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오늘 우리의 생태 영성 살이
동반(同伴)의 영성 살이


글 황종열 레오|평신도 생태영성학자

 

예수님은 아기로 오셔서 고운 숨을 쉬셨습니다. 이 고운 숨에는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의 숨이 담겨 있고, 하느님이 마련해 주신 산소가 생명의 바람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아직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 어머니 태중에서 자라시는 동안 하느님의 전 창조 여정이 예수님의 몸으로 흘러들어서 예수님이 되어 갑니다. 루카 복음서 저자는 사람들이 “그분을 요셉의 아들로 여겼다.”(3,23)는 말로 그분의 족보를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다윗으로 거슬러 올라간 다음에 다시 유다와 야곱과 이사악과 아브라함으로 올라갑니다. 이어서 셈과 노아, 에녹, 케난, 에노스, 셋을 거쳐 아담에 이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담은 하느님의 아들이

다.”(3,38)

루카가 전해주는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자기 족보를 통해서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가닿는다는 진리를 계시합니다. 이것은 신학적 영성적 진리입니다. 존재하는 우리 모두는 한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온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누군가를 당신의 축복으로 태어나게 하신 한, 그분이 우리 모두를 온 사랑으로 돌보시며 우리를 동반((同伴, accompany) 하십니다. 온 우주와 우리를 세상에 있게 하시는 그 크신 분이 마치 우리 존재의 반(半)이시기라도 한 듯 우리와 함께 있어 주시면서(伴) 우리가 우리로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은 하느님의 이 아름다운 동반을 구체적으로 실현시켜 주신 분이셨습니다. 하느님의 땅과 물과 빛과 바람(地水光風)이 하느님의 동반을 충만하게 실현시켜 줍니다.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의 동반 없이는 예수님은 하루도 사실 수 없는 아기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느님의 지수광풍 역시 예수님의 생명을 아무 말 없이 돌보아 주는 부모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그리고 오늘 우리 시대에 프란치스코 교종이 땅을 우리의 사랑스런 “누이며 어머니”(「찬미받으소서」 1항)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배경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루카가 전해 준 것처럼 예수님은 해산 직전에 있던 마리아와 요셉에게 방을 내주는 여관이 없어서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게 됩니다. 아기 예수님은 포대기가 없으면 춥고 구유가 없으면 차가운 바닥에서 병들 수 있는 존재셨습니다. 이 슬프고 아픈 상황 속에서도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 그리고 마구간과 구유, 포대기 등에 담긴 하느님의 카리타스-사랑을 통해서 우리 예수님은 성장하셔서 당신의 일을 이루십니다. 세상의 창조자가 창조된 존재로 우리 가운데 오시어 당신이 창조하신 온 창조물이 창조자 하느님의 존재와 사랑에 참여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찬미받으소서」 99항 참조) 이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은 삼위일체 하느님, 말씀이신 그분의 창조와 그분의 오심에 의해 그분의 숨결로 물들어 있기 때문이겠지요!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후에는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특히 여자 제자들에게 사랑 받으며 돌봄을 받으시고 집과 밥과 물과 빛과 바람을 선물로 받으신 분, 우리 주 예수님, 그분이 당신의 온 사랑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특히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존재의 바닥이 되어 주시면서 그들을 돌보십니다. 이 세상에서 집과 밥과 몸과 물과 빛과 숨을 얻으신 그분이 우리 모두에게 집과 밥과 몸, 물과 빛과 숨이 되어 우리를 동반하고 계십니다. 이런 점에서 참으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후 전 생애는 동반 받으신 분이 동반하시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동반’은 잘 아는 사람이 부족한 사람을 이끄는 것과 같은 ‘지도’가 아니고 ‘지시’도 아닙니다. 가르치는 것’도 ‘설교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는 한 분이시고 스승도 한 분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증거하신 것에 따르면 하느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스승이 계실 뿐이고 다른 모든 존재는 서로 형제이고 제자입니다.(마태 23,8-10) 예수님은 한 분 아버지와 한 분 스승 앞에서, 모든 사람은 교사도 학생도 사제도 평신도도 서로가 서로를 동반하는 과정에 있다는 신학적 진리를 확인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에 의해서 하느님의 새로운 가족, 새로운 제자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발생하는 신학적 영성적 결과가 이렇게 아름답고 단순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탄생으로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신 것처럼 동반의 원형은 ‘임마누엘’(마태 1,23), 곧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 한문으로는 하느님의 ‘임장’(臨場)입니다.(탈출 3,14 참조) 이 원리에 따라 우리의 동반은 동반하는 사람이 동반하고자 하는 그 존재가 있는 그곳(場)에 함께 있는 것(臨), 아니 누군가가 동반(ac-com-pany)하는 그 존재에게 다가가서(ac=ad=〉to) 그 존재가 먹는 빵(pany=panis=〉bread)을 함께(com=cum=〉with) 먹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너와 함께 있음’이, ‘너와 함께 밥을 먹음’이 임장과 동반의 핵입니다. 너(人)의 반쪽(半)이 되어서 너가 있는 곳에 함께 있는 것, 이것이 동반(同伴), 더 줄여서 반 (伴)입니다. 참으로 이런 동반(同伴)이며 이런 반(伴)이 우리 교회와 사회에서 충만하게 이루어져서 우리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행복해질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누군가가 한 존재를 동반할 때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어려운 상황을 견딜 수 있는 힘이 커집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곁에 함께 있어’ 주는 ‘동반행’으로서 예수님의 ‘강생’과 ‘고난’은 의무에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카리타스-사랑의 결과이고 공감(empathy)의 결실이며 연민(compassion)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의 강생과 고난은 우리에게 길이 되어 주는 것이고, 바닥이 되어 주는 것이며, 밥을 함께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이 성찬을 통해 우리에게 증거하시는 것처럼 사랑하는 너희들에게 밥이 되어 주는 것을 뜻합니다.

이 동반의 영성에 비추어 9월 1일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부터 10월 4일까지 전 세계 가톨릭 신앙 공동체가 기리는 2022년 ‘창조 시기’를 기억하면서 지구가 우리를 동반해 온 여정을 돌아보게 됩니다. 지구는 우리가 파괴하고 또 파괴하면서 아프게 해도, 예수님이 성찬을 통해서 그러시는 것을 닮아서, 여전히 할 수 있는 한 우리에게 밥이 되어 주는 중입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집니다. ‘나는 지구에게, 지구에 사는 우리 형제들에게 밥이 되어 주고 있는지? 아니면 밥만 먹고 있는지. 나는 바닥이 되어 주고 있는지? 아니면 바닥을 밟고만 있는지.’ 저 자신에게 던진 이 물음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누면서 ‘동반’에 관한 이 나눔을 마치고 싶습니다. 여러분 모두 우리 공동의 집 어머니 지구와 함께 그분의 빛과 숨 안에서 아름다운 가을, 복된 ‘창조 시기’를 맞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