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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動) 하다
향을 피우다


글 김관호 리카르도 신부|영천성당 보좌

고마운 사람에게 향을 선물로 받았다. 늘 초조하게 살아야 했던 신학생 때부터 심신의 안정을 위한 핑계로 향을 피워왔다. 하지만 신부가 된 이후 살게 된 방 안에 있던 공기청정기가 향을 반기지 않아 한동안 피우지 않았다.

 

다양한 향이 담긴 선물이 궁금해 매일 향을 피운다. 향마다 상세하게 적힌 설명을 읽으며 설명이 안내하는 대로 봄날을, 때로는 비 오는 늦여름의 모습을 떠올린다.

 

사계가 담겨 있는 향을 피우면서 지난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 또 겨울을 생각한다. 너무나 아득하고 막막했던 지난 봄과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여름, 그리고 의미로 가득 찼던 가을, 또 차갑게 아린 겨울 속에 서 있었던 지난 시간이 각각의 향과 함께 타오른다.

 

그리고 다 타버린 향에 쌓인 재의 향에서 지난 시간의 기쁨과 아쉬움을 마주한다. 이 기쁨과 아쉬움은 차마 모두 담아 둘 수 없기에, 재를 비워 버리고 또다시 향에 불을 붙인다.

 

어느 날 아침, 수영장 물의 비릿함이 남아 있는 콧잔등을 안고 내 방 입구에 들어섰다. 문을 열자 낯설지만 익숙한 향이 콧잔등에 남아 있던 비릿함을 없애 주었다. 새로운 향을 기대하면서, 동시에 지난 사계를 떠올리며 피웠던 수많은 향이 방에 배여 버렸다.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 또 겨울의 향과 푸른 산과 달콤한 꽃의 향이 방 안에 가득해졌다. 머리카락에, 그리고 추운 겨울을 막아주는 외투에 향이 묻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지나온 지난 시간에 나를 남기곤 했다. 때론 기억해 주길 바라는 그런 욕심도 있었다. 다 타버린 채 재밖에 남지 않은 곳에 또 다른 향을 채우듯 나를 남기려 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앞에서 그런 욕심은 재로 남아 잔향이 되어 가고 있다.

 

새로운 향꽂이에 새로운 향을 꽂아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이 시간 속에서 내가 머물 그 자리에 배이게 할 나의 향은 부디 쌓이지 않고 옅어지길….

 

향을 또다시 피운다. 향의 연기는 아래가 아니라 늘 위를 향한다. 땅만을 바라보던 시간이 있었다.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땅으로, 그리고 바닥으로 내 마음과 시선이 향해 있었던 그런 시간이 있었다. 땅으로, 바닥으로 향하던 나를 붙잡아 주었던, 내가 향해야 할 곳은 아래가 아니라 높은 곳임을 알려 주었던 친구가 되고 싶었고, 친구라 부르고 싶었던 사람들의 고마움으로 나는 또 향처럼 나를 태우려 한다.

 

향을 피우며, 달큰한 계피향이 느껴지는 따뜻한 차를 마시며 혼자 생각했다. 향을 피우며 참 요란한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참 요란한 사람이라고. 이 요란함의 보람을 글로 정리하며 나는 오늘도 향을 피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