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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에서 온 편지
소녀의 기도(少女的祈禮, 샤오뉘더 치다오)


글 강우중 베르나르도 신부|타이중교구 선교사목

 

저는 지금 책상 앞에서 피아노 연주곡 ‘소녀의 기도’를 듣고 있습니다. 칭수이의 아침은 늘 이 음악과 함께 시작합니다. 한줄기 햇살이 내려오는 그때 자연스레 들려오는 이 소리는 이제 익숙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첫날을 시작했던 그때에도 저에게 특별한 하루를 선물해 주던 소리였습니다. 낯선 곳에서 뜬눈으로 첫째 날 밤을 보낸 후 동이 틀 때쯤, 저 멀리 어디선가 아주 희미하게 들려오던 이 소리는 낯선 곳에서 아침을 처음 맞이하는 저에게 ‘괜찮아, 알고 보면 여기도 꽤 살만하고 재미있을 거야.’라는 말을 해 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름다운 선율이 들리는 아침 속에서 칭수이천주당의 평일은 미사로 시작됩니다. 저는 본당 신부님 옆에서 공동주례로 첫 중국어 미사에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말만 공동주례일 뿐 실상은 그저 옆에서 구경하는 수준에 불과했지요. 게다가 본당 신부님의 경문 읽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습니다. 특히 경문을 나눠서 읽는 부분에서는 신부님이 ‘읽을 수 있겠니?’라는 기대에 찬 표정으로 바라보지만 죄송하게도 저는 아무런 말없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어 ‘아직은 아닌 것 같습니다.’라는 신호를 보냅니다. 본당 신부님은 언어에 능통하신 분으로 중국어뿐만 아니라 타이완 현지어인 타이위(合語)도 능숙하십니다. 이런 분이 제게 기대하는 것은 한시라도 빨리 언어를 습득하여 사목에 참여하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신부님은 첫날부터 제가 경문 한 줄이라도 읽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이 저는 부끄러웠습니다.

아침의 그 부끄러운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 저는 급히 가방을 챙겨 중국어 수업을 들으러 갔습니다. 제가 언어를 배우던 곳은 타이중교구에 소속된 징이다쉬에(靜宣大學)입니다. 이곳 언어센터는 삼 개월마다 새 학기가 시작되는데 저의 첫날은 이미 수업이 어느 정도 진행된 상태라 배우지 못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또한 공교롭게도 이때가 한 단원을 마무리하는 시험을 보는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배운 것이라고는 한국에서의 몇 개월뿐이고 아직 수업 분위기도 파악하지 못해 첫날부터 시험을 봐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습니다. 결과는 그렇게 좋지도 나쁘지도 않을 정도였지만 가야 할 길이 멀다는 생각에 다시 걱정이 앞섰습니다. 부족함을 만회하려면 조금이라도 더 노력해야 했기에 쉴 새 없이 도서관으로 가서 나머지 공부를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달빛이 비출 때쯤 저는 도서관 창밖을 응시한 채 타지에서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이 하루가 앞으로의 1년이 되겠구나.’

심란했던 일과가 지나가고 본당으로 터벅터벅 돌아가는 길, 제 발걸음 뒤로 아침에 들은 선율이 다시 들려왔습니다. 이른 아침에 느꼈던 위로가 다시 느껴지는 순간 그 선율의 놀라운 실체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쓰레기 수거 차량이 내는 소리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날 저는 필요 없어진 것들이 어디론가 실려가는 소리에 낭만과 위로를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그 상황을 돌이켜 보면 아마도 주님께서 이를 통해 저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시고 싶으셨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필요 없는 존재라고 느껴지는 그때가 바로 변화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