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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대구대교구 순교자 현양 기행문 공모전 ④ - 우수상
묘지에 부는 바람


글 정충양 레오|복현성당

어둠이 있어야 빛의 존재가 더욱 빛나듯이 사방이 적막할수록 자신의 존재는 더욱 뚜렷해진다. 새벽까지 잠 못 이루는 나의 자아는 지금 이 순간, 날 선 고슴도치의 등처럼 한껏 바늘을 곧추세우고 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며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인생을 치열하게 살지 못함에 대한 일갈이며 죽어서도 자신의 행동에 책임이 따른다는 뜻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이 말의 무게가 점점 더해지는 것 같다. 죽음과 이웃해야 하는 반백의 무게 탓인지 과거에는 느끼지 못했던 시간에 대한 절실함이 느껴진다. 좀 더 열심히 살지 않았음과 더 사랑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온다.

나는 마음이 허할 때 이따금 들리는 장소가 있다. 유독 그곳에서는 삶과 죽음의 차이를 극명하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구 중구 남산동 한쪽에 자리한 천주교 대구대교구 성직자 묘지는 방문자 스스로 옷깃을 여미게 하는 숙연함이 있다. 입구의 양 기둥 벽면에는 라틴어로 “HODIE MIHI CRAS TIBI(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라고 적혀있다. ‘오늘 이곳에 묻힌 성직자들의 죽음이 내일 바로 우리에게 찾아온다’라는 의미로 해석되며 인생을 허비하지 말라는 경구로, 이곳에는 평생을 사제로서 구도자의 길을 가고자 했던 역대 신부님들이 영면하고 있다.

성직자 묘지는 도심이 지척으로 내려다보이는 나지막한 언덕 양지에서 마치 방문객을 기다리는 듯이 오롯이 자리잡고 있다. 무덤 자체의 아스라한 적막함과 이따금 담을 타고 넘어오는 도심의 소음이 겹치면서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인지 죽음의 색채가 더욱 진하게 다가온다. 그곳에 가면 죽었어도 살아있는 죽음과 살아있어도 죽음보다 작아진 자아가 보였다. 결코 평범하지 않았을 그분들의 삶을 반추하면서 묘비 사이를 걷노라면 손에 들려진 묵주의 무게는 항상 내 삶 이상으로 무거웠다.

사람들이 종교에 귀의하는 일차적 이유는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고 그때부터 새 출발을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나를 이만큼이라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간의 신앙생활을 통해 잘못에 대한 회개와 그에 대한 용서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매번 고해성사를 할 때마다 나의 일탈되었던 행위를 돌아보고 그와 같은 죄를 짓기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한 가운데 신앙생활이 이어지고 기도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남을 위한 마음도 함께 성장하는 것 같다. 동시에 부족한 부분은 더욱 크게 느껴진다. 기도하면 할수록 주님께 다가서지만 다가서면 설수록 나는 작아지고,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에 대한 갈증으로 애가 탄다.

바람에 나뭇잎은 흔들리지만 떨어지지 않기 위해 버티다 결국 그루터기 아래 묻혀 기꺼이 거름이 될 뿐이다.

“저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시여! 저를 다만 당신의 포도나무 가지 끝에라도 매달려 있게 하소서. 그것도 아니라면 낙엽이 되어 거름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