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교황 회칙으로 배우는 사회교리
제7장, 새로운 만남의 길들


글 박용욱 미카엘 신부|교구 사목연구소장

 

비난은 쉽고 대안은 어렵다

최근 서구 사회에서 유행처럼 번진 현상 중에 ‘캔슬 컬처’(Cancel Culture, 취소 문화)가 있습니다.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백과는 캔슬 컬처를 ‘주로 저명인을 대상으로 과거의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행동이나 발언을 고발하고 거기에 비판이 쇄도함으로써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를 잃게 만드는 소셜 미디어 상의 현상이나 운동’이라고 정의합니다. 누구 하나 꼬투리 잡으면 자세한 사정을 알아보지도 않고 득달같이 달려들어 공격하는 행태 말씀입니다.

‘그랜드스탠딩’(grandstanding)도 캔슬 컬처와 함께 떠오른 신조어입니다. ‘관객들이나 언론으로부터 호평을 받으려고 과시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정의롭고 도덕적인지 과시하려고 타인에게 가혹한 판단의 칼날을 들이대거나 비현실적인 주장을 막무가내로 밀어 붙이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렇게 그랜드스탠딩이나 캔슬 컬처가 퍼지는 원인으로는 뒤틀린 온라인 문화가 손꼽힙니다. 인터넷 공간에서 익명으로 댓글을 남기고, 클릭 몇 번으로 정의로움을 과시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책임도, 인격도 개입되지 않습니다. 자기부터 잘못된 습관을 바로잡고 바른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대단히 수고로운 일인데 반해 자신은 책임지지 않을 비난을 남에게 퍼부으며 정의와 도덕의 화신처럼 행세하는 일은 너무나 쉬운 일이지요. 문제의 원인을 차분히 분석하고 공동체적 책임감을 가지고 개선책을 찾는 일은 힘든 일이지만, 누군가를 악마로 몰고 ‘저것들만 사라지면!’을 외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다 보니 매사에 지적하고 판단하는 사람은 늘어 가는데, 솔선수범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 성찰도, 대안 제시도, 타협과 일치의 의지도 손 놓아 버린 채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손쉬운 비난과 지적만 주고받을 때 그 종착지는 어디가 될까요?

 

전쟁과 분열 속에서 평화를 갈구하는 세계

2022년 2월 1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벌써 한 해가 다 되어갑니다. 평화 분위기 속에서 군축을 향해 가던 세계는 군비 경쟁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2021년 전 세계가 지출한 군비가 연간 2조 달러(약 2,600조 원)를 넘더니, 올해와 내년에는 더욱 경쟁적으로 군비를 지출할 추세입니다. 무기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의 점유율이 높아지고 그만큼 더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고 좋아할 일만은 아닙니다. 또 평화가 이상적 평화주의만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국방력을 키우는 일 자체를 폄훼할 수는 없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가 상대방을 절멸시키고 말겠다는 날선 태도로 얻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지난 2017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폴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1994년 르완다 대학살 기간 동안 가톨릭교회와 교회 구성원들이 저지른 죄와 잘못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대학살은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에 증오와 복수심이 부추겨지고 커져 가다가 발생한 비극적 사건이었습니다. 1994년 4월부터 단 3개월 동안 무려 80여만 명이 목숨을 잃는 동안, 어제까지 친절했던 이웃이 오늘 다른 이웃을 때려죽이고, 선생님이 제자를 살해하는가 하면 의사가 자기 환자를 죽이는 일들이 빈번했습니다. 더욱 슬픈 것은 가톨릭 사제들과 수도자들도 이 학살에 가담하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나 성소의 길을 걷는 사람의 소명의식 보다는 정치적 선전선동에 의해서 한껏 부풀려진 적대감과 증오심이 더 중요했던 것이지요.

 

사실 르완다뿐만 아니라 갈등과 전쟁 속에서 신앙인들마저 증오와 반목에 눈멀었던 사례가 한둘이 아닙니다. 함께 살기를 거부하고 상대방을 없애야만 평화가 온다는 태도를 버리지 않으면 앞으로도 그런 일은 반복되겠지요. 평화는 힘의 균형이나 반대 세력의 소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회개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회칙 『모든 형제들』은 평화를 건설하는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어떠해야 할지 이야기합니다.

 

평화의 건설

그리스도교적 평화는 나와 갈등을 겪는 상대방이 온전히 내 뜻대로 변하거나 입도 뻥긋 못하게 눌러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를 건설하는 그리스도인은 상대방이 자신의 관점에서 용납하기 어려운 점이 있더라도 그 다른 점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면서 공존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결코 그가 한 말이나 행동에만 국한하여 바라보지 말고, 그 사람이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하느님 약속을 보고 그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이 약속은 언제나 희망의 빛을 비추어 줍니다.”(228항) 인간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그 사람도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태도, 이것이 평화를 이루는 그리스도인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실로 인간은 삼위일체 하느님이 각각 다른 위격으로 계시면서도 한 분이시듯, 각각 다르지만 하나가 되도록 불리운 존재입니다. 서로 다른 점이 아무리 크더라도 하느님 때문에 받아들이고 공존을 추구하는데 희망이 있습니다. “평화를 향한 여정은 사회의 동질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응당 우리가 함께 일할 수 있게 해줍니다.”(228항)

 

다르지만 하나가 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평화

이를 사회적 대화의 기본으로 제시합니다. 사람이 각각 다르다는 것은 단지 취향이나 성격의 차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개개인이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각 다른 사정과 이해관계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남들보다 우월한 자리에서 더 많은 것을 누리는데 비해 어떤 이들은 억압받고 무시당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과거의 유산으로 말미암아 풍요로운 현재를 누리는 반면 어떤 이들은 누군가의 억압과 지배로 고통받은 과거의 그림자 때문에 오늘도 힘겨운 나날을 보냅니다. 평화는 그런 차이를 못 본 체하는 일이 아닙니다. 서로 다름을 직시하는 진실, 그리고 부당한 다름을 바루는 정의, 그리고 상처를 낫게 하는 자비, “이 세 가지가 하나로 결합되어 평화를 건설하는 데에 핵심 역할”(227항)을 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평화는 “전쟁의 부재만이 아니라 흔히 잊히거나 무시되어 온 우리 형제들의 존엄을 인정하고 보장하며 실질적으로 재확립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입니다.”(233항) 인간의 이러한 노력은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지속될 수 없습니다. 교황님의 기도를 함께 바치면서 우리가 평화를 이루는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은총을 청합시다. “하느님, 저희가 마음을 열고 이념, 언어, 문화, 종교의 차이를 뛰어넘어 형제자매들을 만날 수 있게 도와주소서. 하느님, 저희 모두에게 하느님 자비의 기름을 부어 주시어, 과오와 오해와 다툼으로 입은 저희의 상처를 치유해 주소서. 또한 저희에게 은총을 베푸시어, 저희가 겸손하고 온유하게 평화 추구의 험난하지만 풍성한 길로 나아가게 하소서.”(254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