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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본당사무직원회 일본성지순례기
‘믿는다’는 것의 의미


글 권인옥 뽀리나|성산성당 사무장

2023년 4월 17일(월)부터 20일(목)까지 대구대교구 사무직원회 120여 명이 일본 나가사키·고토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코로나19 이후 이런 대규모의 모임은 생각지도 못했다. 걱정과 설렘 안에서 출발 날짜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여행사와 회의를 몇 번이나 했는지? 시시때때로 바뀌는 현지의 상황, 사무직원들의 상황, 여행의 설렘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준비 시간이었다.

나가사키는 1571년 포르투갈 선박이 들어온 후 무역항이 번창해져 일본에서 비교적 일찍 서양문물이 들어온 대표적인 도시로, 일찍이 천주교 포교의 중심지였지만 일본이 쇄국 정책을 편 후에는 천주교의 처형장이 되었다.

첫 순례 장소인 우라카미 천주당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우라카미 천주당은 붉은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 30여 년에 걸쳐 건축하여 1925년에 완성한 아름다운 동양 최대의 대성당이라고 한다. 1945년 8월 9일 우라카미 천주당에 원자폭탄이 투하돼 미사를 봉헌하고 있던 1만 2천여 명의 신자 중 8천 5백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때 성당과 종탑도 무너져 현재의 건물은 1980년도에 재건한 것이라고 한다. 성당 입구와 뒤쪽에 피폭당한 성상들과 종탑이 전시되어 있으며 우라카미 천주당 왼쪽 제단에 모셔진 성모상도 그때의 참상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성모님의 검게 탄 두 눈을 보며 성모님은 과연 무엇을 보았을까? 성모님이 죽어가는 자식들을 차마 볼 수 없어 두 눈이 멀었다는 어느 누군가의 말에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하느님을 믿지만 때로는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는 나를 성모님은 뭐라고 하실까? 금교령과 시작된 박해에 원자폭탄의 투하! 우라카미 사람들의 믿음은 어디서 온 것인지 생각하며 새삼 믿음을 되새겨 본 하루였다.

둘째 날 오전 7시 40분 고속 훼리를 타고 나가스항을 출발해 오전 9시 50분 후쿠에항에 도착했다. 생각지도 않은 멀미를 하며 힘들게 고토 섬에 도착했다. 제주도의 3분의 1 크기지만 성당이 50여 개나 있다고 한다. 고토시 직원들의 환영을 받았고, 다음 날 고토시 신문에도 소개되며 코로나19 이후 대규모 관광객이 된 우리들을 환영해 주었다.

고토시로 이주한 가톨릭 신자들은 불교 신자로 가장해 ‘잠복 신자’로 생활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일본 천주교의 유물에는 박해를 피하기 위해 불교의 관음보살상으로 만든 성모상 등 신자들의 모든 물건에는 신자임을 표시하는 십자가 모양이 숨어 있다. 그 성상들을 보며 순교자들의 마음과 신자들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지 않기 위한 몸부림을 느꼈다.

성의한 선교사 추방령과 에도막부의 금교령에 따라 교회당은 파괴되고 선교사들도 추방됐다. 1637년 탄압에 항의하던 교우들이 ‘히라 성터’에서 농성을 벌이자 선교의 가능성이 있는 포르투갈 선박을 추방하고 쇄국 정책을 펼치기 시작해 공동체는 붕괴되었다. 이때 신자 대부분이 순교하거나 배교를 했다.

26성인 순교 300주년 기념으로 세운 성당을 순백 성당이라고 한다. 1645년 원폭으로 첨탑과 외벽만 남아있던 것을 1951년에 재건축했다. 이곳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목조 고딕 양식의 오우라 성당을 방문했다. 이곳은 일본의 신자 부활 사건의 장소로 250년이나 기다린 사제를 만나게 되었지만 다시 박해의 시작으로 헤어지게 된 곳이다. 그리고 조선의 순교 성인과도 연관이 있다. 1866년 3월 30일 조선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성 다블뤼 안 안토니오 주교, 성 오메트르 오 베드로 신부, 성 위앵 민 루가 신부, 장주기 요셉 회장, 황석두 루가 회장이 순교했다. 이들의 시신은 담배밭에 매장되었다. 황석두 루가의 시신은 자손들이 모셔갔지만 다른 분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사람들이 담배밭을 파헤지자 순교자의 유골이 훼손될 것을 염려한 프랑스외방선교회 블랑 백 부주교가 유골을 잘 보존할 것을 지시했다. 그해 11월 6일 유골은 나가사키로 옮겨졌고 12년간 오우라 성당에 안치되었다. 1894년 5월 22일 한국으로 온 유골은 명동성당 지하에 모셔져 있다가 1990년도에 절두산 성지에 안치되었다.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의 무대로 유명한 구라바엔과 평화의 성자, 나가이 다카시 박사의 여기당, 26인 성인기념관, 성 필립보 성당을 둘러보고 운젠으로 이동했다. 운젠의 뜨거운 온천 열기를 느끼며 자연을 이용해 고문한 인간의 잔혹성에 대해 생각했다. ‘크리스천 순교비’라는 안내석과 십자가만이 역사적인 순교 현장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마지막 날의 여정으로 시마바라 성을 방문했다. 천수각 내부에 기리시탄 자료 및 영주 정치 시대의 향토 자료, 민속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종교를 떠나 언제 어디서나 어떤 이유로든 ‘믿음’의 중요성을 기억해야 한다고 하셨던 어느 신부님의 말씀이 새삼 떠올랐다. 종교라는 것은 가족, 친구,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믿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들키면 목숨을 내놓아야 했던 잠복 신자들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종교를 넘어서 서로를 믿고 의지했던 마음 말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인가? 나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이 성지순례를 허락해 주신 조환길 대주교님과 본당의 주임신부님들, 그리고 순례의 여정 동안 우리를 인도해 주신 조현권 사무처장 신부님과 순례길이 평화롭게 마무리되도록 도와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함께하지 못한 본당 사무직원 여러분들, 다음에는 꼭 같이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