보면 부끄러운, 근거없는 자의식이 충만한 그런 말을 주고 받았다. 끊임없이 말을 쏟아 내면서 걷다 보면 목이 말랐다. 커피를 마시기도 했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철없어 보이는 우리의 모습을 좋아하기도 했다.

 

거리의 모습은 그렇게 달라지지 않았다. 단지 우리가 갔었던 가게들이 사라졌을 뿐이다. 그래서 설명 될 수 없는 변화들 때문에 함께 걸었던 그 거리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전에 알지 못했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익숙했던 공간이 새롭게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이제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약속 장소에 도착한다. 약속 시간보다 10분 빨리 도착했다. 축하 받을 일을 기다리는 것인지, 축하를 해 줄 사람들을 기다리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축하 받을 장소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으면 부끄러울 것 같았다. 발바닥이 화끈거렸지만 조금 더 걷기로 했다. 그런데 이유없이 배회하는 것도 일행에게 부끄러운 일일 것 같아 벚꽃을 찍었다. 새삼 부끄러운 것이 많아져서 큰일이다 싶었다. 그런데 문득 벚꽃을 찍는 것도 부끄럽다 싶었다.

 

결국 정처없이 배회하는 것을 일행에게 들켰다. 머쓱한 입을 가려주는 마스크가 있어 빨개진 볼을 숨길 수 있어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봄바람에 머리가 헝클어져 걸어 다닌 것을 숨길 수가 없었다. 맥주를 한잔 하면서 숨을 돌렸고, 축하와 감사의 마음을 주고 받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걸어왔던 그 길을 다시 걸으며 함께 나눴던 이야기를 곱씹었다. 내 기억은 이렇게 만들어져 왔었다.

 

요즘 자주 깜빡한다. 세심히 기억해야 하는 일들을 잊어버리고 시간을 놓쳐 버린다. 나의 부주의로 곤란해진 모든 순간에 바쁘고 정신없다는 핑계로 변명했었다. 그동안 많이 걷지 않았음을, 기억을 만들지 않았음을 느끼게 된 봄날의 산책이었다.

 

“잠시 걸을까?” 라는 말이 그리워지는 오늘을 마무리하면서 족욕을 한다. 오랜 시간을 걸을 수 있는 내 발이 되길 바란다. 좀 더 많은 말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그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발을 닦으며 원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