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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에서 온 편지
짠하네요!


글 이수환 바오로 미끼 신부 | 카자흐스탄 알마티교구 선교사목

 

† Слава Иисусу Христу! (슬라바 이수수 크리스투! : 예수님께 영광!)

◎ Во веки веков! (바 베키 베코브! : 세세에 영원히!)

 

Как дела? (깍 델라? : 어떻게 지내시나요?)

Хорошо. (하라쇼. : 좋습니다.)

 

잘 지내셨나요? 벌써 한 달이 슝 지나갔네요. 저의 ‘버릇없는 친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너무 버릇이 없나요? 아니면 아주 친한가요? ‘버릇없는 친함’이라는 용어가 생소하신 분도 계시죠? 그렇다면 얼른 6월호 〈빛〉잡지를 구해서 저의 편지를 읽어보세요. 그래야 우리 사이에 이해관계가 형성되거든요.

‘버릇없는 친함’에 대해 같이 생각할게 좀 있어요. 시간이 흘러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과의 관계가 다양해집니다. 제가 어릴 때는 윗사람과의 관계만을 생각했는데 이제는 윗사람뿐만 아니라 아랫사람과의 관계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지내는지 유심히 바라보게 됩니다. 개개인이 맺는 구체적인 관계의 특징을 나열 할 수는 없지만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이 보이는데 그중 하나가 ‘세대 간의 관계’가 많이 약해졌다는 것입니다.(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쉽게 말해서 어른과 젊은이 사이에 친해지려는 움직임이 많지 않다는 것이죠.

요즘은 어른이 이야기하면 쉽게 ‘꼰대’라는 표현을 쓰며 멀리합니다. 그래서 어른들도 쉽게 젊은이들에게 다가가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자꾸 다가가고 만나야 관계가 형성되는데 그러지 않으니 관계가 느슨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관계가 없으니 어른만이 가지고 있는 보물, 젊은이만이 가지고 있는 보물을 서로 나눌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버릇없는 친함’이 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친해지기 위해 버릇없이 다가서고, 또 버릇없이 훅 들어올 때 친해지기 위함이라는 생각으로 ‘허허’하며 받아 준다면 참 좋겠다는 것이죠. 그럼 서로가 가진 보물을 잘 나눌 수 있을 텐데 말이죠. 버릇없는 친함을 생각하다가 편지가 아니라 강론을 써 버렸네요. 이놈의 직무 정신은 어쩔 수 없는가 봐요.

 

아이고 편지가 너무 진지하면 재미가 없으니 이곳 이야기를 들려 드려야겠죠? 지난 편지에 약속했듯이 카자흐스탄 알마티 교구 주교님을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7월 편지에 ‘호세 루이스 뭄비알레 시에라(Jose Luis Mum- biale Sierra)’ 주교님의 얼굴을 공개하겠다고 약속했죠? 사진 속에 계시는 분이 제가 버릇없는 친함으로 대하는 분이십니다.

 

지난 편지에 주교님의 성함을 소개하면서 ‘시에라(Sierra)’ 이 부분을 실수로 넣지 않았네요. 공개적으로 사과드리면서 주교님 성함에 대해 잠깐 말씀 드리면 이름은 ‘호세 루이스(Jose Luis)’이고, 성은 ‘뭄비알레 시에라(Mumbiale Sierra)’입니다. ‘뭄비알레(Mumbiale)’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성이고 ‘시에라 (Sierra)’는 어머니로부터 받은 성입니다. 이름에 대한 이야기만으로도 우리와 참 다르죠?

 

주교님께서 카자흐스탄에 오신 것은 24년 전입니다. 저처럼 사제로 왔다가 이 나라에서 주교님이 되셨습니다. 먼 나라에 선교사로 와서 주교님이 되는 삶! 참 멋지지 않습니까? 여러분에게는 100% 멋짐으로 비춰질지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50%는 멋짐, 나머지 50%는 ‘아이고, 우야노!’ 라는 마음입니다. 자기 나라도 아닌 타국에서 일생을 보내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거든요. 저는 ‘선교사’지만 ‘언젠가는 한국으로 돌아가겠지.’ 라는 마음이 있는데 주교님은 그 마음으로 살 수 없습니다. 전자가 본국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는 마음이라면 후자는 타국에서만 살아야 하는 마음입니다. ‘그런 삶이 주어졌으니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생각은 너무 정이 없습니다. 자신의 많은 것을 내어놓지 않고는 그렇게 살 수 없거든요. 아무튼 주교님을 뵈면 대단하면서도 안쓰러운 마음이 듭니다.

 

이곳에서 주교님이 되셨다는 이야기에 갑자기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있네요. 저는 올해 한국 나이로 마흔 둘입니다. 나이에 대해 주교님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미끼 신부 : “주교님, 저도 이제 마흔 두 살입니다. 마흔이 넘어가니 삶의 위기가 오는 것 같습니다. 괜히 좀 쳐지는 느낌이 드네요. 이런 느낌이 마흔의 위기겠지요?”

주교님 : “난 마흔의 위기를 느껴 보지도 못했답니다. 그 위기보다 더 큰 위기를 겪었거든요. 주교품을 받았을 때의 나이가 마흔 둘이었거든요.”

바오로 미끼 신부 : “아!”

 

주교님의 말씀에 제가 바로 입을 다물 수 있었던 건 ‘주교님의 삶의 무게’를 옆에서 봐서겠지요. 옆에서 본다고 해도 직접 겪는 것은 아니니 그 삶의 무게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갑자기 뭔가 모르게 짠한 마음이 드네요. 그래서 부탁드리겠습니다. 주교님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잡지 속의 다른 글을 읽기 전에 호세 루이스 주교님, 그리고 한국교회 주교님들을 위해 주모경을 한번만 해 주세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