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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대구대교구 순교자 현양 기행문 공모전 ⑦ - 최우수상
내가 할 수 있는 친교와 복음 전하기


글 박하윤 글라라|동촌성당

 

10월 1일 토요일, 성당에서 주일학교 교리를 대신해 관덕정 순교기념관과 성모당을 순례한다는 말에 중간고사가 끝나 그동안 쌓인 피로를 풀며 느긋하게 주말을 만끽하고자 했던 나는 ‘그냥 빠질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하윤, 하윤, 대박! 어제까지 순교자 성월이고, 오늘부터 로사리오 성월인데, 오! 오! 뭔가 느낌이 좋다. 성인들에게, 성모님께 시험성적 좋게 해 달라고 기도 한번 하고 와.” 하며 잔뜩 부풀린 엄마의 정성스러운(?) 애교에 엄마 소원 들어주는 착한 딸의 심정으로 못 이기는 척 일어나 억지로 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성당 마당에 들어서니 삼삼오오 모여 있는 초등부 아이들이 평소보다 들떠 있었고, 역시나 중·고등부는 늘 모이는 몇몇이 전부였습니다. 시작 기도를 바치고 첫 목적지인 관덕정순교기념관으로 이동했습니다.

제게 관덕정순교기념관은 아주 특별한 곳입니다. 사랑하는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평생회원으로 계신 곳으로 홀로 미사를 와도, 기도를 드려도 어색하지 않고, 게다가 시내 중심지에 있어 제2의 본당과도 같습니다. 그렇지만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사형이 직접 이루어진 곳, 웅장한 대문, 로비의 스테인드글라스, 어두컴컴한 지하 경당, 이윤일 요한 성인의 유해가 모셔진 제대 등 모든 것이 조금은 무섭고 어렵고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예전에 관장 신부님께서 “순교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이 어둡고 무섭고 칙칙해야 할까? 우리 순교자들도 그런 마음이셨을까? 아마 아닐 거야. 옥중에서도 서로 의지하고 하느님 나라를 살기 위해 밝고 기쁘게 사시다 더 기쁘게 순교하셨을거야.”라며 ‘그들의 영성은 기쁨’이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그 마음이 이해되어 관덕정순교기념관에 오면 늘 마음이 기쁩니다.

대구대교구 제2주보 이윤일 요한 성인은 우리처럼 평신도이시며 순교하시는 날까지 전교회장 직분을 수행하신 분으로 옥중에서도 힘들어하는 신자들과 배교하는 신자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아침·저녁기도를 함께 바치며 신앙생활을 기쁘게 하셨다고 합니다. 신부님을 한번 모시기도 힘든 그때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목숨을 내놓고 살며 교우들을 더욱 깊은 믿음으로 이끈 이윤일 요한 성인이 평신도로서 해 낸 업적은 대단하다는 말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엄마 손에 이끌려 성당에 갔던 기억이 문득 떠오릅니다. 외할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모든 가족이 큰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신앙은 우리 가족이 슬픔을 이겨 낼 큰 힘이었고, 그렇게 길고 긴 냉담을 풀게 되었습니다.

모든 게 낯설고 웅장한 성당의 모습이 신기했습니다. ‘글라라’라는 세례명은 있었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도, 첫영성체를 받기 위해 평소 쓰지 않는 문장으로 된 기도문을 외우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첫영성체는 테스트를 통과하는 첫 관문과도 같은 기억이었지만 가톨릭 신자가 되어 드리는 기도로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기도문을 열심히 외우고 익혔습니다. 또 첫영성체를 받아야만 영할 수 있는 성체의 맛도 무척 궁금했습니다. 수녀님께서 천상의 맛이라고 했으니 그럴 수밖에요. 틈틈이 외할아버지를 위해 마음에 있는 기도를 드렸는데 그것이 나중에 ‘화살기도’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첫걸음이 외할아버지의 죽음과 함께라는 것은 제 짧은 인생에 큰 기록적인 사건이었지만 중학교 3학년이 된 지금 미사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생활은 첫영성체 당시 깊은 슬픔을 이기고 외할아버지를 위한 기도의 시간이라기보다는 의무감 같은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코로나19로 미사가 중단되고 성당을 가지 못했던 때 오히려 성가신 일 중에 하나가 줄어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엄마의 성화에 못이겨 방송 미사를 시청하면서도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며 의무를 다했다고 했던 때도 있었고 중간고사, 기말고사 기간이 되면 친구들처럼 시험공부를 핑계로 미사와 교리에 빠질 궁리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유혹이다.”라는 엄마의 잔소리로 성당을 가야 하는 명분을 찾았습니다. ‘내가 가지 않으면 미사 전례에 차질이 생길 것이고, 밴드에서 미사곡 연주에 베이스 기타 소리에 문제가 생길 것이고, 레지오에서 묵주기도를 선창하거나 출석을 부르는 단원이 없을 것이다.’ 기쁜 마음보다는 주일에 빠지면 안 되는 여러 가지 이유를 마음속으로 나열하며 나를 다그치고는 무거운 마음으로 주일을 맞이할 준비를 의무적으로 했습니다.

‘어쩌면 내가 없어도 누군가는 그 일을 할 거야.’ 하며 결석하는 날도 가끔은 있었을 것이고, 그러저러한 날에 공부를 집중적으로 해 퍼펙트한 성적을 받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순교 복자 성인들도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과 같은 분들이 아닌 우리와 같은 나약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철 베드로 성인은 나보다 적은 14살의 나이었다고 하네요.

내가 저 시대를 살았더라면 이웃의 아픔에 가슴 아파하기도하고 두려움에 떨기도 하며 사형장에 끌려 나가는 교우를 보며 두려움에 신앙을 버리고 배교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감히 망나니가 휘두르는 칼날 앞에, 배교의 갖은 고문 앞에 “‘천주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목숨을 내놓더라도 천주 하느님을 버리지 않겠다.’라는 신앙 고백을 기쁘게 하며 감사의 기도를 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머뭇거리는 말도 부끄러운 말일뿐 못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먼저 할 것 같습니다. 기적이라도 일어나 아픔, 두려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어진다면 모를까요. …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하고 떨리고 모자라고 의지하고자 할 때마다 내 안의 작은 신앙이 늘 예수님께 기도하고 성모님을 찾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꼭 나를 지켜 주신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성모당에 와서 성모님께 기도하고 촛불 하나를 켜면 어두웠던 마음이 밝아지는 것도 같습니다.

아직은 신앙생활보다 공부를 잘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인지, 주일에 미사를 꼭 가는 게 옳은지에 대한 답조차 오락가락하지만 이렇듯 기도하고 미사 중에 죄를 고하거나 고해성사를 본 후면 ‘참 옳은 일을 했구나. 예수님께 칭찬 받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다음에 그 친구를 도와줘야지.’ 등등 생각하는 것이 내 작은 마음 안에 주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문득 의무감으로 참여하는 주일학교, 레지오마리애, 전례 봉사자의 소임이 누군가에게는 천주교를 알게 하는 일이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비춰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15살, 중학교 3학년인 내가 하는 일이 기쁘고, 또 주님 보시기에 좋은 일이면, 그것이 곧 친교이고 복음을 알리는 길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성모당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