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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대구대교구 순교자 현양 기행문 공모전 ⑤ - 최우수상
하늘 아래 첫 공소, 구룡공소를 가다


글 최미경 막달레나|동천성당

해마다 11월 위령성월이 되면 돌아가신 분들을 더 생각하게 된다. 얼마 전 성직자묘지에 갔다가 이임춘(펠릭스) 교장 신부님의 묘소를 보면서 문득 ‘구룡공소’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임춘 신부님은 나의 은인으로 모교의 교장 신부님이셨다. 고등학교 시절 신부님 덕분에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구룡마을에서 태어나신 신부님은 선종하실 때까지 지역민과 교육을 위해 헌신하셨고 가난의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교육을 강조하며 중·고등학교를 설립해 사람을 살리고 희망을 심는 일에 일생을 바치셨다.

김장을 하러 고향 용성에 갔다가 늦은 오후에 남편과 구룡공소로 향했다. 구룡마을은 친정 엄마와 함께 닭백숙을 먹으러 몇 번 갔지만 늘 시간에 쫓겨 공소에는 가 보지도 못하고 돌아오곤 했다. 구룡공소로 가는 구불구불 좁은 길, 차 안에서 잠시 구룡공소에 대한 옛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하늘 아래 첫 공소라고 할 만큼 깊고 높은 산 위에 자리한 구룡공소는 을해박해(1815년)를 피해 청송 노래산과 진보 머루산 등지에서 피난 온 교우들이 교우촌을 이루었다고 한다. 병인박해(1866년) 때는 이임춘 신부님의 조부를 포함한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신부님의 조부는 구룡마을에서 용성면까지 다니며 전교를 했고 교리를 가르쳤다고 하니 그 신앙심은 후손들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졌을 것이다. 용성에서 3대째 교우인 우리집도 어쩌면 그 당시의 전교로 신자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초창기 교회 시절부터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구룡공소는 인근 경산, 영천, 경주, 밀양 등지에 산재해 있던 신자 간의 교류를 통해 주변 지역 신앙 줄기의 뿌리 역할을 해 왔다. 이처럼 소중한 신앙유적지인 구룡공소가 고향과 가까운 곳이라고 생각되니 왠지 모르게 뿌듯했고, 타성에 젖은 신앙생활을 다시 되돌아보며 하느님의 자녀로 겸손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담한 한옥으로 새 단장한 공소의 오른쪽으로 야외 십자가 동산이 먼저 눈에 띄었다. 십자가 밑에 수북히 쌓인 낙엽을 보면서 고즈넉한 아름다운 늦가을을 느낄 수 있었다. 한때 무성한 꽃을 피우며 여름의 열정을 자랑했겠지만 지금은 버림과 비움으로 추운 겨울을 날 준비를 하는 나무들처럼 우리네 삶도 조금은 쓸쓸하더라도 또 다른 준비를 위해 버리고 비우는 시간을 가져야 함을 묵상하게 되었다. 내 삶의 계절도 잎이 무성했던 여름은 가고 어느새 버리고 비우며 삶의 마지막 계절인 겨울 준비를 하는 가을을 보내고 있다. 앙상한 나무들과 십자가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면서 인간이 무엇이기에 목숨까지 내놓으시면서 사랑하시는지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자녀로 현재를 기쁨과 희망으로 잘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박해 시대 교우촌이었던 구룡공소에는 순교자가 한 분도 없다고 한다. 보통 교우촌이 발각되는 가장 큰 이유가 배교자의 밀고인데 구룡공소에는 단 한 명의 배교자 없이 신앙을 지키며 또 다른 박해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그 모습을 유지해 왔고, 보통 옹기를 구워 팔거나 짚신을 엮어 생계를 유지한 교우촌과 달리 이곳 신자들은 천수답을 일구어 쌀농사를 지으며 살았다고 한다.

1882년 경상도 지역을 순회 전교하던 로베르(김보록) 신부님이 이곳에서 판공성사를 주실 때 60여 명의 신자가 있었다고 한다. 1921년에는 대구대교구 초대 교구장 드망즈(안세화) 주교님이 로마 성모대성당(성모설지전)을 주보로 정한 뒤 구룡공소를 축성하고 미사를 봉헌했다고 한다. 이 사실을 기록한 문서 사본이 현재 공소 경당 내부에 전시되어 있다.

용성성당 관할인 구룡공소는 1993년 이문희 대주교님의 성지 개발 지시로 성역화 작업을 통해 2018년 현재의 교구장님이신 조환길 대주교님의 축복식 미사와 함께 신앙유적지로 선포됐다.

‘천주 공교회 성당’ 현판 아래 문 안으로 들어서니 정면에 성모상이 있고 마당 오른편에는 형구돌(항쇄바위, 옛날 죄인들 참형 도구)이, 왼편에는 순례자를 위한 스탬프가 있다. 공소 경당은 작은 한옥 네 칸 건물로 성당 내부는 작고 아담하면서도 깨끗하고 성스러운 공간임을 느끼게 한다. 제대와 신자석 사이에 울타리가 쳐져 있어 마치 유럽 여행 때 본 성당들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제대가 벽 쪽에 붙어 있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의 미사 전례를 엿볼 수 있었다. 문득 구룡공소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신부님들은 어느 방향을 보면서 미사를 집전하는지 궁금했다. 또 하나 신기한 것은 ‘애긍함’으로, 어린 시절 미사 봉헌 예물을 넣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미소가 절로 났다. 그러면서 그 옛날 이임춘 신부님의 조부 시대 때부터 사용해 오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숙연해지기도 했다.

경당 안에 있는 십자가의 길 14처는 드망즈 주교님 때 만들었다고 한다. 시간이 없어 십자가의 길을 하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구룡공소를 순례하고 나오면서 한때 120여 명의 신자를 품었던 이 산속 마을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루시아 자매님처럼 마을을 떠나지 않고 지키며 사는 분들에게 고마웠다. 모진 박해와 일제 강점기, 6.25 전쟁 같은 격동의 세월을 거치면서도 꿋꿋이 자리를 지킨 구룡공소가 선조들의 열정을 전하는 소중한 장소로 더 많은 신자들이 찾는 공간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